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74화 (74/103)
  • 산적 구자성 - [1]

    20세기, 산둥성의 녹림은 의적이라 불러줄 만했다. 산둥에 파견된 일본군에 맞서 산속의 산적들이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실제 그들의 투쟁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쨌건 산둥의 일본군은 철군했다. 녹림은 이 철군을 자기네 투쟁의 성과라며 자축했다.

    그리하여 녹림호걸들의 투쟁에 고무된 한 조선인이 녹림 산채에 몸담았으니, 그 조선인 산적의 이름은 구자산이다.

    구자산은 산채의 무공을 수련하고 게릴라 전술을 익혔다. 산둥성에 재출병한 일본군과 맞서다가, 결국에는 한반도에 돌아와 배우고 익힌 바를 활용했다.

    나중에 아들 구자성을 낳아서는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을 전수했는데, 구자성은 아버지보다 무공과 전술 모든 면에서 뛰어났으며 그보다 훨씬 잔인했다.

    구자성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산골 마을에 가혹한 수준의 세금을 징수했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인신매매와 마약의 밀매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친일 회사들을 습격하고 공출되는 쌀을 가로챘으며, 젊은이들을 징집하려는 순사들과 면서기들을 납치한 다음 공개 처형했다.

    아버지 구자산이 일본군을 상대로 열한 번의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구자성 또한 장군이라 불릴 정도의 명성을 쌓았다.

    해방 이후, 구자성은 지난 활약과 전국에 퍼진 녹림조직에 힘입어 여러 정당의 인사들과 인맥을 쌓았다.

    정치인들이 노골적으로 밀어주었기에 녹림의 건설사들은 전국의 지역 건설공사를 모조리 수주받았다. 팔십 년 대 이전 지방의 도로는 거의 다 녹림의 자회사들이 깔아댄 것이다. 한국 재건의 공신이 되는 동시에 막대한 자금을 챙겼다.

    반공 투쟁으로 노선을 트는 과정에서는 미국의 정치적이고 금전적인 후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후로 세월이 흘러, 냉전이 종식되어 반공 폭력단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끊기고 한국의 정치인들 또한 녹림의 회사들을 노골적으로 밀어주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녹림이 몰락을 논하게 될 수준은 아니었다.

    절세의 고수인 구자성은 젊을 적 못지않게 강건하다. 그리고 여전히, 구자성이 키워낸 의원들과 장성들은 늙은 산적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고 있다.

    한국 무림의 절반을 차지한 녹림의 위상은 이 영웅적인 총채주의 백 년에 가까운 활동에서 건설된 것이다.

    노래방에서 웬 산적들이 총질했다고 해서, 그밖에 온갖 불법행위들이 적발되었다고 해서 그 철옹성이 무너질 일은 없다.

    오로지 힘, 가장 원초적인 폭력이 그 성벽에 약간의 흠집을 낼 수 있을 뿐이다.

    *******

    녹림의 산채가 자리 잡은 문수산의 리조트는 보통 사람들에게 스키장으로 알려져 있다. 겨울 이외에는 따로 영업하지 않고 시설을 놀려두는 듯하지만 실은 도박장으로 활용된다.

    손님들은 리프트를 타고 편하게 올라와 술과 약물과 도박을 즐길 수 있다.

    도박과 마약과 유흥, 어떤 특이한 범죄집단이든 조직이 발전하면 결국에는 이 세 가지 영업으로 수렴진화하는 법이다.

    한국 건설업과 부동산업의 대부격인 녹림이지만, 이런 불법영업을 통한 수익의 비중은 작지 않다. 약탈 따위를 할 수 없는 21세기 한국에서도 이 세 가지가 있는 한 산적들의 벌이가 부족할 일은 없다.

    오후 열한 시, 도박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찬란했다. 그러나 역시 밤중의 산속은 깜깜하기 그지없다.

    문수산채의 녹림도 이종호는 산 중턱 초소를 지키고 섰다. 경찰 혹은 무림맹의 습격을 막기 위함이지만 별로 긴장하지는 않았다.

    지역 경찰들이야 여기서 무슨 영업이 이루어지는지 뻔히 알지만, 그렇다고 굳이 쳐들어올 리가 있나? 지역구 의원이며 시장까지 모셔다 하하호호 웃는 마당에 그럴 수가 없다.

    무림맹의 천치들 또한 습격해올 리 없다. 가뜩이나 저번 노래방 사건 이후로는 맘 놓고 총질도 못 하는 마당 아닌가. 그 와중에 일반인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총 한 발 쏘았다간 아홉 시 뉴스감이다.

    이종호가 생각건대 자신은 대충 시간을 죽이다가 돌아가서 퍼질러 자면 되었다.

    초소 유리 벽에 등을 기댄 채 한숨 쉬던 와중이었다.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날아와 목에 부딪힌 순간 이종호는 움찔했지만, 그게 그가 한 행동의 전부였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고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탁, 하는 소리가 또 한 번 나더니 이번에는 허리에 줄이 감겼다.

    줄과 함께 이종호의 몸이 초소 아래로 당겨졌다. 여전히 이종호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이종호는 눈동자만 겨우 굴릴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웬 젊은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요새 가장 유명한 고수, 무적무적자의 얼굴을 알아본 이종호가 어찌어찌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허풍개의 손이 훨씬 빨랐다.

    목울대를 움켜쥔 허풍개의 손이 목의 혈관을 압박했다. 그르륵, 이종호의 정신은 어둠 너머로 침잠했다.

    허풍개는 쓰러져 널브러진 남자의 위치를 잘 기억해두었다. 뒤따라 올라올 무림맹의 사람들에게 이자의 신병을 맡겨야 할 테니.

    허풍개가 어두운 산속을 걸었다. 마주친 초소들을 피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여기 온 것은 잠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또 다른 초소 앞에서 멈춰 섰다.

    탁, 하는 소리가 고요한 산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CCTV 또한 산속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 또한 자갈 몇 개면 끝장낼 수 있었다. 여섯 개의 초소를 무력화시키는 데는 열 번의 손가락 운동이면 충분했다.

    이제 난리가 났겠군. 감시실에서 CCTV 화면이 꺼지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했을 테니.

    허풍개는 리조트 본관 옆의 조그만 건물을 보았다.

    겨울에는 스키장 직원들의 숙소로 쓰이는, 평상시엔 녹림 행동대원의 합숙소로 쓰이는 건물임을 미리 조사해두었다.

    저 안에 녹림도들이 가득 차가 있을 것이다. 지금쯤 다들 벌떡 일어나서 습격에 대비하려 애쓰고 있겠지? 고수든 졸개든 총 한두 자루씩 들고 있을 테고.

    허풍개가 그쪽으로 나아가는 사이 합숙소의 불이 모두 켜졌다.

    그 안에서 녹림도 셋이 급히 뛰쳐나왔다. 정글도 한 자루씩 들고나온 것을 보니 습격 사실은 파악한 모양이지만 누가 쳐들어왔는지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멍청한 놈들. 총을 들고나왔어야지. 절세고수를 상대로 그거 가지고 되나.

    “뭐꼬?”

    “아무것도 안 보이는디 뭘 우야······”

    허풍개는 그들을 향해 접근하지도 않았다. 저들에게는 이쪽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조용히, 손가락을 튕겼을 뿐이다.

    나무 몇 개를 부딪치며 날아간 BB탄은 몇 번의 도탄 끝에 목표물에 정확히 명중했다. 어, 앗, 윽 하는 소리가 세 번 터져 나왔다.

    BB탄 한 알이 세 명을 한꺼번에 마비시켰다.

    연달아 뛰쳐나온 산적들마저 같은 꼴로 만들어주니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인원은 더 없게 되었다.

    이쯤 되니 다들 누가 쳐들어왔는지도 다 눈치챈 걸까. 산적들은 그대로 건물 안에 틀어박혔다. 다들 숨죽인 채 곧 있을 절세고수의 습격에 대비하느라 바빴다.

    “총 챙기라, 총······”

    허풍개는 벽 너머로 저들이 뭘 하는지 볼 수 있었다. 저들이 어디 있는지, 무슨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조리. 그중 대부분이 사격 자세를 취하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허풍개는 건물 안에 직접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마음속 칼을 움직였다.

    허풍개의 머리 위로 칼 한 자루가 허공을 날았다.

    산적들이 들어찬 합숙소의 지붕 위에서 태극검이 멈춰섰다. 태극검은 한 바퀴 회전하여 지붕의 삐죽한 피뢰침을 잘라버렸다.

    이윽고 태극검이 지붕 위에 내리 찍혔다. 그 칼끝이 지붕의 기와 사이에 파고들자 허풍개가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뇌위진동변경인.

    콰르릉, 하고. 어두운 하늘에서 한 줄기 번개가 내리쳤다.

    섬광이 한 차례 번뜩이더니 번개는 태극검의 칼자루 끝에 도달했다. 태극검에 닿아있던, 합숙소의 불빛이 꺼졌다. 낙뢰가 전기시설을 초토화하여 조명을 마비시킨 것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운지 두서가 없는 목소리들. 녹림도들은 갑작스러운 조명의 소멸에 허둥거리고 있었다.

    허풍개는 주머니 속 BB탄들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저들은 어둠 속에 갇혔다. 챙겨온 탄환은 충분하니, 이제 자신은 연신 탄을 쏘아 안전하게 사냥하면 될 일이다.

    *******

    “예, 끝났습니다. 사람들 보내서 산적들 옮겨요. 말했다시피 아예 담그진 말고. 그냥 가둬두든 발뒤꿈치 자르든 그건 알아서 하고······”

    통화를 마친 뒤 허풍개는 산에서 내려갔다.

    아직도 도박장의 사람들은 산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도박장은 태연하게도 불빛을 흩뿌리며 영업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산 아래에는 무림맹의 봉고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형님? 여기요.”

    이풍의 차가 그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허풍개는 그 안에 몸을 실었다.

    *******

    이풍이 운전하며 투덜거렸다.

    “아니, 씨발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커서 뭐할지는 몰라도 혹시 번듯한 일 하고 싶어지면 그때 가서 어쩌려고? 정말 무림인이 되더라도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림 일만 할 수 있는 거랑 여러 선택 중에 무림인을 고르는 건 또 다르잖아. 애새끼가 중딩이라 그런지 생각이 없어.”

    허풍개가 주먹을 쥐었다.

    “한 대 때려도 되냐?”

    “형님 주먹은 매워서 안 돼요. 운전 중에 좆되는 수가 있어. 그래서······ 녹림이랑 이대로 쭉 전쟁할 거요?”

    “그래야지.”

    “혹시 바람이 잡혀갈 뻔한 거 때문에 그러는 거면, 아비 입장에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바람이도 무사하고 하니까 그냥 그러지 말고······”

    “왜 이제 와서 말리냐. 녹림이랑 싸우면서 돈 벌라고 막 꼬드기던 자식이.”

    “그땐 형님이 이리 잘 나갈 줄 몰랐잖소? 지금은 그런 식으로 돈 벌 필요도 없어. 가뜩이나 모산파랑 계약하기 직전인데, 괜히 쌈박질하다가 문제 생기느니 그냥 몸 사리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아서라. 이런 일 당해놓고 허허 넘어가는 사파 새끼가 어딨냐.”

    “그놈의 사파 타령은······”

    이풍이 혀를 차는 가운데 허풍개가 말했다.

    “그리고 사실, 단순히 화난다고 이러는 게 아냐.”

    “그럼요?”

    “내가 얼마 전에 강준만이 만났거든.”

    “아, 그 형사 새끼요.”

    “그 새끼가 지 마누라 수명 연장하고 싶다고 나한테 내력전수 해달라 하더라.”

    “아니, 진짜 씨발 새끼네. 그래서요?”

    “구자성이 나한테 원하는 것도 비슷할걸. 그놈은 강준만보다 더 양심이 없단 게 문제고.”

    “어, 그래서 형님을······ 그래서 그럴 엄두 못 내게 아주 작살을 내야겠다 이거요?”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풍이 또다시 혀를 찼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여간 노인네들이 욕심만 많아. 그 나이에 뭘 더 살겠다고 그 지랄들을······ 아, 형님한테 하는 말 아닙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도 허풍개는 쉬지 않았다. 황군 고수 홍나연에게 연락하여 이런저런 일을 당부한 다음, 차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수련했다.

    두 시간쯤 더 달리고서 차가 멈췄다. 허풍개는 창밖의 산을 보았다.

    또 다른 산적 소굴이 저기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곳으로 향했다.

    *******

    그날 밤, 녹림의 산채 두 곳이 궤멸했다. 단 한 명의 절세고수가 하룻밤 사이에 벌인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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