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적 구자성 - [6]
허풍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신호 삼아 녹림도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자신을 향한 총구들을 보며 허풍개는 낭패감을 느꼈다.
저 산적 놈의 목적을 생각하면 이쪽을 살려두어야 할 텐데. 총알을 막는 재주가 있으니 맞았다간 죽을 만한 부위는 알아서 막아내리라 계산하는 모양이지.
정말이지 상황이 좋지 않다.
“뭐하나? 쏴!”
구자성의 명령과 함께 총구들이 불을 뿜었다.
총탄이 빗발쳤다. 모두 권총탄들이었다. 그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지만 날아오는 총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모조리 잡거나 피해내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싸움이 시작하자마자 벌써 절체절명의 위기라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허풍개의 몸속에서 번개가 내달렸다. 이 상단전의 조화는 한 번 쓰고 나면 더 쓸 수가 없어서 아껴두려고 했지만 이 상황에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허풍개가 지면을 박찼다. 달려 나가는 허풍개의 시야에 그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권총탄들은 공중에서 천천히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허풍개는 이쪽에 총을 겨눈 일단의 무리를 덮쳤다.
손에 잡힌 두 머리통을 서로 찍고 가까이 있던 턱을 후려치고 연속해서 배를 손바닥으로 갈겼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 모든 동작이 한 박자에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순식간에 여덟 명을 쓰러뜨린 뒤, 시간의 흐름이 돌아왔다.
쓰러진 녹림도들의 사이에서 허풍개는 구자성을 보았다.
“너?”
구자성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기겁한 눈치면서도 그 투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구자성이 이를 악물더니, 이쪽으로 달려왔다.
허풍개는 뒷걸음질 쳤다. 그 손에 들린 도끼를 맨손으로 당해낼 자신은 없었다.
허풍개는 놈을 상대하길 포기하고 수풀 속으로 달렸다.
그 와중에 다른 산적들은 여전히 이쪽에 총을 겨눈 상태였다. 다시 한번 총알이 빗발쳤다.
허풍개는 최대한 지그재그로 달리면서 총알을 피해 보려 애썼지만, 뒤돌아서 달리는 중에 날아온 총알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기어이 왼쪽 어깨에 맞았다.
윽······.
거대한 총성은 그 뒤에야 울렸다. 소총으로 쏘아낸 것이리라. 다른 놈들은 권총에 소음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저만한 소리가 나지 않는다.
머리를 울리는 통증 속에서 허풍개는 달렸다.
총에 맞은 그 순간, 허풍개는 조금도 움찔하지 않았다. 그래서 맞혔다고 소리 지르려던 소총수가 명중을 확신하지 못해 입 다문 가운데, 허풍개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쫓―”
구자성이 지시하려다 말고 몸을 뒤틀었다. 그 졸개들을 덮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태극검 한 자루가 산적들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
허풍개는 칼로 누군가를 찔러본 적이 없었다. 어검술로도 누군가를 직접 베거나 찌르려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칼로 찔러보는 것이었다. 좋든 싫든 그래야 했다. 이 싸움에서 호불호를 신경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한 자루 태극검이 산적들 사이에서 종횡하는 가운데, 허풍개는 연신 손가락을 튕겼다. 도탄을 그리며 산적들을 덮치는 금속 BB탄들.
그 현란한 도탄과 칼 한 자루의 비행을 보노라면 정신이 없을 만도 하련만, 과연 구자성은 절세고수였다. 부하들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그는 날아오는 칼이며 BB탄을 도끼 한 자루로 막아내고 있었다.
전부 막아내지 못해서 기어이 녹림도 몇 명이 마비되거나 사지 어딘가에 칼을 찔리고 말았다.
“어, 으······”
오금을 찔린 녹림도가 쓰러져 신음을 흘렸다. 그런 식으로 몇 명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어쨌건 허풍개가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고 어깨의 총상은 욱신거렸다.
“잡았다.”
그 와중에 조종하던 태극검이 구자성의 손에 붙잡혔다. 철포삼의 고수인 그는 맨손으로 칼날을 잡고도 멀쩡했다.
허풍개가 노리던 바였다.
‘뇌위진동변경인.’
허풍개는 태극검에 번개를 불러일으키려 했지만, 구자성은 이미 칼의 위치에 번개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 같았다.
구자성은 칼을 붙잡자마자 바로 저 멀리 던져버렸는데, 내동댕이쳐진 칼 위로 번개가 내리쳤다.
“억······.”
녹림도 몇 명이 놀라 움츠러들었지만 그뿐이었다.
허풍개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젠장, 공연히 적잖은 기만 소모하고 말다니.
“하여간 재주가 많아······.”
구자성이 다시 공중에 떠오르려는 태극검에 다가섰다. 칼 위로 발을 올리더니, 짓밟았다.
칼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렸다.
천근추(千斤墜)다. 원래는 하체에 힘을 실어 단단히 버티는 무예에 불과한데, 구자성이 쓰면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 몸무게가 늘어나 버린다. 그를 절세고수의 반열에 오르게 한 수법이다.
부러진 칼날이 바닥을 굴렀다.
생명 없는 칼이 부서졌다 해서 죽을 리는 없는 법이지만, 동강 난 태극검은 정말 생명을 잃은 것 같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태극검은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칼을 더 많이 가져올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 했기에 한 자루만 겨우 여기 숨겨두었더니 이 꼴이다.
그리고 구자성이 웃었다. 승리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투항하지?”
나무 뒤에서 허풍개가 물었다.
“투항하면, 집에 보내주나?”
“그건 안 되고, 대신 월녀를 돌려주지.”
허풍개는 입을 조금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지랄.”
“지랄은?”
“난 내 목숨 남한테 안 맡겨. 산적 놈한텐 절대 못 그러고.”
구자성이 코웃음 쳤다.
“새끼, 똑똑하네.”
구자성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모두 전진.”
구자성이 앞장선 가운데 녹림도들이 그 뒤를 따랐다. 허풍개는 그들을 향해 연신 손가락을 튕겨댔다. 탁, 탁, 탁. 구자성이 그 모든 BB탄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허풍개 또한 그들의 전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들과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졌다. 허풍개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저 뒤쪽에도 녹림도들이 매복해있을까? 분명 그럴 것이다. 포위망을 마련해두는 것은 사냥의 기본 아닌가.
죽어라 달리면 그 포위망을 뚫을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허풍개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을 끌어야 했다. 허풍개는 방금 몰래 전자기기를 통해 신호를 보냈다.
자신을 돕기로 한 자들에게 보낸 신호였다.
신호를 받은 그 인원들은 만월산에서 거리가 있는 저 멀리에 있을 터였다. 녹림도들의 정찰에 걸렸다간 작전이 실패할 것이므로 만월산 가까이 그 인원들을 배치해둘 수는 없었다. 그 인원들이 여기 오려거든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너, 이 새끼!”
구자성이 불현듯 속도를 높여 돌진해왔다. 달리면서 도끼를 휘둘렀다.
허풍개가 엄폐하던 나무는 그 도끼질 한 번에 쓰러졌다. 구자성이 천근추를 쓰는 순간에는 늘어난 무게로 인해 도끼에 실린 힘 또한 대폭 늘어나 버리는 것이다.
허풍개의 몸이 드러난 순간, 또다시 녹림도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허풍개는 당황했다. 자기네 두목이 여기 앞에 와있는데도 총질할 줄이야?
허풍개는 황급히 몸을 굴러 도끼질과 총탄들을 피해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한 나려타곤.
한편 날아온 총알들은 구자성의 등에 맞았지만, 구자성은 눈만 찡그리고 말았다.
날아온 총탄들은 아음속탄이었다. 총성이 작은 대신 탄속이 느리고 위력이 약해서 구자성의 철포삼을 뚫지 못했다. 저러려고 일부러 저 탄종을 챙겨온 모양이다.
허풍개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도 아연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제 총탄이 날아오는 와중에 절세고수랑 싸워야 한단 말이지?
예의 절세고수가 막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허풍개를 향해 도끼를 찍어왔다.
“뒤져, 새끼야!”
허풍개는 계속해서 바닥을 굴렀다. 그 자리로도 총탄들이 날아왔고 그중 한 발이 허벅지에 맞았다.
동맥이 있어 출혈이 심각할 부위지만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총에 맞은 즉시 허풍개가 총상에 기를 집중하자 피 대신 스파크가 피어올랐다.
허풍개는 한 바퀴 더 굴러 등을 바닥에 닿게 하고는, 몸을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땅을 박차고 구자성을 향해 돌진하자니, 이번에도 총탄들이 가로막았다.
허풍개는 그 대부분을 피해냈고 몇 발은 잡거나 튕겨낼 수 있었지만, 기어이 한 발은 몸에 맞았다. 팔뚝에 총알이 쑤셔박혔다.
허풍개는 이번에도 출혈을 억지로 틀어막으면서, 갈고리처럼 만든 손을 구자성의 목에 뻗었다.
“새끼······”
구자성은 살짝 질린 것 같았다. 굳은 얼굴로 도끼를 마주 휘둘렀다. 거대한 궤적이 허공을 가르는 가운데 허풍개는 급히 뒤로 펄쩍 뛰었다.
그리고 또다시 총성, 또 한발의 총알이 발목에 맞았다. 이마저 견딜 수는 없다.
허풍개가 주저앉았다.
“허풍개 그 새끼, 좆도 없는 새끼가 까불거리기나 잘했지.”
그제야 구자성이 웃었다.
“그 제자 놈도 똑같았어. 무적비비탄 그놈도 더럽게 까불거리기만 했는데······”
구자성이 다가왔다. 허풍개는 주저앉은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탁, 하고 날아간 금속 BB탄은 구자성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구자성은 철포삼을 믿는 듯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맞은 순간, 그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전기를 최대한 실은 BB탄이었다.
그 틈에 허풍개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역시나 녹림도들이 보고만 있지 않았다.
또다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고 반쯤 일어났던 허풍개의 몸이 휘청거렸다.
이번에는 대체 몇 발이나 맞았는지 알 수 없었다. 옆구리에, 또 왼쪽 어깨에, 그리고 또 허벅지에 맞은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사손은 확실히 좀 무섭군.”
정신을 차린 구자성이 다가와서는 허풍개의 배를 걷어찼다.
뒤로 밀려난 허풍개가 나무에 등을 부딪쳐서는 축 늘어졌다.
잠시 혼미해진 순간, 그리하여 온몸에 흐르는 기의 통제를 잃은 순간, 봇물이 터지듯 온몸의 총상에서 일제히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허풍개가 눈을 깜박였다. 흐릿한 시야로도 구자성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하여간 저 병신 새끼. 그리 총을 쏴대고도 안 죽을 줄 알았나?
정신이 어둠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죽음. 아내가 묻힌 이곳에서······.
그럴 수는 없지.
허풍개가 제 몸에 검지를 향했다. 거기서 쏘아진 전류가 몸에 퍼지자 출혈이 멎었다. 온몸의 상처에서 스파크가 피어올랐다.
허풍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산적들의 총구가 향했지만 구자성이 손을 들어 사격을 제지했다. 이미 무력화되었다고 여기는 걸까?
“가만히 좀 있어, 새끼야. 움직이니까 피 나잖아.”
구자성의 말에 허풍개가 대꾸했다.
“닥쳐.”
“왜, 더 보여줄 거라도 있나?”
“있지, 물론.”
구자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 누가 여기 오기라도 해?”
“와.”
“누구?”
허풍개는 먼저 죽은 아내를 떠올렸다. 그녀는 시해를 바랐으므로 시체는 불태우고 칼 한 자루만을 묻었다. 그녀의 무덤은 이 산에 있었다.
“여보.”
구자성이 눈살을 찌푸리던 그때,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저 뒤에서 녹림도들이, 연달아 낸 비명이었다.
구자성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보인 장면에 눈을 크게 떴다.
칼 한 자루가 광포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까 허풍개가 조종하던 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월녀의 사인검이 그랬듯 칼은 녹림도들의 팔을 베고 찌르고 있었다. 짧은 순간, 열 명이 넘는 녹림도들이 손에 든 총을 놓치고 무력화되었다.
“이 새끼?”
구자성은 허풍개를 노려보더니, 부하들을 보호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칼을 향해 저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산적들을 해치던 칼은 위로 솟구쳤다. 칼은 구자성의 머리 위를 통과해 날아와서는 허풍개의 앞에 다다랐다.
허풍개는 멍한 정신으로, 자신을 지키듯이 공중에 뜬 태극검을 보았다. 자신의 물건은 아니지만, 익숙한 물건이었다. 백 년 만에 보는 물건이기도 했다.
비행을 멈춘 지금 비로소 제대로 된 검신이 보였다.
지난 백 년간 묻혀있던 이 칼은 제대로 손질받지 못했다. 완전히 녹슬고 군데군데 흙이 단단히 끼어버린 태극검 한 자루.
허풍개가 아내의 것이었던 칼을 움켜쥐었다. 모산파에서 그랬듯, 모양새만은 훌륭한 태극검법의 자세를 취하고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와라.”
구자성이 콧김을 내뿜더니, 돌격해왔다.
거대한 궤적을 그리는 도끼를 상대로 허풍개가 칼을 내리쳤다. 그러면서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뇌위진동변경인.
두 쇳덩이가 충돌한 순간, 그 사이에 벼락이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