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적 구자성 - [5]
“월녀님 어디 갔습니까?”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물어보았더니, 간호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디 가시다뇨?”
“월녀님, 지금 저 안에 안 계신 것 같은데요.”
“뭔 소리예요? 잘 계세요. 주무시고 계시니까 괜히 깨우지 마시고······”
이 씨발년. 허풍개는 답답함을 억누르려 애썼다.
“시위대 병사는 어디 있고? 그녀의 곁을 이십사 시간 지키고 있어야 할 텐데.”
“제가 황실 병사가 뭐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어련히 할 일 하고 있겠죠.”
허풍개는 굳이 실랑이하지 않았다. 그저 휴대전화를 들어 황군에 연락했을 뿐이다.
그로부터 수십 분 뒤, 홍나연을 위시한 시위대 병사들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간호사들도 감히 황군 병사들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월녀가 지내는 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월녀님!”
허풍개는 텅 빈 병실과 마주했다.
*******
월녀의 곁을 지켜야 할 시위대 병사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그는 다른 병실에서 잠든 채 발견되었다.
“억울합니다! 땡땡이치려던 게 아닌······”
황군 병사들이 윽박지르고 있었지만 허풍개는 지금 거기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멀거니 서서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해보았다.
그 기지배, 또 치매가 도진 건가? 그 와중에 은형술(隱形術)은 절로 발휘되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병원을 빠져나갔고?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그게 아니라고 느꼈다.
허풍개는 구자성을 떠올렸다.
놈에게는 내력을 전수해줄 드높은 경지의 도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신을 잡으려 노력한 것이지만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부하를 잔뜩 거느리고서도 굴욕만 당하고 말았으니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노릴 다른 도인은 누가 있는가?
월녀가 있다. 그녀는 민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온종일 수면제에 취해 잠들어있곤 했다. 데려가기 별로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데려간 뒤가 문제겠지만 어쨌건.
“정말 땡땡이치려던 게 아니라니까! 난 분명 제대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울부짖는 시위대 병사에게 허풍개가 다가갔다. 그를 가리키며 홍나연에게 말했다.
“이 친구, 혈액 검사해봐요. 수면제 먹었나 보게.”
홍나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면제라면······ 이게 누군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어쩌면. 전에 경고한 바 있지 않습니까.”
“구자성······. 하지만 아무리 막 나가는 산적 두목이라도 그분을 납치하진 못할 텐데요.”
“물론 그분을 납치했다가는 그 후환을 감당할 수 없겠죠. 하지만 기어이 그마저 감수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홍나연은 반박하려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국민적 영웅인 그녀를 납치하고서 발각되었다간 그 일을 결코 덮을 수 없겠지만, 그리하여 녹림 전체가 파멸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걸 알고서도 저지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혈액검사 결과는 머지않아 나왔고 마약성 수면제가 검출되었다. 병원에서 쓰지 않는 약이라는 것도 곧 알 수 있었다.
암울한 추측이 옳았다.
모두 눈을 부릅뜬 가운데, 홍나연이 몸을 떨었다. 허풍개는 그녀의 뺨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분명 경고했는데도 기어이 사람 하나만 붙여놔서 이렇게 되다니?
분노와 낭패감에 가슴이 마구 콩닥거리고 있었다. 허풍개는 진정하려 애썼다. 상황이 끔찍할수록 침착해야 했다.
통증으로 머리를 맑게 하고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았기에 더욱 세게 깨물어야 했다.
수십 년 만에 느껴보는 동요였다.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자니, 홍나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황군 전체에 연락하고. 경찰에도 협조 요청해서······”
허풍개가 만류했다.
“당연히 경찰에도 수사 요청을 해야겠지만, 당장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예?”
“경찰엔 당장 CCTV 조회나 요청해줘요. 그녀가 어디로 납치됐는지 알아내는 게 우선입니다.”
“당장······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게 급하지 않을까요?”
“산적들 소굴이 한두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턱대고 들이닥치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그녀 데리고서 명국으로 내빼버리면 못 잡아요.”
“그럼, 어떻게?”
홍나연의 물음에 허풍개가 대답했다.
“방법이 있어요.”
*******
경찰 수사를 통한 구출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녹림의 산채는 여럿이요 구자성의 사택 또한 여럿이다. 경찰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녹림의 아지트까지 고려하면 놈이 그녀를 대체 어디로 데려갔을지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전국의 경찰들이 일제히 들이닥치면 일이 조금 더 잘 풀리지 모르지만, 이 경우에는 그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구자성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내력전수를 받으려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죄다 심증 아닌가. 그것만으로 경찰들이 체포하러 나서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황실에서 압박한다면 결국엔 영장을 발부할 수 있겠지만, 지방의 경찰과 녹림은 좋은 이웃이다. 녹림의 산채로 출동하기 전에 경찰은 친절하게도 그곳의 채주에게 언제 들이닥칠지 미리 알려줄 것이다.
구자성은 한때 만주와 한반도를 자유로이 드나들던 작자였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들면 그녀와 함께 내빼버릴 것이고, 그러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젠장, 이제 보니 녹림에서 체면이 망가지는 것도 무릅쓰고 무림맹에 항복 선언을 한 이유가 있다. 무림맹에서 일제히 전국의 산채에 들이닥치는 일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가뜩이나 막 평화협상을 치른 마당이다. 그러니 무림맹 깡패들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도 그놈들 일을 해준 보람이 있기는 하군.
허풍개는 주머니 속 목함을 만지작거렸다. 이번 일로 무림맹에서 준 영약이었는데, 제 입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풍아?”
이풍이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허풍개는 영약이 든 목함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네가 먹든 바람이 먹이든 알아서 해라. 팔아도 되고.”
이풍은 가늘게 뜬 눈으로 목함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거 안 줘도 된다니까?”
“난 이제 더 안 처먹어도 되니까 그래. 그리고 너 먹기 싫음 바람이 주라니까? 넌 딸 가진 애비가 돼가지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지 못할망정 뭘 딸 주란 걸 마다하고 자빠졌냐.”
이풍이 투덜거렸다.
“형님 아들이기도 하니까 그렇지. 딸 먹이자고 아부지 약을 뺏어 먹으면 쓰나······.”
허풍개가 살짝 웃었다. 평소에 워낙에 잘 웃지 않는지라, 그것만으로도 이풍은 놀라 눈을 껌벅거렸다.
허풍개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인마, 부모보다 자식을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거야. 싸지른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니냐.”
“그 양반 거, 동자공 익힌 양반이 어디서 괴상한 지론을 들어가지곤······”
약간의 실랑이 끝에 허풍개는 이풍의 손에 기어이 목함을 들려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서 생각했다.
부동산 명의를 전부 네 이름으로 돌려놨다든가, 상속도 네 이름으로 해두었다든가 하는 건 말하지는 않는 게 좋겠군.
눈치가 빠른 놈 아닌가. 제 양아비가 대체 뭘 하려는지는 몰라도 좆나게 위험한 일을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채곤 뜯어말리려 들 것이다. 마지막 순간이라도 신파극을 찍고 싶은 마음은 없다.
애초에 무조건 죽으려는 것도 아니고······.
허풍개가 집을 나섰다.
이윽고 허풍개는 만월산에 올랐다. 그가 도사로서의 수련을 시작한 곳, 첫 제자를 가르쳤던 그 장소에.
*******
“회장님? 나 허풍개요.”
수화기 너머 박 회장이 성질을 부렸다.
「어딜 감히 전화하고 지랄이야? 한번 이겨 먹으니 내가 우스워? 내가 그때 칼 뽑았음―」
저번 패배가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다. 무림인도 아닌 양반이 대체 왜 저리 호승심이 강한지 알 수 없었다.
허풍개가 말했다.
“제안할 게 있어서 연락했소. 들어서 나쁠 거 없을 거요. 아마 꽤 괜찮은 건수일걸.”
「뭔 건수?」
“한국 무림의 절반을 치울 수 있을지 모를 건수. 그 검사 양반한테 백날 떠들게 하는 것보다 좋을 거야.”
박 회장이 어디 읊어 보라고 말했다.
*******
뉴스에서는 월녀의 실종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분을 목격하신 분은 아래 번호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홍나연과 합의한바, 언론에는 월녀가 납치된 게 아니라 스스로 병실을 탈출한 것처럼 알려두었다.
이제 구자성은 제 납치극이 당장 들통나진 않았노라며 한숨 돌리고 있을까? 제발 그러고 있기를.
어제 그랬듯 오늘도, 허풍개는 만월산에 올랐다.
월녀의 실종 소식이 알려진 지 며칠 동안은 월녀를 찾는 다른 사람들도 그 산에 오르곤 했다. 그 산에서 월녀를 찾기 위함이었다. 일찍이 월녀는 황궁을 나와 만월산에서 발견된 바 있지 않은가.
그러나 끝내 월녀는 만월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더는 만월산에 오르지 않게 되었지만, 허풍개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월산에 올랐다.
언젠가는 월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듯이. 자신이라도 그녀가 여기 오리라 믿고 있다는 듯이 산속에 틀어박혔다.
밤이 되어서야 허풍개는 산에서 내려왔고,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는 다음 날 동이 트기 무섭게 다시 산에 올랐다.
그러면서 차나 택시를 타는 일 따윈 없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절세고수의 주변에 배치해두었을, 무림맹 요원들의 눈에 자신의 동선이 잘 띄도록.
알다시피, 무림맹에는 온갖 첩자들이 깔려있다. 이 소식은 녹림에도 전해질 것이다.
*******
허풍개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깊은 산속, 만월산의 이 공터는 허풍개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이곳의 바위는 큼지막하면서도 평평한 것이 앉기 좋았다. 옛날 허풍개는 이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하곤 했다.
지금도 그렇게 했다.
허풍개는 눈 감은 채 생각했다. 구자성은 지금 월녀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그녀에게서 내력전수를 받았을까? 설마.
윽박지른다고 순순히 해주지 않을걸. 지금이야 수면제에 취한 치매 노인 신세지만 왕년에는 황국의 모두가 두려워하던 여자 아닌가.
권총과 칼 한 자루씩 각각 들고 날아다니는 칼을 부리던 월녀는 당시 절세고수가 아니었던 구자성도, 절세의 경지에 이른 후의 구자성도 우습게 여겼다.
설령 고문을 하더라도 놈이 바라는 일을 해줄 리는 없다. 가뜩이나 서로를 원수로 여기던 인연임에야.
그러니 아직 구자성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또 다른 살아있는 영약, 무적무적자가 홀로 만월산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을 것이다.
지금 구자성은 조급할 것이다. 얼마 전에 포기한 사냥감이 지금은 다시 먹음직한 사냥감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사냥하러 와라. 복수를 하러 와.
저번에 너는 내게 제대로 농락당했다. 아주 제대로 굴욕을 당했지 않으냐. 분하지? 저번 만남에서는 태연한 척 굴었지만 실은 설욕하고 싶어 미칠 지경일 것이다.
구자성은 밝은 대낮에, 부하를 거느린 채 제대로 붙으면 질 리가 없다는 생각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네 생각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와라. 나는 여기에 있다.
집 나간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멍청한 강아지처럼, 충직하게도 그녀의 흔적이 깃든 이 자리에 멀거니 앉아있다. 이 얼간이를 잡으러 와라.
인기척이 느껴진다. 수풀 뒤에서, 나무 뒤에서 온갖 기(氣)가 느껴진다.
산적들이 오고 있다. 약탈하러 오고 있다.
그 수가 마흔, 그중에 이글거리듯이 거대한 기가 보인다. 구자성이다.
허풍개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친 구자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대한 도끼를 든 구자성이 웃었다.
“안녕하신가?”
허풍개는 조심스레 눈을 굴렸다. 구자성이 데리고 온 부하들은? 다들 총기를 들고 있다.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군용 소총이 즐비하다. 저 소총은 기억하건대 총구 속도가 960m/s를 넘는 물건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기겠군. 가부좌를 튼 다리가 떨리려 했지만, 호흡을 고르자 혈류의 속도가 돌아왔다.
무표정하게, 태연한 얼굴로 허풍개가 말했다.
“별로. 그래서, 갚아주러 왔나?”
“그렇다면?”
허풍개가 장갑을 벗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탄속을 줄여 적들을 배려하느니 어쩌느니 할 수는 없었다.
장갑을 구자성의 발치에 내던졌다.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