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62화 (62/103)
  • 무적비비탄 - [5]

    급기야는 두 명이 동시에 총을 들었지만, 그 시도는 무적무적자가 BB탄을 양손으로 날릴 수 있단 사실만 확인할 수 있게 했을 뿐이다.

    불과 삼 초 만에 네 명이 무력화된 상황이 망신스럽다. 나름대로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음에도 분타주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서.”

    그 와중에 그놈의 재촉이 또 들려왔다.

    결국 분타주는 표정 관리를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분타주의 표정을 본 거지 몇 명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다 함께 움직였다.

    열한 명이 한꺼번에 총을 꺼내 들었다.

    분타주는 분노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저쪽은 BB만 깔짝거렸는데 이쪽은 대뜸 총질해서 쏴 죽인다고? 그랬다간 칭찬해줄 사람이 없다. 학교에서의 싸움에서 커터칼을 꺼내들어 상대를 피 나게 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라 졸렬한 망신거리인 것과 마찬가지다.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아직 다친 사람도 없고 하니,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넘어가지요.”

    분타주는 말하면서 허풍개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을 겨눈 열한 개의 총구 앞에서 허풍개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되려 그와 시선이 마주친 분타주의 눈동자만 흔들렸다.

    허풍개가 말했다.

    “분타주. 조선족이니까 한국어 하지 않나?”

    분타주는 담담한 척 보이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어 하는데 뭐가 문제요”

    “덤비라는 건 공격하란 뜻이요. 선공을 양보한다는 건 덤비란 뜻이고.”

    친절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허풍개가 말을 이었다.

    “왜 안 덤비나. 어서.”

    그러면서 허풍개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항복의 신호로 손을 들려는 것이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 손은 머리 위가 아니라 제 옆구리에 놓였다. 태극권의 중단 방어를 위한 자세다.

    빌어먹을, 총알을 막으려는 모양이다. 얼마 전 영상을 봤으니 그게 가능하단 건 안다.

    하지만 열한 발의 총알을 상대로 그러려고? 정말?

    분타주가 남몰래 호흡을 골랐다. 거세지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켜야 했다.

    흘긋 옆을 보았다. 거지 하나가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손이 떨리는 것을 확인한 분타주는 내심 안도했다. 지금 한 명 상대로 위축된 쫄보는 나뿐이 아니라 이거지. 덕분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분타주가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놈은 개방도가 아니요.”

    “어서.”

    “그런데 거지들을 책임져야 할 개방으로서 거지 단속을 못 한 건 미안한 일이군요. 저희 잘못은 당연히 아니지만, 도의상 조치하겠노라고 약속하지요.”

    말하면서 분타주는 손짓했다. 거지들이 총구를 내리는 걸 보고서야 그는 완전히 안심할 수 있었다.

    그제야 허풍개가 협상에 나설 태도를 보여왔다.

    “조치라면, 어떤?”

    “사태가 벌어진 호텔 앞에 거지 두 놈 세워놓으면 어떻습니까. 허튼짓 하려는 놈들 있으면 입구에서 거지들 보고 그만두게요.”

    허풍개는 물끄러미 분타주를 쳐다보다가 적당히 예를 표하고는 사라졌다.

    부하들도 물린 뒤, 분타주는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힘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직속제자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냥 보냅니까? 절세고수고 뭐고 이 인원이 질 리가 없는데.”

    분타의 체면이 상했다고 생각해서 불만스러운 걸까? 하여간 생각 없는 새끼.

    분타주는 축 늘어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겨서 뭐해. 자기네랑 계약할 고수 쏴 죽이면 모산파가 참 좋아하겠네.”

    “모산파 그놈들, 요새 장문인이 돈 좀 써서 기가 사는 모양이지만 그래봤자 연변에 와서 뭘 어쩌겠습니까? 정 쏴버리기 뭐하면 무릎이라도 꿇게 한 다음 보내시지.”

    “그놈이 무릎을 왜 꿇어. 총 겨눈들 상관도 안 하는 거 못 봤냐.”

    “그건 그냥 허세 부린 거니깐······”

    분타주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산파고 뭐고. 저게 절세고수 중에서 제일 위험한 놈이야.”

    “절세고수 중에서 그놈이 제일 세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무적비비탄만 해도 미친 싸움개로 유명했는데 제자 놈은 더하니까 문제지.”

    “더하다뇨?”

    “무림 데뷔하자마자 싸움만 죽어라 하는 놈이잖아. 지난 오십 년 동안 절세고수가 싸운 적 몇 번 있었냐.”

    “공식적으로 두 번인가 있었죠.”

    “누구보다 강한 놈들이 왜 그리 안 싸운대냐.”

    “몸값부터 비싸고, 절세고수면 웬만해선 어디 우두머리쯤 되니 몸 사려야 하니깐······”

    “그런데 저놈은 대체 올해에만 몇 번 싸웠냐. 박 회장이며 백련교 수괴며 구자성이랑 싸웠다는데 이쯤 되면 적수랑 만날 때마다 싸워댄 셈 아니냐. 얼마 전엔 총상까지 입었고. 영상까지 보면 총구 앞에 몸 들이미는 게 아주 버릇인 모양인데, 절세고수씩이나 돼서 저러는 게 제정신인 놈이냐.”

    분타주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완전 미친놈이지. 아주 제 목숨 내놓고 다니는 놈이야. 제 스승이나 사조랑 똑같아.”

    *******

    허풍개는 거지 굴을 나오자마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뒤질 뻔했네.

    속으로는 내내 불안했지만 몸을 사리거나 먼저 협상에 나설 수는 없었다. 곧 죽어도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밀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파인의 생리 아닌가.

    상황이 오히려 틀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는 자신이 잘 처신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백 년 동안 해온 방식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운전석에서 이도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끝났나?”

    “예. 돌아가죠.”

    호텔에 복귀하자 김보영의 주변에 스태프들이 모여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허풍개는 짧게 말했다.

    “상황 정리했으니 다들 쉬어도 됩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허풍개는 즉시 방에 들어갔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커녕 쉴 시간도 없었다.

    오늘 일과가 너무 길었다. 못다 한 오늘치 수련을 마저 끝내야 했다.

    *******

    다음 날, 개방은 약속을 지켰다. 호텔은 물론 촬영장까지 지키고 선 거지들을 보고서 사람들은 황당함을 느꼈다.

    누군가의 시선에 예민한 허풍개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자꾸만 자신을 흘끔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촬영장의 젊은 무림 고수를 보며 어제 일을 떠올리고는 움찔했을 것이다. 거지 하나 고문하고 끌고 가더니 정체 모를 집단과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놈을 보며 정말로 다른 세계에 사는 깡패임을 깨달았을 것이고.

    그 일로 공포를 느끼고는 말을 붙여오는 사람이 줄어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불운하게도, 이 와중에 허풍개에게 관심을 보여오는 놈들이 더욱 많았다.

    이곳에서 촬영하는 게 소문난 모양이다. 허풍개는 촬영장에 몰려온 현지 주민들을 보고 신음했다.

    “무적무적자!”

    “모산파 말고 무당파 가요! 무림의 태산북두 몰라요?”

    배우들에게 싸인을 요청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무적무적자를 향한 환호가 더욱 많았다.

    무적비비탄 역을 맡은 배우가 아연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중얼거렸다.

    “한류 스타들 구경하러 온 줄 알았더니, 절반은 선생님 보러 온 거 같은데요?”

    허풍개는 변명하듯 설명했다.

    “한국보다는 명국 문화 영향이 더 큰 곳이니까요. 요새 조금 유명해진 절세고수를 알아보는 거죠.”

    “오, 명국에선 배우보다 무림인을 좋아하나 보죠?”

    “가난뱅이 동네에선 특히 심하죠. 왜, 브라질에선 어린애들이 죄다 축구를 광적으로 하지 않습니까. 축구가 인기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출세 수단이니까 그런 거죠.

    그러니 브라질 애들이 축구 선수들 이름이며 스펙을 줄줄 꿰듯 명국 애들은 무림인 신상 명세를 외는 셈인데,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왜죠?”

    “국가가 무림에 잡아먹힌 걸 의미하니까. 괜히 명국이 선진국 못 된 게 아닙니다.”

    허풍개로서는 이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무림인을 보며 환호하는 애어른들도,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겠다고 몰려온 배우며 스태프들도 벌써 지긋지긋했다.

    잠시 후, 감독이 허풍개를 불렀다. 옆에는 강준만이 앉아있었다.

    자문역의 두 사람에게 감독은 옛 일화를 물었다.

    “그 사건 이후로 무적비비탄 대협께선 탄지공을 선보이셨다던데, 맞습니까? 스토리에 반영해야 하니까 설명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허풍개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강준만이 먼저 떠들어댔다.

    “예! 그날 쭉 도망치면서 죄다 따돌린 줄 알았는데, 기어이 먼저 와서 매복해있던 놈들이 있더라구요. 놈들한테 포위당해선······ 그때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말이죠······”

    *******

    그날 세 명은 쫓기고 있었다. 무림맹의 추격대를 겨우 따돌린 마당이었다.

    강준만이 운전석에서 차를 모는 가운데, 뒷좌석 강준만의 아내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허풍개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강준만이 옆에서 말을 걸어왔지만 모조리 무시했다.

    그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협객 같은 일을 하나 했더니, 결국엔 아니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형사가 의인은커녕 그동안 마주친 구질구질한 인간말종 중 하나였음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무림맹과의 충돌까지 감수했더니 그런 보람이 없다.

    속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끔찍하게 나빴지만,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정말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경찰을 내버려 두고 협객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놈 중 변변한 놈은 거의 없다는 사실만을 새삼 확신했을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가 뇌물을 받았다는 건 다 저놈들 이간질이라는······”

    강준만의 말을 허풍개가 잘랐다.

    “조용히. 야구 좀 들읍시다.”

    “아, 야구. 야구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좋아하는데.”

    라디오에서 야구 경기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경기였고 허풍개가 거의 이십 년 전부터 좋아 해온 투수가 선발이었다.

    허풍개가 처음 좋아했을 때만 해도 젊었던 그 투수는 이제 마흔이었다. 사회인으로서는 젊은 축이지만 선수로서는 그렇지 않다.

    한때 전설이었던 그 투수는 이제 구위도 구속도 좋지 않았다. 헐떡거리며 던진 공이 배트에 얻어맞았다.

    연속홈런이 터지자 라디오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교체된 투수는 야유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옆자리의 강준만이 욕설을 지껄였다.

    “저 새끼 저거, 큰돈 주고 계약해놓곤 기간 많이 남아서 방출을 못 하나 본데, 계약기간 채우겠다고 꾸역꾸역 뛰면서 팀을 위해 열심히 뛰긴 지랄. 진짜 팀을 생각하면 선수가 알아서 계약금 반납하고 알아서 은퇴해야지.”

    더러운 새끼가 죽고 싶어서 저러나. 자기도 야구를 좋아하며 같은 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어서 저러나 보지?

    당연히도 허풍개는 그 말을 듣고 동의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 속에서 화를 버럭 내지도 않았다.

    그럴 기력도 없을 만큼 우울했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의 쇠락은 여러 가지 사실을 되새기게 하고 있었다.

    인간은 백 년 넘게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저 전설적인 선수조차 노화를 피하지 못해 반송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허풍개를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팀 발목 붙잡고 늘어지는 퇴물 새끼······”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모욕당하는 걸 들으며 허풍개는 생각했다.

    이제 야구는 그만 즐겨야지. 야구선수라 망상하는 짓도 그만두고.

    그러다간 그 선수처럼 늙어 몰락할 뿐이니, 그리 되기 싫거든 지금보다 더 수련 시간을 늘리고 더욱 집중해야 하리라.

    평범한 인간은 늙으면 늙을수록 약해지지만 무림인은 늙으면 기가 쌓여 더욱 강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이제는 더욱 철저한 무림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취미 따윈 버려야 할 것이다.

    주머니 속 BB탄을 만지작거렸다.

    허풍개일 적에도 자갈을 던져 적을 기절시키길 자주 했던가? 자신은 뭔가 던지거나 튕기는 데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BB탄을 튕겨오면서 그 솜씨는 스스로 놀랄 만큼 훌륭해졌다. 손가락 끝을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놀라운 변화를 그리게 된 BB탄은 가히 묘기에 가까운 기술이 되었다.

    그 BB탄을 튕기면서 탄에 기를 불어넣어 본 적은 없었다. 스포츠에서 기(氣)를 쓰는 것은 반칙 아닌가.

    그러나 이제는 야구 따윌 즐길 맘이 없다. 이제부턴 한번 기를 불어넣어서 써보자. 지난 이십 년의 수행마저 완전히 버리는 건 아까운 일이니까······.

    “씨, 저 새끼들······”

    저기에 도사린 적들이 보였다. 추격대에 따라잡히는 걸 넘어 추월당한 모양이다.

    뭔가 해볼 엄두도, 싸울 기력도 없을 만치 우울했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허풍개는 무표정하게 차를 나서서는 수십 명이나 몰려온 적들 앞에 섰다.

    주머니 속 BB탄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무적비비탄이 탄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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