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1화 (81/103)
  • 산적 구자성 - [8]

    굳게 잠긴 호텔의 문을 노려보며, 황군은 어떻게 진입할까 고민했다. 창문을 깨고 진입할까? 문을 폭파해? 조금 시간을 준다면 헬기를 띄울 수도 있다.

    고작 호텔 하나 점령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 안에 절세고수가 있다고 하지만, 감히 황군을 상대로 싸울 수는······.

    바로 그 자신감 때문에 황군은 약간 행동이 늦었다. 어지간해서 그것은 작전에 앞선 신중함이라 말해줄 수 있었겠지만 이 경우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중에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다.

    고작 삼십 분도 되지 않아 호텔에 경찰들이 몰려왔다. 황군은 처음에 저들이 자신을 도우러 온 줄 알았지만, 경찰들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경찰들은 호텔 주변을 호위하듯 지키고 섰다.

    특수부대 중령 출신의 황군은 처음에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얼이 빠졌다가, 급기야는 잔뜩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이 씨발 새끼들이, 뭐 하는 짓들이야! 왜 산적 새끼들을 지켜!”

    나이든 경감은 얼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신고를 받았으니까 왔지요? 황실 시위대라고 시민 저택에 맘대로 들어갈 수야 없는 걸로 압니다마는······”

    “시민 저택은 무슨! 월녀님 납치범이 저기 있는데!”

    “월녀님이 저기 계세요?”

    “그래!”

    “증거는······ 정말 증거가 있더라도 이렇게 막무가내면 안 되지요? 영장을 발부하고 뭐 그래야······”

    횡설수설하는 경감을 상대로 황군 병사들은 반쯤 미쳐 소리를 질러댔지만, 시내 한복판에서 냅다 싸울 수야 없는 일이었다.

    황실 병사들은 아연한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경찰 쪽이랑 아직 얘기 안 됐어요?”

    “경찰에 알려주면 그놈들이 구자성이한테 전해줄 게 분명했으니까 작전 직전에야 말했다는데.”

    “말했다고? 그런데 왜 막아요?”

    “몰라, 전달이 안 됐나? 아니면 여기 청라 경찰들이 상부의 말 다 씹고 행동하는 건가?”

    후자 쪽이 더욱 가능성 있어 보였다. 이 도시 청라는 교통의 요지요, 이곳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는 녹림의 자회사들이 깔아댄 것 아닌가. 그 과정에서 녹림이 이 도시에 투자한 자금은 실로 막대한 수준이다.

    지방에서 주로 그렇지만 이 도시에서 녹림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이곳의 시장도 경찰도 누구 편을 들어줄지는 뻔한 일이다. 그래서 구자성도 이곳의 호텔을 본거지로 삼았을 것이다.

    “이대로 시간 끌어서 어쩌려는 거래? 결국 영장이 발부되긴 할 건데.”

    “그러기 전에 아는 정치인들한테 도움 청하려는 거겠죠.”

    “니미······”

    바깥의 사람들이 초조함에 미쳐가는 가운데, 호텔에 있는 구자성의 속내도 편치 않았다. 저 사이렌 소리에 고막이 울릴 지경이잖은가.

    구자성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그놈의 무적무적자, 대가리에 정말 도끼를 박아주고서 돌아올걸. 자신이 함정에 걸려도 제대로 걸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파멸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구자성도 알았다.

    지금 자신의 비서들은 온갖 의원이며 경찰청장 따위 여러 도움될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다. 그로써 파멸을 유예하거나 그 파멸의 수준을 줄일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 가진 자원을 모조리 퍼부어봤자 이 일을 없던 것으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쯤 TV에서는 경찰과 황실 간의 대치가 긴급속보로 나오고 있을 것이요, 내일 아침 뉴스에는 모든 방송사들이 이 사건을 떠들어댈 것 아닌가.

    그래서, 저들이 월녀를 데리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눈치를 보니 그런 것 같은데.

    만약의 경우에는 혼자서라도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걸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저놈들이 그리 소중하게 여기는 그년을 가지고 인질극이라도 벌여야 할지도······.

    차마 추하게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건 정말 해야 한다면 잘할 자신은 있다. 예전에도 자주 해본 짓 아닌가.

    생각을 정리하며 분노를 식히던 와중이었다.

    쨍그랑 하고, 뭔가 크게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자성이 눈을 부릅떴다.

    “뭐야?”

    *******

    행인을 포함한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호텔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이쪽으로 쇄도하듯 달려오는 한 바이크를 발견했다.

    “당신 누구야! 정지!”

    한 경위가 LED 경관봉을 흔들며 제지하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지!”

    경찰이 애타게 부르든 말든, 바이크는 호텔을 향해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올 뿐이었다.

    심지어 바이크 운전자는 경찰들의 존재조차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어, 하고 경찰들이 급히 몸을 피하는 가운데 기어이 바이크는 호텔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급히 정지했다.

    거기 타고 있던 운전자는 지금까지 달려온 관성 탓에 바이크에서 사출되듯 저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 몸이 창문에 닿았다.

    기어이 창문을 깨고 호텔 안에 들어선 남자는 한 바퀴 바닥을 굴렀다. 그러고서 충돌의 충격이 없는 듯 멀쩡하게 일어섰다.

    그 머리에 쓴 헬멧이며 온몸의 보호장구가 어지간히도 고급품이었던 것이다.

    천서인, 무림에서는 박 회장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

    천서인이 어렸을 때, 그 당시 한국은 기업인들조차 무림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곳이었다.

    기업의 사업 허가를 내줄 시청부터 노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무림의 손이 뻗쳐 있었다. 당시의 가장 거만한 기업 회장도 잘나신 무림 협객의 요구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 회장의 아버지는 무림맹의 무이자 대출 요구를 거절했다. 어지간히도 거액을 요구했던 모양이다.

    무림맹은 그 거절을 참아넘길 수 없는 모욕으로 간주했다.

    무림맹의 지시를 받는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가운데, 가문의 별장에 불이 붙었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당시 어렸던 천서인은 아버지에게 닥친 일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뭘 하건 별장이 불타건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나 여전히 박 회장의 아버지는 굴복하지 않았고, 기어이 무림맹의 히트맨 하나가 저택에 침입했다.

    그 손에는 삐죽한 칼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그 칼로 재벌가의 누군가를 해치지는 않았다.

    다만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개 한 마리를 죽였다.

    그 개의 잘린 머리를 보았을 때 가정부가 비명 질렀다. 가정부는 눈을 비비며 찾아온 천서인을 쫓아내듯 방에서 내보냈다.

    천서인의 강아지였다. 네 살 생일선물로 받은.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 속에서 비로소 박 회장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분노 어린 관심으로 사건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의 친우였던 무적비비탄을 불러 무림맹과의 화해를 주선하는 것도, 결국에는 기한이 정해진 조건으로 기어이 무림맹에 돈을 빌려주었단 것도 천서인은 똑똑히 보았다.

    분노 속에서 천서인은 복수를 맹세했다.

    당시에도 건강을 위해 익히고 있었던 무공을 더욱 치열하게 배우면서, 무림의 존재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천서인의 가슴에는 분노만이 아닌 다른 감정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답답함이었다. 너무나도 불합리한 것을 보았을 때,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그 불합리한 것을 보아넘기고 있을 때 느끼는 답답함.

    결국에는 가슴을 가득 채워버린 답답함 속에서 어린 천서인은 생각했다.

    왜 깡패 새끼들한테 굴복해야 하는가? 저들이 대체 뭐라고?

    왜 법과 경찰은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이 모든 불합리가 어찌 용납되는 것인가? 왜 저들이 대낮에 활보하게 내버려두나? 이 나라에는 천치 새기들만 사는 건가?

    저들이 바로잡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바로잡아야겠다.

    몸이 성장한 뒤, 천서인은 직접 익힌 무공으로 무림 문파들을 습격했다. 그러면서 치른 온갖 싸움과 복용한 값진 영약들에 힘입어,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절세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즈음에는 그때 죽은 강아지가 더는 그립지 않았고 당시의 슬픔이며 분노도 잊었다.

    그러나 가슴에 깊이 자리 잡은 답답함은 남아있었다.

    당시 소년의 복수는 끝났고 무림은 쇠퇴했지만, 어릴 적에 트라우마로 찾아온 그 답답함은 노인이 된 지금도 전혀 줄어들지 않은 채 그 가슴에 남아있었다. 이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박 회장이 헬멧을 벗었다.

    “저 늙은이······!”

    드러난 그 얼굴을 본 녹림도들이 기겁하여 위층으로 올라가 소리 질렀다.

    “총채주님!”

    박 회장은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서 두목을 불러오라구, 깡패 새끼들.

    과연 놈들의 두목이 내려왔다.

    구자성은 호텔에 침입한 박 회장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회장님, 뭡니까? 여기에는 왜 와요?”

    박 회장이 대답했다.

    “너 죽여버리러.”

    구자성은 여전히 황당한 눈치였다. 박 회장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예전에도 이런 짓하다가 기소되지 않으셨소? 그래서 이후론 안 그러시는 줄 알았는데.”

    “지금마저 몸 사릴 순 없지.”

    깨진 창틈으로 경찰들이 들어왔다. 경관들이 봉을 흔들며 뭐라 뭐라 소리쳤지만 박 회장은 그들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당장 방해받는 데만 화가 치솟았다.

    “꺼―져―! 니들이 깡패 새끼들보다 먼저 뒤지고 싶나―!”

    크게 벌린 입에서 사자후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목소리에 실린 초저주파를 경찰들이 당해내기는 어려웠다.

    경관 몇몇이 뒷걸음질 치고 한 명은 주저앉은 가운데, 구자성이 혀를 찼다.

    “민중의 지팡이한테 막 협박하고 그러시네. 법이 안 무서우신가······”

    박 회장이 이죽거렸다.

    “법은 거지새끼들이나 지키면 되는 거지.”

    “점잖으신 분이 그게 무슨 말이랍니까?”

    “내가 좀 점잖긴 하지. 어찌나 점잖은지, 그동안 너희 무림 깡패 새끼들 죽여버리고 싶어도 정말 그런 적은 없잖나?”

    “회장님한테 맞아서 골로 간 무림 후배들이 꽤 있다고 들었는소마는.”

    “그놈들은 내가 죽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뒤졌으니 자연사라고 봐야지. 하지만 넌 아니야. 넌 빵에도 못 가. 언제 풀려날 줄 알고 그걸 용납하겠나?”

    박 회장이 칼을 뽑았다.

    동양적인 쌍수검, 그 칼날이 칼집에서 뽑혀나온 순간 호텔에는 웬 꽃향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화산검술을 극한으로 익히면 발현된다는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이다.

    보통은 은은하여 집중해야 그 매화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데, 박 회장의 매화향은 그렇지 않았다.

    순식간에 호텔 안을 가득 채워버린 매화 향은 날카롭고 진하게, 모두의 코를 찌르듯이 자극하고 있었다. 성난 향기였다.

    “야, 인간아. 감히 누구 앞에서 칼을······”

    녹림도들은 소리 지르며 다가오려다 말고, 쭈뼛거리며 거기 굳어버린 듯 멈춰 섰다.

    무림인의 목소리에는 흔히 초저주파가 섞여나온다던가? 살기라고도 표현되는 그것이 박 회장의 검에서 꽃향기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자성이 눈매를 좁혔다. 저건 말로만 듣던 제왕검형(帝王劍形)이군.

    박 회장은 병원엔 보내주겠다, 영안실에 가라고 농담하더니 말했다.

    “네 시체로 내 정신적인 아다를 떼어야겠다. 이 거물 새끼부터 먼저 죽여버리고, 다른 하찮은 새끼들도 싹 다 죽여버려야지.”

    이쯤 되니 구자성도 더는 참지 않았다. 가뜩이나 잔뜩 분노해있던 와중 아닌가.

    “죽여봐, 새끼야.”

    구자성이 으르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박 회장이 칼을 들었다.

    “재촉 안 해도 죽인다니까?”

    녹림도 하나가 급히 도끼를 가져와 들려주었지만, 총채주를 돕겠다고 나서는 인원은 없었다. 차마 경찰들이 쫙 깔린 가운데 대기업 회장한테 총질할 엄두는 나지 않는 탓일까?

    그마저 화가 치밀어올랐기에 구자성은 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돕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마지막에 믿을 건 내 몸뿐이니.

    구자성이 포효했다.

    “그래, 구자성이가 여기 있다! 덤벼봐라, 개좆같은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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