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75화 (75/103)
  • 산적 구자성 - [2]

    다음 날에도 허풍개는 이곳저곳의 산채에 들이닥쳤다. 그리 습격하면서 반격 따윌 당하지 않았기에 총성 한 번 제대로 울리지 않았다.

    곤히 잠을 자던 주변의 주민들은 거기서 습격이 일어났다는 일도, 그것이 고작 한 시간 만에 끝났다는 일도 전혀 알지 못했다. 산 밑에 몰려온 봉고차에 산속 사람들이 한가득 실려 하룻밤 사이에 모조리 사라졌다는 사실도 물론 알지 못했다.

    허풍개를 태운 자동차가 산에 도착하는 속도가 곧 습격이 이루어지는 속도였다.

    어젯밤도 산채 하나가 사라졌고 오늘은 두 곳이 사라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밤이 지나니 과연 그리되었다.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처음 산에 올라 녹림도들을 옮길 때만 해도 승리감에 들떠있던 무림맹의 무림인들은, 이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할 일을 했다.

    한 무림인이 몸이 굳은 녹림도를 봉고차에 실었다. 그 과정에서 포박된 녹림도와 눈이 마주쳤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 정신은 멀쩡한 걸까. 녹림도의 눈은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에 비친 무림인의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낯빛 또한 시체처럼 창백했다.

    “다 실었다. 돌아가······”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실은 뒤, 무림인은 오늘 산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오늘 밤에만 그 무림인은 홀로 네 명을 산에서 옮겨야 했다. 무림맹에서만 수십 명이 파견되었음에도, 사람 수십 명을 산에서 차로 싣는 일이 쉬울 수는 없었다.

    나름 무공을 익힌 몸인데도 일이 끝난 지금은 온몸이 피곤했다. 그렇듯 수십 명이 함께 죽을힘을 다해 날라야 했던 그들을, 도사 혼자 그 꼴로 만든 것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저도 모르게 섬뜩해졌다.

    얼마 전 공중파 TV에도 나왔기에 요새 유명한 그 도사를 다시금 떠올렸다. 평소에 그 도사의 일을 들으면 허허로운 도인을 연상하곤 했다. 수행이 깊어 무공의 경지가 드높지만, 지나치게 젊은 데다 지금까지 수행만 해온 탓에 무림인으로서는 어수룩할 그런 도인 말이다.

    하지만 이게 대체 뭔가. 절세고수의 위명이야 익히 들었지만 이런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어두운 밤에 열두 대의 검은 차들이 도로를 조용히 달렸다.

    *******

    “산채 아홉 곳이 박살 났다 이거지. 거기 있던 애들은 온데간데없고.”

    구자성의 질문에 채주는 대답하기도 어려워 했다.

    “예······.”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채주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인 가운데 구자성이 한숨을 쉬었다.

    놈이 격하게 반응할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선대와 악연도 있는 마당 아닌가. 그 와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무공을 가르쳐주기까지 한다는 계집애를 건드렸으니 발작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정말 혼자서 전국의 모든 산적을 해치울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불과 며칠 만에 이 무슨 피해란 말인가?

    이대로면 녹림이 거덜 날 지경이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하나?

    아니, 그것은 결코 안 될 일이다.

    구자성은 자신이 이 나이까지 살아온 것도 놀라운 일임을 알고 있다. 자신의 나이는 구십에 가깝고 죽을 날 또한 얼마 남지 않았다.

    잠들 때마다 내일 아침 눈 뜰 수 있을까 두려운 가운데, 마교의 수괴가 제안을 해왔다. 수명을 늘려줄 테니 시키는 대로 조직을 움직이란 제안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수명을 늘려줄 수 있느냐 물었더니, 그녀는 백련교의 비법을 말했다.

    높은 경지의 도인(道人)이 내력을 전수해주면, 그리하여 피시술자의 체내 기를 완전히 정순한 기로 교체할 수 있다면 그 수명을 크게 연장할 수 있으리라고 설명했다.

    한편 절세고수인 구자성의 기는 특별히 막대하다. 그러니 그 체내 기를 완전히 갈아치우려거든 어지간한 도인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고강한 도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도인이 자신의 모든 내력을 전수해야만 가능하리라고.

    그리고 마교의 수괴가 약속하길, 자신의 말을 따른다면 일이 끝난 뒤 백련교의 절세고수 하나를 섭외해서 내력전수를 해주겠노라고 했다. 마침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아 자신의 모든 걸 내줄 준비가 된 절세고수가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더없이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순순히 따르기 어려운 제안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 대가로 구자성이 녹림을 통째로 갖다 바치기를 원했다. 무림맹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이고 뉴스에 거듭 나옴으로써 녹림과 무림맹이 공멸하기를 요구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요구를 어떻게 들어주나?

    구자성은 그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다른 방법을 물색했다.

    최고 수준의 도인이 내력전수를 해주어야 한다고? 그건 그렇다 치고, 그놈의 내력전수를 무조건 그년이 소개해 주는 놈한테서 받아야 할 필요는 없겠지.

    마침 경지 높은 도사 하나가 근처에 있었다.

    무적비비탄의 제자였다. 그 선조들을 자신이 묵사발 낸 적도 있고 하니, 그놈을 사냥하는 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언젠가는 채주들을 모아 그놈을 잡아다 바친다면 녹림의 모든 것을 물려주겠노라 공언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보니, 예의 사냥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임을 깨닫고 말았다.

    “내 도끼 닦아놓으라 해.”

    구자성의 말에 채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시 총채주께서······”

    “혹시는 무슨. 이렇게 된 이상 내가 무조건 나서야지. 그래서, 이풍 그놈이랑 그놈 딸내미 잡아오는 건 더 못하겠고?”

    “예. 말씀드렸다시피 이풍이며 그놈 딸이며 요새 경희궁에 머무르고 있어서······”

    구자성이 혀를 찼다. 아무리 막 나가더라도 황궁에 쳐들어갈 수야 없는 일이다.

    “황군에서 그놈을 왜 받아주지? 궁궐이 깡패 가족 피난처도 아니고.”

    “글쎄요, 저번 일로 무슨 인연이 생긴 덕분 아니겠습니까?”

    구자성이 중얼거렸다.

    “인연이야 그 전부터 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해보면 그놈, TV에서 하아린 껴안고 그랬지. 그년이랑 그놈, 대체 무슨 관계야?”

    *******

    허풍개는 연무장에서 땀 흘리는 황군 고수들과 그들 앞에 쭈그려 앉은 이바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바람은 학교를 쉰 채 여기 경희궁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무림 깡패들과 전쟁하는 마당에 이보다 안전한 장소는 달리 없다.

    “부탁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허풍개가 고개를 숙였더니, 시위대 부령 홍나연이 살짝 웃었다.

    “뭘요. 저번 그 일에 대한 대가는 아직 치르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원할 때까지 머무셔도 좋아요.”

    “그러도록 해주신다면야······”

    “더 부탁하고 싶으신 게 있습니까?”

    “부탁이라기보단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황군 들어가려면 무공만 잘해선 안 될 테고, 학력도 봅니까?”

    “대졸 이상에 시험을 따로 봐야 하긴 하지요.”

    허풍개는 이바람을 보며 생각했다. 저 기지배 대학 보낼 명분이 하나 생겼군.

    부녀가 쌍으로 대학 문턱도 못 밟는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왜요, 저 애가 황군 들어오고 싶다던가요?”

    홍나연의 물음에 허풍개가 대답했다.

    “그러면 좋겠군요.”

    정말이지 그러기를 바랐다.

    지금 이바람은 황군 고수들의 수련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확실히 저들에게 흥미가 있어 보였는데, 허풍개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이왕 무공을 익힐 것이라면, 무림 깡패가 아니라 번듯한 황실의 고수가 되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 자신은 그토록 싫어하는 무림 깡패 노릇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허풍개가 궁을 나섰다.

    *******

    그저께도, 어제도 그랬듯 허풍개는 날이 저물기 무섭게 습격에 나섰다. 또다시 산적의 소굴이 자리 잡은 산으로 향했다.

    이미 산채를 아홉 곳이나 궤멸시킨 마당이지만 노릴 곳은 아직도 많았다. 녹림의 산채는 전국에 펼쳐져 있고 그중 아무 데나 골라서 가면 되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조용히 산을 오르던 중이었다.

    허풍개가 소리 없이 멈춰 섰다.

    허풍개의 반쯤 감긴 눈에 나무 뒤에 숨은 누군가가 보였다.

    진짜 투시가 아니라 체내의 기(氣)를 보는 것이므로 손에 든 물건 따윈 보이지 않지만, 자세로 보아하니 총을 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매복한 채 누가 접근하면 바로 쏘려는 모양이다.

    허풍개는 속으로 신음했다. 여기 올 걸 알고 있었군. 미리 대비하고 있던 모양이고.

    새삼 놀랄 필요는 없다. 무림맹에서 동선이 새는 것은 있을 만한 일 아닌가.

    다행히 아직 저놈은 이쪽을 발견하지 못한 듯하다. 허풍개는 주머니 속 BB탄을 쏘려다 말고, 소리 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예의 나무 뒤에 도착해서는 대뜸 손을 뻗었다. 고개를 내밀어 나무 뒤를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금나수는 목표물에 정확히 도달했다.

    어, 극.

    바로 목을 움켜쥐었기에 비명조차 나지 않았다. 코에서 공기 빠져나가는 소리가 그르륵, 하고 났을 뿐이다.

    기절한 녹림도를 조용히 바닥에 눕혔다. 그 무장을 보고 허풍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녹림도는 아직 가을임에도 두꺼운 파카를 껴입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탄지공을 대비하기 위함이리라.

    심지어 그 손에 들린 것은 권총이나 기관단총 따위가 아니라 척 보기에도 군용으로 보이는 소총이었다.

    숨기고 다니기도 어려운 저런 물건을 어째서?

    맨손으로 총알을 잡아대는 기인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분명했다.

    확실히 저건 만만찮다. 이제는 기관단총의 연발도 당연한 듯이 튕겨내는 수준이지만, 소총탄의 탄속은 보통 권총탄보다 두 배 이상 빠르다. 잡거나 튕겨내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아마, 구자성 그놈도 여기에······’

    단 한 명의 습격자를 잡기 위해 단단히 준비한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습격은 단념하고 돌아가는 게 현명할까?

    허풍개는 조금 생각해본 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돌아서서 산을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저 깊은 산속의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적들의 준비가 완벽하고 심지어 이곳은 적들에게 익숙한 지형이지만, 허풍개가 보기에 상관없는 일이었다. 산은 산적 놈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익숙한 장소요, 저들보다는 자신에게 더욱 유리할 장소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

    만월산채 채주 김용성은 고수다. 그 날카로운 감각과 반사신경은 일반인들의 기준에는 가히 초인의 수준이요, 어두운 산속에 숨어든 침입자를 잡아내기에도 충분할 것이었다. 그 사실을 믿고 총채주 앞에서 이번 작전에 당당하게 자원했다.

    그러나 지금 그 얼굴에 당시의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다.

    김용성은 창백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보았다.

    실시간 상황 확인을 위해, 각 위치에 부하들을 배치하고는 짧은 간격으로 채팅방에 생존 신호를 보내도록 지시해두었다.

    그래서 김용성은 실시간으로 부하들의 신호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신호가 소멸한 장소를 통해 침입자의 동선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부하들의 생존 신호는 이곳저곳에서 불규칙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동하는 것인지, 엄폐한 그 위치들을 어찌 알고 찾아내서 습격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한 명의 신호가 올라오지 않았다.

    별로 춥지 않은 날씨에 잔뜩 껴입었는데도 오한이 느껴졌다. 김용성은 양손에 각각 쥔 권총과 손도끼를 움켜쥐며 수풀 너머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사냥이 벌어지고 있을 저 어둠 속은 끔찍하게도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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