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80화 (80/103)
  • 산적 구자성 - [7]

    번개는 새하얀 섬광을 동반했다. 번쩍거림. 밝은 대낮에도 강렬하게 공간을 집어삼키는 빛.

    눈앞에서 폭발하듯 터진 섬광을 견딜 수는 없었다.

    “악!”

    구자성은 비명 지르며 눈을 감았다.

    망막에 남은 빛 탓에 눈꺼풀마저 번쩍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손마저 저릿했다. 기어이 도낏자루를 타고 전류가 흘러온 모양이다.

    한편 허풍개는 미리 눈을 감고 있었고, 눈 감은 채로도 적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공격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허풍개는 칼을 쭉 하고 뻗었다. 구자성은 그 움직임을 보지는 못했지만 피부의 털을 통해 공기의 움직임을 느끼고는 기겁했다.

    부리나케 뒤로 펄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조심하십쇼!”

    총채주를 돕기 위해 녹림도들은 급히 총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방아쇠를 쏘려다 말고 모두 몸을 내빼야 했다. 구자성을 찌르려는 줄 알았던 태극검이 허풍개의 손을 떠나 그대로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게 아닌가.

    이 칼은 허풍개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연계를 보면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또다시 등 뒤의 부하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던 그때, 구자성은 눈을 반쯤 떴다.

    겨우 돌아온 시야를 통해 앞을 보았다. 그리고 보인 장면에 눈을 부릅떴다.

    허풍개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분명 발목에 총알을 맞혔는데 어떻게?

    허풍개는 그나마 멀쩡한, 그러니까 허벅지에 총알을 두 발 정도 맞은 한쪽 다리로 땅을 마구 박차고 있었다.

    구자성이 이를 악물었다. 깽깽이발이 우스워 보이기는커녕 소름 끼쳐 보일 수 있다니? 이 사실은 구십 가까운 인생에 처음 알았다.

    허풍개의 얼굴이 구자성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구자성은 그 얼굴을 본 순간 비명 지를 뻔했다.

    허풍개가 온몸의 출혈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혈관수축 탓에 그 얼굴은 피가 돌지 않아 시체처럼 창백했다. 영락없는 시체의 꼴이다.

    게다가 한쪽 다리로 뛰는 꼴을 보니 정말로 강시 같았다. 어지간한 무림인이라면 이 장면만으로도 무슨무슨 강시, 하는 별호가 붙을 만한 충격적인 모습이다.

    구자성이 급히 도끼를 들어 올렸지만, 그때 이미 허풍개는 구자성의 품에 닿을 만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도끼를 휘두르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였다. 주먹을 뻗기에도 너무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허풍개의 손바닥이 구자성의 배에 닿은 순간, 구자성의 입에서는 신음과 함께 피가 한 모금 튀어나왔다.

    “걱······”

    완벽에 가까운 촌경(寸勁)이 철포삼을 뚫고 그 내부를 강타했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묘리를 살아있는 사람에게 써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구자성은 눈앞의 상대가 그런 수법을 아예 쓸 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자신이 사람에게 살수(殺手)를 썼음에 충격을 받아야 할 허풍개의 정신은, 지금 저 심연 속을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느라 평상시의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성도 감성도 날아가 버린 이 순간, 오직 전투의 흥분으로 벼려진 집중력만이 남아 그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우······ 으······!”

    끔찍한 충격에도 구자성이 어찌어찌 반격하려던 그때였다.

    타악 하는 격타음이 울렸다.

    이번엔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구자성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허풍개의 손목뼈가 그 턱을 후려쳤고 그 머리통의 뇌가 흔들렸다.

    충격을 추스를 틈 따윈 없었다. 고통이 연달아 다가왔다. 가슴팍에, 복부에, 다시 가슴팍에. 사뿐히 공기를 밀어내며 다가온 주먹과 손바닥들이 연달아 구자성의 몸뚱이를 격타했다.

    마지막으로 목을 조여오는 고통이 있었다. 구자성은 제 몸이 떠올라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었음을 느끼고는 어떻게든 숨을 쉬려 애썼다.

    고통 속에서 뿌연 시야에 허풍개의 팔이 보였다. 그 손이 구자성의 목을 움켜쥔 채 그 거대한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천근추, 천근추······!

    몸무게가 부풀어 오르는 조화 따윈 지금 일어나지 않았다. 호흡이 차단된 와중에 기를 운용하기는 불가능한 일 아닌가.

    발버둥 치는 와중에, 콱.

    고통 속에서 발작적으로 움직인 다리가 구자성의 목숨을 살렸다.

    가슴을 걷어차인 허풍개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로부터 수십여 초가 지난 후에야 구자성은 정신을 차렸다. 주저앉아 있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컥컥거리며 제 목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손에 잡힌 감각이 선명했다. 짧은 순간 붙들렸을 뿐이지만 조금 있으면 멍이 들리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구자성은 저기 나자빠진 채 움직이지 않는 허풍개를 보며 신음했다.

    분명 아까 피를 철철 흘렸는데, 뭔 놈의 힘이 남아서······.

    비틀거리다 말고, 구자성의 몸이 움찔했다.

    허풍개가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이내 허풍개는 한 발로 섰다. 발목에 총알 맞은 다리가 땅에 닿지 않도록 들어 올리고서, 두 팔을 뻗어서는 싸울 준비를 했다.

    소림사 학권(鶴拳)의 자세 같기도, 그저 허세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묘한 자세를 취한 채 말했다.

    “오라니까.”

    구자성은 다가가지 않았다. 도끼를 움켜쥔 채 허풍개를 노려보았을 뿐, 그 자리에 그저 서 있었다.

    그 와중에 녹림도들을 덮치고 있던 태극검이 허풍개를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 그 앞에 뜬 채 칼끝을 이리저리 겨누었다.

    귀신 들린 것 같은 칼 한 자루와 권사 하나, 도끼를 든 산적 하나.

    기묘한 대치 속에서 흐른 시간은 차갑고 무거웠다.

    구자성은 사지에 힘을 주기 위해 애썼다. 방금 두들겨맞은 탓에 머리도 어지럽겠다,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다리와 팔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아직 가을에 불과하지만 몹시 추웠다. 등골까지 엄습해오는 오한.

    그때 부하가 가져온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짭새 떴다, 짭새! 짭새!」

    아까 소총을 한 발 쏜 게 문제였을까? 경찰이 출동한 모양이다.

    급박한 소식을 들은 구자성은 문득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 자신에게 의문을 품었다. 왜?

    구자성은 지금 자신이 이 자리를 뜰 핑계가 생겼음에 다행으로 여긴단 것을 깨달았다.

    객관적으로 보건대, 자신이 질 리는 없다. 저쪽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꼴이지만 이쪽은 어떻게든 서있을 만하지 않은가. 물론 돌아가서 치료를 받아야겠지만 아무튼 이 도끼로 저 시체 놈을 쪼개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 자신은 없었다. 적은 이미 시체 같았고, 이미 죽은 시체는 다시 죽일 수 없는 법이었다.

    저놈이 계속 일어나는 걸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보고서 느끼는, 공포로 인한 비이성적인 감상이었다.

    구자성은 그래도 움츠러든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허풍개를 노려보다가, 등 뒤의 부하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그 말에 몇 명의 어깨가 이완되는 것을 구자성은 똑똑히 보았다. 저놈들도 다 때려치우잔 말에 안심된 모양이지?

    뒤늦게 보니 사지가 멀쩡한 놈이 하나도 없었다. 다들 그놈의 칼에 베이고 또 베였는지 팔다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흘긋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총탄이 떨어지고 혈흔이 남은 현장은 처참했다. 굳이 국과수가 나서지 않더라도 여기서 일어난 일을 조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한편 구자성의 입에서도 아직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생각했다.

    젠장, 그러고보니 나도 아까 피를 토했는데. 얼마를 풀어야 이게 증거물로 채택되는 꼴을 막을 수 있으려나······.

    녹림도 몇 명이 말했다.

    “저희가 남겠습니다. 짭새들한텐 저희끼리 한 짓이라고 할게요. 총채주님은 얼른 가십쇼.”

    구자성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허풍개를 보고는 다시 움찔했다.

    허풍개는 자세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구자성은 너무 소름이 끼친 나머지 총이라도 한 발 쏘아주려다 그만두었다. 아무튼 놈을 죽이는 게 여기 온 목적은 아닌 것이다.

    구자성은 아킬레스건이 잘려나간 녹림도를 보며 물었다.

    “자넨 못 움직이겠나?”

    녹림도는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저도 여기 남아서······”

    “자넨 너무 늙어서 빵 들어가면 못 나와. 같이 가자.”

    허풍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자신에게 멀어지는 산적들을 보았다.

    산적 하나를 업고 뛰는 구자성의 등이 보였다. 허풍개는 무표정하게 그를 비웃었다.

    정말 부하들을 아낀다면 여기 데리고 오지도 말았어야지.

    허풍개는 계속 생각했다.

    네가 왜 그리 부하들한테 잘해주는지 안다. 뒤통수 칠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서지.

    너는 지난 수십 년간 피를 피로 씻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밀고와 배신을 겪었다. 근본적으로 부하들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돌아갈 그곳에는 틀림없이 그녀가 있을 것이다. 실종되었노라고 뉴스에 나온 지 한참 된 월녀 그녀가.

    너무나도 유명한 나머지, 얼굴만 봐도 누구인지 알아볼 그녀를 부하들끼리 데리고 있게 두지 않을 테니까. 네가 직접 데리고 있어야 안심이 될 것 아니냐.

    그곳으로 돌아가라. 그녀가 있는 그곳으로 안내해.

    처음부터 절세고수와 그 총 든 부하들을 이겨 먹겠다는 망상 따윈 하지 않았다. 나는 미끼에 불과했고 너는 거기 이끌려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말았다. 미끼에 이끌려 뭍 위에 뛰어오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신호를 보낸 지 꽤 되었으니, 황군의 요원들이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홍나연 그 여자야 황립 대학을 수석으로 나왔다는 이유로 황군에 특채되었을 뿐이라 군사나 경비 쪽으론 영 무능한 모양이지만, 황군의 대부분은 은퇴한 특수부대 출신 고수들이다. 그들의 실력은 믿을 만하다. 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쫓을 준비를 끝내두었을 것이다······.

    구자성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허풍개는 그제야 자세를 풀었다. 뒤돌아서서 산을 내려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새끼야. 뒈지고 싶냐······”

    여기 남은 녹림도들이 제지하려 했지만 허풍개는 무시했다.

    기어이 한 녹림도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허풍개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풍개의 안광에 닿은 녹림도의 몸이 점혈을 당한 듯 굳었다.

    허풍개는 계속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걸었다. 이대로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기어이 허풍개가 산을 내려간 그때, 아내의 칼은 소리 없이 날아가 버리더니 저 산속으로 사라졌다.

    *******

    “인천 청라 쪽으로 이동.”

    “휴게소 통과······ 전달.”

    *******

    구자성이 청라에 있는 자기 소유의 고층 호텔에 도착했을 때, 꼭대기 층의 굳게 잠긴 방을 열고서 느낀 감정은 안도였다.

    왼팔이 기둥에 묶여있는 월녀를 보며 생각했다. 다행히 아직 잘 있군.

    청소부한테라도 발견되었다간 좆되는 수가 있었다. 이 여자가 여기 있다는 사실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녹림의 미래를 위해 무슨 선택을 해야 할지 깨달을 누군가에게 발견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구자성의 월녀의 앞 의자에 앉아서는 신음했다.

    젊은 놈한테 된통 깨진 것이 끔찍하게 괴롭다. 젊었던 자신에게 두들겨 맞은 허풍개가 지금 자신과 비슷한 심경이었을까? 그때 자신이 저지른 걸 그 사손이 갚아준 셈인데.

    그러니 서로 쌤쌤이라며 자신을 다독이려 해보았지만 울분은 풀리지 않았다.

    지금보다 젊었을 적에 싸웠다면 더 나았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는 사실 자체가 비참했다.

    구자성은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는 그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아버지는 이왕 무공을 익혀올 것이면 어디 명문정파의 것을 배울 것이지, 웬 산적 놈들의 잡스러운 걸 배워서는 자신에게 가르쳤단 말인가.

    여전히 젊고 아름다워 보이는 월녀를 보았다. 이년만 해도 웬 산에서 만난 도사한테 모산파 무공을 배워서는 이 나이에도 아가씨 같은 외모를 하고 있는데.

    질투심과 서러움이 한 데 섞여 소용돌이쳤다. 구자성은 축 늘어진 목소리로 월녀에게 말을 걸었다.

    “할망구, 나 아파요. 내 목 좀 봐.”

    월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이쪽에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납치해온 이후로는 쭉 그랬으니 새삼 새로울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자성의 표정은 일그러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왜 멍들었는지 안 물어봅니까?”

    구자성이 소리질렀다.

    “안 물어보냐고!”

    내력을 전수 받아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어떻게든 호감을 사야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데려온 이후로 묶어둔 걸 빼고는 따로 손을 댄 적이 없건만, 지금은 도저히 화를 참지 못했다.

    착, 하고. 기어이 뺨을 한 대 때렸다. 그러고서 구자성은 실수했음을 깨닫고 신음했지만 정작 얻어맞은 월녀는 이쪽을 노려보지도 않았다.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눈을 감아버렸을 뿐이다.

    “저, 지금은 내가 너무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우리 오래 본 사이잖아요. 나 성질이 좀 그런 거 알지요? 할망구, 너무 노여워하진 말고······””

    구자성이 중얼중얼 변명하던 차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급한 발소리, 부하가 다가오고 있을 것이었다.

    구자성은 급히 방을 나가서는 문을 잠갔다.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녹림도를 노려보며 조용히 물었다.

    “이 층에 오지 말라고, 말 안 했나?”

    그리고 녹림도가 말했다.

    “그게, 그래도 급히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뭘?”

    “밖 좀, 밖 좀 보십시오!”

    그 말대로 구자성은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이 상황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이 호텔 바깥에 보이는 것은 호텔을 포위한 일단의 병력이었다. 여기저기서 펄럭이는 황실의 깃발과 군용 돌격소총에 방탄복으로 무장한 황군의 고수들이 보였다.

    놈들은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차가 한 대, 두 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녹림도가 그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어쩔까요?”

    구자성은 한동안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멍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경찰 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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