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70화 (70/103)
  • 모산파 허풍개 - [3]

    이풍은 각국에서 찾아오는 스카우트들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 언어를 익혔다. 명국어를 익힌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명국 방송을 보면서도 자막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풍은 조그만 스마트폰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명국어를 경청했다.

    스마트폰 속에서 박애진이 말했다.

    「여기 무적무적자 대협께서는 모산 무공의 극의를 깨우치시어 추후 수백 년은 회자할 위명을 떨치신바 (······) 본파를 알리는 데 지난 그 어떤 모산파 고수보다도 큰 공을 세우셨습니다. 속된 말로 말씀드리자면 모산파 창립 이래 이 정도의 광고 효과를 본 적은 없었지요」

    그 앞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그리 크게 웃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소리는 스마트폰 너머로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모인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풍은 스마트폰에 비치는 제 의부를, 그 앞에 모인 인파를 보았다.

    저 모두가 단 한 명의 절세고수를 맞이하러 모인 사람들이었다.

    “저래야지.”

    이풍은 소매로 눈을 훔쳤다. 뿌예졌던 시야가 돌아오자 다시 그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저 양반은 당연히 저런 대접을 받아야 해.”

    박애진이 계속 말하고 있었다.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이 절세의 고수께서는 본파와 구두계약을 마쳤습니다」

    스마트폰으로도 생생히 전해지는 박수 세례. 짝짝, 하는 소리에 맞추어 이풍의 심장이 박동했다.

    「곧 정식계약에 들어갈 예정이지만, 본파는 그러기도 전에 이미 너무나도 큰 덕을 본 셈입니다. 그리하여 본파는 그 공로에 마땅한 보상을 드릴 수 없을까 고민한바, 계약에 앞서 여기에 진인을 모시어······」

    또다시 시야가 흐려졌다.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자 이풍은 급히 눈가를 닦았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이풍은 여운에 젖어있었다.

    그때 문가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나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다 말고, 이풍이 눈살을 찌푸렸다.

    옆에서 함께 방송을 보던 딸이 중얼거렸다.

    “저 오빠 또 왔네? 도혁이 오빠 친구······”

    *******

    달리는 차 안에서 허풍개는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명국인들 사이에 인기 있다는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이유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정도로 많은 것을 보여준 절세고수는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원래 절세고수들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무공 시연 한번 제대로 하지 않는 법이다. 다른 절세고수와 대결하는 법은 결코 없다. 누군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일이 없는 친선 비무라도 마찬가지다.

    모름지기 무림인들이란 체면을 끔찍하게 중시하는 법이고, 자기네 문파의 무공이 패하는 상황 자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물며 문파의 간판 고수가 패한다면 문파의 브랜드 가치가 하락하기 마련이다. 그러느니 아예 문파의 상징과도 같은 고수들끼리는 대결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명국 무림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이 와중에 한 절세고수가 다른 절세고수들과 연달아 싸우고 다닌 것이다. 그 와중에 마른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고 웬 비눗방울들이 날아가 벽을 뚫어버리는 조화들까지 나타났다.

    그걸 보며 이 땅의 무공광들이 환장하는 것을 이해할 만하다. 자신이라도 이 경지에 이르기 전이었다면 예의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래도 그 인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허풍개일 적에나 이 정도의 국민적 성원을 받아본 것 같은데······.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허풍개가 문득 물었다.

    “그래서, 전수 허가 내주신다고 하셨지요.”

    박애진이 운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진인께서는 모산파 무공을 정식으로 남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거예요. 전례 없는 명예지요. 제 알기로는 속가 출신도 아니고 아예 외국 출신의 고수에게 이런 허가를 내준 것은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명국인인 제가 명국 사람들을 욕하기는 뭐하지만······ 아시죠?”

    “압니다. 명국인들 꽌시 심한 거.”

    명국은 외교 혹은 돈벌이로 판다를 곧잘 써먹는데, 다른 나라 동물원에 판다들을 내주고는 그 사이에서 새끼가 나오더라도 그 판다가 그 나라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기네는 판다를 팔아넘긴 게 아니라 빌려줬을 뿐이니 이 세상 모든 판다는 명국의 소유물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명국은 모든 무공 또한 명국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무공은 전 세계에 퍼진 지 오래요, 타국의 고수들도 많은 마당이지만 그들의 무공에 대한 지적 소유권은 오롯이 명국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공을 팔거나 전수하며 돈을 벌 권리도, 영화 등에 무공을 내보내며 로열티를 챙길 권리도 전부 명국에 있다고.

    소림사에서 영화나 게임에 소림승이 출연하는 족족 로열티를 내놓으라며 윽박지르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유명한 무공을 창시한 조사들은 옛날옛적에 죽었으니, 그 저작권이 소멸한 지 오래 아니냐는 지적 따윈 명국인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원래 명국인들은 저작권의 존재 자체를 무시해왔지 않은가.

    여전히, 명국인들은 공식적으로 무공을 전수할 권리가 오롯이 명국에만 있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전 세계의 돈깨나 있는 부자들은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명국 고수를 모셔와 ‘정품’ 무공을 익힐 수밖에.

    그리고 모산파는 이번에 허풍개에게 자기네 무공을 전수할 권리를 공식적으로 내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산파와 계약하기도 전에 그러겠노라고.

    “이건 단순히 무공 장사에 대한 허가가 아니에요. 비단 모산파뿐만 아니라 명국 무림 자체에서 진인을 인정하는 거지요. 명국 고수들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고수라고······”

    박애진은 이 조치로 말미암아 모산파는 새외고수를 데려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인께서 새외고수 출신이란 이유로 명국 무림에서 배척될 일도 이제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런 허가는 모산파가 자체적으로 내줄 수 있는 게 아니라 구파일방의 과반수가 동의해야 내줄 수 있는 것이거든요. 구파일방이 인정한 고수를 인정하지 않겠단 건 구파일방과 척지겠단 셈이고요.”

    “구파일방의 다른 이들도 이미 허가를 했답니까?”

    “물론이죠. 이미 사전 협의가 끝났어요. 진인께서는 아무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풍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보았다.

    저 앞에 모산이 우뚝 서 있었다.

    *******

    모산에도 자신을 맞이하기 위한 사람이 모여있었다. 또다시 자신을 위한 연호가 귀를 파고들었다.

    ““無敵無籍者!””

    허풍개는 자신을 향해 포권하는 도사들 사이를 걸었다.

    자신을 향해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 외부인이 문파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임에도 배척하는 분위기 따윈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모산파의 도사들은 자신으로 인해 큰 수혜를 보았다. 저들의 표정과 태도만 봐도 그 호의가 진심임을 느낄 수 있었다.

    도사들 사이에서 한 늙은 여도사가 걸어 나왔다.

    환갑쯤 돼 보이는 여자였다. 실제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진인.”

    허풍개는 이 와중에도 허세를 보이기 위해 당당하게 걷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움찔,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분께서는······”

    박애진이 뭐라 설명하려 했지만 허풍개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압니다.”

    아내의 늙은 얼굴이 저 앞에 있었다. 얼굴 한번 마주한 적 없는 사이였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처제.’

    장인과 장모는 늘그막에 자식을 또 하나 보았다던가? 그래서 아내에게는 나이 차가 꽤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던데, 그녀가 자신을 맞으러 나와 있었다.

    허풍개는 아내의 죽음에 여전히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처가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앞에서 당당하게 굴기는 어려웠다.

    허풍개는 어떤 예를 표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그녀 앞에 허리 숙여 절했다.

    늙은 여도사는 조금 난처한 눈치로 말했다.

    “이건 좀 민망하네요. 사조님 아내의 여동생이면 생판 남이 아닌가 싶은데······”

    조금 어눌하지만 확실한 한국어였으므로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허풍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제 인사를 받으실 자격은 충분합니다.”

    “그런가요?”

    “예.”

    “그래도 영 쑥스럽네요······. 사조님과 친하셨나요?”

    “예. 그분의 작고하신 부인에 대한 말씀도 자주······”

    젠장, 사조의 아내 호칭이 잘 기억 나지 않았다. 허풍개가 속으로 낭패감을 느끼는 가운데 여도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여도사는 허풍개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서랍에서 천으로 감싼 물건 하나를 꺼내더니, 그 봉인을 풀었다.

    “제 언니가 어릴 적에 수련하며 쓰던 물건이에요.”

    드러난 태극검 한 자루에서 허풍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여도사가 태극검을 허풍개에게 내밀었다.

    “이제 본파에 입적하신다니까, 본파와 사조 분과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하는 차원에서 이걸 선물로······”

    여도사가 태극검을 내려놓은 순간,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태극검이 떨리고 있었다. 이내 태극검은 바닥에서 떠오르더니 허공을 날았다.

    주변에서 숨죽인 탄성들이 울려 퍼졌다. 이기어검이 사실이었느니, 실제 이걸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느니 하는 감탄사들.

    한편 허풍개는 자신 앞에 떠 있는 태극검을 보며 눈을 껌벅였다.

    처제 앞에서까지 폼 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자신은 내면의 칼 따위를 조종하고 있지 않았다.

    허풍개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도사들이 기도하는 소리가,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지만 허풍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고서야 건물을 나왔다.

    모산파의 본 건물인 정총림(正叢林)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장소, 어쩌면 이제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그 날까지 머무를 장소였다.

    그리고 그 첫인상은, 스스로 믿기지 않을 만치 좋았다.

    *******

    강남제일검은 화산파의 속가제자였다. 어릴 적에 자길 지도한 스승 앞에 무릎 꿇고 절했다.

    화산의 스승이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강남제일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가 자랑스럽다니요?”

    “네 몸값이 구천만 달러를 넘겼지 않으냐. 내 제자 중에 이 정도 걸물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젠장, 요즘 무림은 그놈의 몸값만 신경 쓴다. 명문정파의 고아하신 도사라도 마찬가지다.

    강남제일검은 스승 앞에서 확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했다.

    “저는 걸물 따위가 아닙니다.”

    “구천만 달러짜리가 걸물이 아니면 뭐냐?”

    “전 패배자입니다. 몇 년 전에, 그러니까 육 년 전에 한 고수에게 패했어요.”

    “알고 있다. 무적비비탄에게 패했다고. 이후로 유흥마저 끊고 수련에 매진하여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던데, 맞느냐?”

    “예.”

    “그렇다면 흉 될 게 뭐냐? 무적비비탄은 나도 잘 아는 절세고수니 그에게 패했다 한들 욕될 일이 아니고, 그 패배로 말미암아 실력이 늘었다면 오히려 복된 일일진대.”

    강남제일검은 한참을 입 다물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패배 이후로 아무런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식사나 놀이에서도, 여자와의 하룻밤에서도요. 달리하고 싶은 일도 없어져서, 그 기쁨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 수련만 죽어라 한 겁니다. 그러다······ 어제 기차 타고 오는 길에 그놈의 기쁨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습니다.”

    “어떤 일이었길래?”

    “그놈의 제자가 제 칼을 욕하지 않더군요. 제가 뭘 하고 있는지 안다고, 살짝 인정하는 듯 말했어요. 그리고 저는······.”

    “그것만으로도 기뻤느냐?”

    “예. 그래서 비참합니다. 그놈의 제자만 해도 절 숱하게 이겨 먹었는데, 그놈한테 한마디 들었다고······ 게이 새끼도 아니고, 이게 대체······”

    스승이 혀를 찼다.

    “마음에 강박이 생긴 거군. 자길 비참하게 한 자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거야.”

    “그럼 저는 대체 어째야 합니까?”

    “너무 수치스러워할 것 없다.”

    스승이 말했다.

    “너는 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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