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72화 (72/103)
  • 건달 정진영 - [1]

    ““無敵無籍者!”” ““無敵無籍者!””

    허풍개는 저 앞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을 들었다. 모산파를 떠나려는 그를 환송하기 위해 상당한 무리가 나와 있었다.

    그들의 대표로 박애진이 말했다.

    “여기 머무셔도 되는데요.”

    허풍개로서는 사실 자기도 그러고 싶다는 말은 하기 어려웠다. 담담하게 거절의 뜻을 밝혔다.

    “그럴 거면 아예 계약을 일찍 했지요. 아직은 한국에서 할 일이 남았습니다.”

    박애진이 아쉬움을 표했다.

    “뭐, 어차피 계약까지 삼 개월도 안 남았으니까요. 이제 곧 저희랑······”

    거기까지 말하고서 박애진이 흠칫했다.

    허풍개가 살짝 웃은 것이다. 워낙에 웃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왜?

    저도 모르게 나온 웃음이었다. 지금 이 순간, 허풍개는 기분이 좋았고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백 년 넘게 머리를 잠식해온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도, 지금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듯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있었다. 백 년 만에 경험해보는 평정이었다.

    허풍개는 허리에 찬 태극검을 보았다.

    정말로 이 검 덕분일까? 모산파의 주술이 깃들어서라든가, 아내의 넋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아니면 이 훈련용 검이 소년 시절 자신을 떠올리게 해줘서인가?

    허풍개는 계속해서 검을 쳐다보다가, 이내 그것을 허리에서 풀어냈다.

    그 검을 박애진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 좀 맡아주십시오.”

    “이 검을 많이 아끼시던 것 같은데, 남겨놓고 가시려고요?”

    “가지고 돌아가려면 귀찮은 일이 많잖습니까. 도검 소지증도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격 심사를 받아야겠고. 혹시 세관에서 한 달 정도 압수될 수도 있고요. 그러느니 맘 편하게 맡겨놓는 게 낫겠습니다.”

    박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붙잡았다.

    그리 검을 건네준 순간, 허풍개는 중력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느꼈다.

    몸과 마음을 모두 사로잡는 중력이었다. 몸도 마음도 도로 무거워진 가운데, 지긋지긋한 숙박객과도 같은 공포증 또한 머리 한 구석에 도로 자리 잡았다.

    입가의 미소마저도 저절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표정이 변해버리기 전에 허풍개는 뒤돌아섰다.

    ““無敵無籍者!””

    등 뒤에서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허풍개는 걸으면서 무표정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기차에 몸을 실으며, 돌아가기 싫다고 생각했다. 다시 모산파에 가서는 그 검을 건네받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될 말이었다. 할 일이 남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

    “모산에 잘 갔다 왔어?”

    “그래.”

    “좋았어?”

    “한국보다 더.”

    허풍개의 말에 월녀가 쓰게 웃었다.

    “대뜸 그런 말 하기야? 그런데 뭐, 사부한텐 그럴 만도 하겠네. 사부는 김치맨도 아니지? 김치, 먹어본 적도 없댔지 아마.”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는 너무 비쌌고 나이 먹어서는 오신채를 먹지 않게 됐으니까.”

    “애향심이며 애국심도 여전히 없고.”

    “그딴 건 가져본 적도 없네.”

    “그래,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아무튼 그 정도로 대접받아서 기분이 좋았으면, 차라리 신분 세탁 같은 거 하지 말지 그랬어? 쭉 허풍개 의사요 하고 다녔음 국가행사마다 초대받고 얼마나 좋아.”

    “허풍개일 때도 순수하게 칭송만 받진 못했어. 본 의치 않게 정치적으로 얽혀있었으니까. 이승만 그 양반이 나 싫어했던 거 아나?”

    “알아. 여운형 그 오빠 호위라서 그랬던가?”

    “그것도 그렇지만, 그 양반 때문에도 그래.”

    “그 양반?”

    “고종 황제, 폐하······”

    “그냥 존칭 빼고 불러.”

    “그러면 너 화내지 않나?”

    “싫어하는 거 뻔히 아는데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이젠 나도 그분의 세간 평가가 어떤지 알아. 사람들이 안 좋게 말할 때마다 일일이 화내다 보니 지쳤어.”

    “그러냐······”

    “그래서, 그분 탓에 왜?”

    “이승만이 고종 그 양반 혐오했잖아. 고종이 이승만 잡아다가 고문한 거 알지? 내가 고종 그 양반 구해온 데다, 고종 그 양반은 이승만이 자기 싫어하는 걸 뻔히 아니까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 못 되게 별짓을 다 해서 방해했거든?

    고종 그 양반이 누굴 당선되게 할 능력은 없었지만 누구 당선 못 되게 할 능력은 있었지. 라디오 방송에 나와선 이승만이 뽑지 말라고 하고 그랬어.”

    “당시에 시골 사람들은 다 왕가를 좋아했으니까. 그분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땐 다 들었지.”

    ”그래, 결국엔 여운형이 당선됐는데, 그 와중에 여운형 옆에 내가 딱 붙어 다니니까 아주 눈엣가시였을걸. 여운형이 임기 끝나자마자 이승만이 날 조지려 했지 뭐냐? 그 양반 부탁으로 구자성이가 찾아와선······”

    “구자성이가 뭘 했는데?”

    “날 줘팼지.”

    “그 산적 놈이 사부를 팼다고? 그걸 왜 그때 말 안 했어?”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진 게 쪽팔리니까. 뒤지기 싫으면 앞으로 나대지 말라더라. 그 와중에 이승만은 여전히 나 미워하겠다, 그냥 신분 세탁했지.”

    “그런데 사부, 듣기로 구자성이가 나중에도······”

    “무적비비탄일 때 만나서 또 처맞았지.”

    “나 요새 수면제 상시로 복용해서 기운 없는데, 지금 마구 기운 솟아나려 하네. 나가서 그 산적 놈 패줄까?”

    “저번에 내가 이겼으니 됐어.”

    “그러고 보니 그랬지? 잘했어, 우리 사부. 되게 장하네······.”

    “이 망할 년이 사부를 쓰다듬네? 예의를 어디서 배워먹어선······”

    “사부한테 배웠는데?”

    “이년이······”

    월녀가 웃고, 허풍개가 뭐라 쏘아붙이려는 중에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허풍개는 말하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월녀는 침대에 누운 그대로 조용히 있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고진철 씨. 예? 예······ 알겠습니다. 지금 가죠.

    통화를 마친 허풍개가 월녀를 바라보았다. 월녀가 웃었다.

    “멀거니 서서 뭐해? 통화 들어보니 급히 가봐야겠던데.”

    “미안해.”

    “미안하긴. 가보기 전에, 사부? 잠시만 이리 와봐.”

    “응?”

    월녀가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서로 가까워진 감촉이 따스했다.

    허풍개가 얼굴에 피가 쏠리는 걸 막기 위해 급히 호흡을 고르는 가운데, 월녀가 말했다.

    “저번에 사부가 나 안아줬으니까. 나도 안아보려고.”

    “누가 본다······”

    “난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써. 아무튼, 사부?”

    “뭐······”

    “힘내. 이제, 가봐.”

    허풍개가 어색하게 말했다.

    “그래, 또 올게.”

    월녀가 웃었다.

    “나중에 만나.”

    *******

    정진영은 동인천 토박이로, 동네에서 보고 들은 게 있어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레 건달을 동경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조직에 몸담았으려 했다.

    조직원 모집 시험에서 두들겨 맞으며 맺집과 깡다구도 증명해보였지만, 정진영은 건달 지망생치고는 덩치가 좋지 않았다. 건달 지망생들 사이에서는 만만하게, 그러니까 ‘찐따’로 여겨졌다.

    신입 조직원들을 한곳에 몰아놓고 교육하는 합숙 생활을 잘 견디지 못했다.

    조직은 이렇듯 합숙에서 발생하는 낙오생 또한 유용하게 써먹곤 한다. 조직에서는 정진영을 건달을 시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해 보이지만 건달 노릇하며 폼 잡고 싶어하는 머저리로 보았다.

    결국 조직은 정진영을 자기네가 운영하는 유흥업소의 바지사장으로 임명했다. 나름 짭짤한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경찰 단속이 들어올 경우 대신 잡혀가는 자리다.

    결국 그런 식으로라도 원하던 건달 노릇을 하면서, 정진영은 제 맘이 불안과 공허로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이러다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들 조직에서 챙겨줄 것도 아니요, 전과 딱지를 달고 나와서는 아무 일도 못 하고 지내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조직에서 자신을 쓰다 버리기로 맘먹었단 사실도 알았다.

    불안 속에서 저축 따윈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루하루 술만 마시며 지내던 중에 형님이 찾아왔다.

    정진영에게는 그런 기연이 따로 없었다. 형님은 조직에서 정진영을 빼주더니,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하는 게 아닌가.

    정진영은 그 즉시 은인 앞에 엎드려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오늘, 형님이 정진영을 불러 일을 지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지시였다. 정진영은 눈을 껌벅였고, 당황스러워했지만 그 지시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어찌 감히 그러겠는가? 그날로부터 고작 일 년도 지나지 않았으므로, 맹세는 변치 않았다.

    정진영은 담배를 피우는 척 골목에 내내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한 중학생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정진영은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노력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바람이? 여기서 보네. 오빠 알지?”

    이바람이 스쿨버스에서 나와서는 칠 분 정도 걸어야 귀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가 그녀가 지나쳐야 할 길이란 것도 조사해두었다.

    “어, 도혁이 오빠 친구······”

    이바람은 아는 얼굴을 보고서도 당황스러워했다. 어째서? 정진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최대한 친근한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진영이 오빠라 불러. 아무튼 아는 얼굴 만나니 반갑다, 야.”

    “그래?”

    “그런데 너, 배고프니?”

    “아니, 급식 이미 먹었는데?”

    식사를 제안하려던 정진영은 또다시 당황했다. 급히 다른 핑계를 떠올렸다.

    “배 안 고프다니 잘됐네! 오빠랑 잠시 어디 좀 가자. 학교가 멀어서 이 동네에 별로 친구 없댔지? 여기 사는 니 또래들 좀 소개해 줄게. 좆나 잘생긴 새끼도 하나 있다?”

    이바람이 고개를 저었다.

    “어······ 됐어.”

    “됐다니?”

    “나 곧 이사가.”

    “어, 그래? 안 됐다. 그럼 갖고 싶은 거 사줄게. 스위치 어때?”

    “스위치 이미 있어.”

    “딴 거라도······”

    “우리 집에 돈 많아. 그리고 왜 나한테 뭘 사주겠단 건데?”

    “내가 니 아버지한테 뭐 팔아달라고 부탁하는 처지거든? 그래서 뇌물 바칠 테니 말 좀 잘해달라고······”

    이건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좋은 핑계라 생각했는데, 정작 이바람이 보기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 돼.”

    “그러지 말고······”

    “저리 가.”

    “너 자꾸 그럴래? 오빠 화낸다?”

    그 순간, 이바람이 보인 반응은 당황하여 주눅 드는 게 아니었다.

    이를 악물더니 뒤돌아서서 달아나는 이바람을 보며 정진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정진영이 달렸다. 달리면서 외쳤다.

    “지랄해서 미안해, 미안하니까 잠시 서서······”

    그러나 이바람은 서지 않았다. 이런 젠장. 다음부터는 꼬드길 기회가 완전히 사라질 텐데.

    어쨌건 중학생 소녀보다 성인 남성이 느리긴 어려운 법이었다. 따라잡으려던 그 순간에, 여기저기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들의 고함도.

    “너 이 씨발 새끼, 당장 손 안 드나?”

    정진영은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웬 의기 있는 아저씨가 나섰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정진영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지금 상황에 나선 것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열세 명이 한꺼번에 튀어나와서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하고 있었나? 자신이 명령받은 건 오늘 아침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열세 명의 남자들이 정진영을 쫓는 가운데, 정진영은 이바람을 쫓았다. 쫓고 쫓기는 가운데 기어이 정진영이 먼저 목표물을 붙잡았다.

    “놔!”

    소리 지르는 이바람의 팔뚝을 세게 붙잡았다.

    정진영이 총을 꺼내 들고는 외쳤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그 순간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총을 이바람의 머리에 들이대려다 말고 말고, 정진영은 눈을 껌벅였다. 총 든 손도, 다리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조용한 발소리가 울렸다.

    정진영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목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점혈. 눈알을 굴려 바닥을 보니 하얀 BB탄 한 알이 구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저걸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 기어이 이런다 이거지.”

    입은 조금이나마 움직여지는 듯했다. 정진영은 더듬거리면서나마 말했다.

    “무적, 무적자, 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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