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68화 (68/103)
  • 모산파 허풍개 - [1]

    허풍개는 자신 앞에 엎드린 고진철을 보았다.

    “이 은혜를 대체······”

    허풍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무림맹에선 어쩔 거랍니까.”

    “무림맹이요? 물론 사례를 해드릴 겁니다. 바라시는 게 있다면······”

    “그거 말고. 박 회장이 영화 작살 내고 위원 하나 납치하려 했잖습니까. 그 일로 무림맹 다른 위원들이 빡쳤답니까?”

    고진철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화났다기보다는 겁을 먹었지요.”

    “겁을?”

    “왜, 박 회장이 아무리 또라이라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을 것 아니겠습니까? 척 봐도 무림맹을 도발하기 위한 짓거리던데요.

    문제는 보통 도발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이후 행동을 위한 사전작업이란 거지요. 그리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무림맹 위원을 폭행하고 납치하는 게 고작 도발이라면, 진짜 행동에 나설 때는 대체 뭔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그럼 무림맹에서 보복 같은 걸 할 생각은 없나?”

    허풍개의 물음에 고진철이 치를 떨었다.

    “설마요. 제가 알기론 그럴 계획 절대 없습니다. 딱 봐도 보복하는 게 박 회장이 바라는 바인데 뭔 수로 그러겠습니까? 보복을 하지 않아도 저쪽에서 뭔가 해올까 봐 겁날 지경입니다. 지금도 박 회장은 우리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게 드러났는데······”

    고진철은 벽에 걸린 TV를 보았다. 한창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가 멕시코입니까, 한국입니까? 대낮에 조폭들이 시민들 사이에서 총질하다뇨? 그 사건은 한국에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있어선 안 되는 건, 그러고도 어영부영 넘어가려는 지금 이 상황입니다!

    도사가 하늘에서 번개를 떨어뜨렸다고 범죄율이 줄어드나요? 월녀님께서 무사하신 건 물론 국가의 경사지만 그 일로 범죄자들 사면이라도 할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결코 이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해서도, 넘어가서도 안 됩니다!」

    TV에 나오는 저 검사를 허풍개도 알았다.

    이록, 박 회장이 후원해서 키워낸 검사던가? 저번에 취조실도 아니고 병실에 나타난 그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열변을 토하는 이록 검사를 보며 고진철은 욕설을 지껄였다.

    “저 새끼 저거 영화관에서 다크나이트를 감명 깊게 봤나? 뭔 놈의 검사가 기자 모아놓고 연설을 하고 자빠졌대. 깡패 잡아서 정계 진출할 것도 아니고.”

    그러더니 고진철은 허풍개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검사들 사이에 기수가 중요한데 새파란 후배 새끼가 저리 튀는 걸 선배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는 검사들이 많으니 잘 타이르도록 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말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덕분에 무림맹이 쓸모없는 위원 하나 구하겠답시고 허튼짓을 벌이거나 정말 위원이 납치된 걸 손도 못 쓰고 방치하다가 체면을 해치는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여쭙자면, 보상을 어떻게 해드리면 좋겠습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게 뭘 해드리기 어렵겠지만, 무림맹 차원에서는 뭔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역시 영약이 좋겠지요?”

    고진철이 당신 취향 잘 안다는 듯 말하며 웃었다.

    그러나 허풍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약 말고. 개인적으로 도와줄 게 있긴 한데.”

    “뭡니까?”

    허풍개의 요구를 듣고 난 고진철이 반색했다.

    “전혀 어렵지 않군요. 정말 그거면 되겠습니까? 그건 오히려 무림맹 입장에 좋은 일 같기도 한데······”

    “예.”

    “그럼, 그리 전하지요. 그리고, 오늘 모산파 가신다지요? 축하드립니다! 이미 전 세계 무림인들에게 유명하신 분이지만, 이젠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겠군요? 이번 그 회장 놈과의 싸움만 해도 무림맹 모두가 이미······”

    연신 칭송과 감사를 전하는 고진철을 허풍개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영화 촬영장에 무림맹 위원이 직접 찾아왔을 때, 허풍개는 그게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박 회장이며 자칭 천마며 산적 두목이며, 절세고수 셋이 한국 무림의 평화를 위협하는 마당 아닌가. 이 마당에 무림맹을 편들어줄 유일한 절세고수가 떠나버리려는 것이다.

    거금을 주든 협박을 해서든 막으려 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러질 않는다. 어째서 이렇게 순순히 보내주려는 것인가? 절세고수 없이도 그들과 맞설 마땅한 방법이 있나?

    물론 이제 허풍개가 알 바는 아니었다. 한국 무림이 어찌 된들 무슨 상관인가? 이제 자신은 모산파로 떠날 것인데.

    *******

    영화 제작이 취소된 뒤, 모산파에서 연락이 왔다.

    스승을 위한 영화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음을 위로할 겸, 모산파에서 직접 모셔서는 대접해드리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모산파와 계약하기로 한 날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러니까 당장 계약을 앞당기자는 내용은 아니었고, 계약하기 전에 한번 미리 본파에 부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마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 허풍개는 명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운전해줄 사람도 없이 완전히 홀로였다.

    “고작 운전해줬다고 이걸 받아도 됩니까?”

    허풍개가 내준 목함을 받아들고서 이도혁이 눈을 크게 떴다.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회장 그 미친놈이 뭔 짓을 할지 몰랐는데요. 그 상황에 운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 정말 위험하진 않았어도 그만큼 보상은 줘야겠고.”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

    “제대로 입 다물라는 조건도 포함이요. 다시 말하지만 이풍 그 양반한테 말하면······”

    “안 되죠. 예. 알겠습니다. 말 안 할게요.”

    이도혁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허풍개는 모른 척했다.

    둘만 있을 때면 이도혁은 자꾸 뭔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허풍개는 매번 무시했더랬다. 애초에 그것이 부담스러워서 혼자 가려는 것 아닌가.

    결국 이도혁마저 떠나간 가운데, 허풍개 홀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표를 끊은 뒤, 승강장에 발을 디디고는 신음했다.

    “안녕, 안녕!”

    귀에 울리는 해맑은 목소리, 허풍개는 못 들은 척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과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라나 레반도프스카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허풍개는 정말 그러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아는 척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라나가 다가와서는 눈을 크게 떴다.

    “스고이야! 진짜 기가 정순해졌네요?”

    그녀의 말에 허풍개는 자신과 그녀의 몸을 비교해보았다. 확실히, 이제 자신의 체내 기는 며칠 전보다도 정순해졌다. 눈앞의 저 소녀와 비교해볼 수 있을 만큼 맑아진 것이다.

    저번 일 덕분일 것이다. 아직은 정말로 월녀나 눈앞의 소녀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덕분에.”

    대충 대답했더니 영문 모를 말이 돌아왔다.

    “그렇죠? 제 덕분이죠!”

    저건 또 뭔 소리인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아서 허풍개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래서 여긴 왜 있습니까. 이거 명국행 열차인데.”

    라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국 떠나려구요. 이제 집에 가야죠.”

    “집? 백련교 본파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래도 한국에서의 일이 영 어려울 것 같으면 그냥 사업 접고 돌아갈 거라고요.”

    “그래서 정말 포기하시려고?”

    “어쩔 수 없죠. 한국은 동아시아 물류의 허브고, 제대로 장악해두면 아시아 전체에 물건을 유통하기 편해지는 곳이지만······ 별수 있나요? 동맹들은 말 안 듣고 이상한 행동이나 저지르지 않나, 높으신 분들이랑 깡패들 유착은 너무 단단하질 않나.

    가뜩이나 항구에는 컨테이너 검색기까지 완비돼서 물건 들여오기도 힘들어졌어요. 경찰들도 단단히 뿔나서 돌아다니는데, 뭘 더 해볼 엄두가 안 나던데요.”

    그래서 다 그만두고 한국을 떠날 거라고? 정말?

    허풍개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애초에 이년은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헛소리라서 제대로 믿을 수가 없다.

    라나가 울상을 짓다 말고 웃었다.

    “뭐, 돈이랑 인력은 따로 쓰지 않았으니까 다행이에요. 돌아가서 크게 욕먹을 일은 없겠네!”

    허풍개는 라나를 뚱하게 쳐다보다가 문득 물었다.

    “저한테 찾아와서 한 편이 되라면서 영약 비싼 거 주시지 않았나?”

    “그랬죠?”

    “지금까지 한국에서 총 몇 자루 팔아댄 걸론 그 영약 한 알 못 살 텐데요. 아무리 봐도 손해 크게 보신 것 같은데.”

    “아, 그건 한국 정복이랑은 상관없이 쓴 돈이라서 괜찮아요!”

    “저 포섭하시려던 게 아닌가?”

    “그런 것도 있구, 본교에서 예전부터 하던 일이 따로 있어요! 본교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다른 교에 성인(聖人)이 나오지 않도록 방해하는 일인데······”

    “백련교에선 그런 일도 합니까.”

    “뭐, 자세히는 말 안 해줄래요! 이것도 결국엔 큰돈 써놓고 재미 못 봐서 더는 안 할 거니까. 아무튼······ 이제 끝이에요. 이제 만날 일 없을 거예요.”

    “정말?”

    허풍개의 물음에 라나가 웃었다.

    “왜요, 혹시 제가 최종보스라고 생각했어요? 설마! 요새 천마는 주인공 아니면 히로인인 거 몰라요? 정말 바보다!”

    허풍개는 그저 대화만 나눴을 뿐인데도 피로해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무튼 서로 더 싸울 일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라나가 씩 웃었다.

    “전 별로 다행이 아닌데? 아무튼, 만나서 즐거웠어요! 가능하면 또 만나요!”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더니 라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허풍개는 그녀가 떠나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한숨 쉬었다.

    이제야 좀 편해지겠네.

    그러나 기차에 몸을 실은 뒤, 자기 몫의 좌석에 앉은 순간 허풍개는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옆좌석의 노인이 허풍개를 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신가. 우리 회장님 이겨 먹은 분 아니야?”

    저 노인의 이름은 리우이였다. 박 회장의 무공 사부 중 하나로, 화산파 매화검수 출신이었다.

    허풍개가 담담히 말을 받았다.

    “별로 자랑스러운 승리는 아니었지요.”

    “왜 승리가 안 자랑스럽지? 패배자를 무시하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그럼 순순히 자랑스러워 하게. 이 졸자 놈의 인사나 받고! 영광스러운 승리에 감축드리오, 대협.”

    왜 저리 비꼬나?

    그 이유를 알 만했다. 저번에 웬 자객 놈을 탈출시키기 위해 박 회장과 한 판 겨룰 때, 박 회장을 거들던 저 노인을 쓰러뜨린 적이 있지 않은가.

    사람들 앞에서 합공하다가 쓰러진 일이 저 노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한 비슷한 감정을 품은 모양이고.

    그리고 자신에게 원한 있는 사람이 하나 더.

    허풍개는 리우이의 옆에 앉은 남자, 지금 자신을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강남제일검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뽕대협으로 유명한 검객이다.

    저 또라이라면 이 열차에서도 언제든 기습적으로 칼을 휘둘러올지 모른다.

    편히 수련하기는 글렀군.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그 양반 이겨서 불만이요?”

    “아니. 나야 고맙지.”

    고마울 건 또 뭔가, 하는 얼굴로 바라봤더니 리우이가 말을 이었다.

    “전에 일수(一手)에 뻗어버린 게 쪽팔려서 한동안 폐관 수련이나 하고 지냈는데. 이번에 자네가 박 회장 이겨준 덕분에 내 체면이 상당히 살아났어.”

    “어르신 체면이 왜.”

    “애송이 절세고수한테 진 건 창피한 일이지만 그 절세고수가 사실 애송이가 아니었다면 별로 수치스러울 것 없는 일이잖나? 덕분에 내 맘도 편해져서 히키코모리 짓 그만두고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됐지 뭔가. 제자가 진 마당에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솔직히 고맙네!”

    지금 보니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축하하려던 모양이다.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리우이가 계속 말했다.

    “정말 강하더군? 번개까지 떨어뜨리는 걸 보면 성취는 강함보다 더 깊은 모양이고. 그걸 보고 정말 놀랐네.”

    허풍개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생각하시는 만큼은 아닐 겁니다.”

    “겸손할 것 없네. 왜, 이번 승리도 저번에 그 아가씨랑 싸운 일만큼 유명한 거 아나?”

    “왜, 또 영상 나돕니까.”

    “엄청 나돌지. 유탸브인가 하는 곳에도 올라왔던데. 화산파에도 자네 탄지공 탄속이며 원리며 분석하느라 바빠죽을 지경일걸 아마······ 아무튼 다시 한번 축하하네. 모산파에겐 정말 큰 복이로군.

    거의 백 년 만에 또 이런 고수가 나오다니? 어째 모산파 절세고수는 한국에서만 나오는데, 이거야 원 한반도로 모산파 사원을 옮겨야 하는 게 아닌가 몰······”

    리우이가 말을 하다 말았다. 고수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과 반사신경은 대화 중의 예기치 않은 공격에도 기민한 대응을 가능케 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기관단총의 총구를 보았을 때, 리우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만 크게 뜨는 게 아니라 허리에 찬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발검의 고수라도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빠르게 그럴 수는 없다.

    기어이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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