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비비탄 - [4]
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이름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재계 서열 2위의 기업인 이름을 못 알아들을 수는 없다.
“대해 그룹 회장이 왜?”
누군가의 질문에 김보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 출연하지 말랬는데 출연했으니까······ 출연하면 죽여버린단 거 말로만 협박하는 줄 알았더니 정말······”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요?”
여기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김보영은 계속 몸을 떨었다.
그러다 김보영은 허풍개를 바라보더니 외치듯 말했다.
“선생님이 저 살려준 거죠? 정말 고마워요! 그러니까 저 좀 지켜줘요!”
허풍개가 말했다.
“정말 천서인이 그쪽을 해치고 싶어 하면 제가 무슨 수로 막겠습니까.”
“지금도 막아주셨잖아요!”
“당장은 어찌어찌 그랬어도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귀국한 뒤가 문제일 텐데요. 설마 평생 따라다니면서 지켜달란 건 아닐 테고.”
“그럼 어째요······”
“차라리 출연 포기하고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김보영이 버럭 소리질렀다.
“안 돼요!”
“안 된다니.”
“나 돈 없어. 이런 일 또 언제 들어온다고······”
허풍개는 속으로 한숨 쉬었다. 연예계 일에 밝지 않았지만 김보영의 사정은 짐작할 만했다.
원래 국민적 인기를 지니고 있던 그녀는 최근 오 년 동안 제대로 된 일을 받지 못했다.
무림인 방송국 습격 사건 당시 중태를 호소하다가 연기였음이 발각된 이후 그녀는 몰락했다. 무림과 얽혀있는 대형 연예 회사, 그리고 스폰을 해주던 박 회장 모두에게 밉보인 탓이다.
이 와중에 무림 미화를 위한 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그녀에겐 오랜만에 수입을 얻을 일이요 무림 자본으로 설립된 연예 회사들에 용서를 받을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허풍개가 깊이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당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누가 죽어 나가느냐 살아나가느냐 하는 것 아닌가.
허풍개는 감독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견에 동의해주길 바라서였다.
영화 찍다가 누구 죽어서 뉴스 타는 것보단 그냥 배우 교체하는 게 낫지 않느냐? 굳이 저 배우를 섭외한 것은 연기력을 높이 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라던데.
허풍개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허풍개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어찌 될진 천천히 고려해보는 걸로 하고······ 당장엔 선생님이 지켜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당장 제가 경호비를 드릴 순 없지만 바로 스폰서들한테 연락해서 경호비를 협상해볼게요.”
허풍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이대로 계속하시려고?”
“예, 뭐. 사실 당장 교체하느니 뭘 하자느니 말하기엔, 정말 천서인 그 양반이 시킨 일이 확실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 거지 양반도 그냥 강도일 수도 있으니깐······.”
허풍개는 묵묵히 감독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경찰에 연락을 할 테니······”
“경찰을 왜?”
허풍개의 물음에 감독은 당황했다.
“이런 일을 당했으니 우선 이 거지 양반부터 잡아가라 해야죠?”
허풍개가 말했다.
“시골 마을에선 마을 사람들한테 변 당해도 경찰 불러봤자 소용없는 거 알지요.”
“예? 예. 경찰도 마을 사람들이랑 한패니까요.”
“연변도 비슷합니다. 경찰은 이 거지 데려가선 대충 취조하곤 그냥 풀어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허풍개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지요. 나 보고 경호해달라고 했으니 주변 상황도 다 책임져야 할 테니까.”
허풍개는 아직 점혈에서 풀려나지 못한 개방 거지의 손목을 붙잡았다. 꽉 쥐어 고통스러운지 개방 거지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허풍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허풍개는 그대로 거지를 자기 방에 끌고 갔는데, 그 뒷모습을 여기 모인 연예인이며 스태프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뭘 하려는지 알 수 없어서 제지나 간섭조차 하지 못했다.
허풍개가 방에서 나온 것은 그로부터 이십 분 후였다.
허풍개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지만 거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감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하시다가······”
감독의 시선은 방에 들어가기 전과 완전히 달라진 거지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고통과 눈물 그리고 침에 범벅이 된 거지의 얼굴, 뭘 당했는지 몰라도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허풍개는 여전히 덤덤하게 대답했다.
“심문.”
“심문이요? 어떻게요?”
“그건 알 거 없고. 아무튼 지금 일 처리하고 올 테니 여러분은 김보영 씨랑 같이 좀 있어 줘요. 설마 사람들 모여있는 앞에서 해코지하진 않을 테니까.”
감독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허풍개가 거지와 함께 호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기겁했다.
“정말 지금 바로 뭔가 하시려구?”
“시간 아껴야죠.”
허풍개는 말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짧게 대답하더니, 이도혁을 향해 말했다.
“이도혁 씨? 따라와요. 운전해야지.”
*******
“진짜 회장님이 그 여자 죽이라고 사주한 거요?”
허풍개의 질문에 휴대전화 너머 박 회장이 대답했다.
「그걸 내가 왜 말해주나?」
“정말 그러라고 시켰다면, 취소하쇼. 김보영 그 여자 얼마나 멍청한지 잘 알 텐데. 그여자 행동에 뭔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암살까지 하면서 막으려 해?”
「그래, 나도 그년 멍청한 거 알아. 환자 행세만 잘하면 된다는 걸 그마저 못해서 기어이 병실에서 치킨 뜯어먹다 계획 말아먹게 만든 놀라운 년이지」
“그걸 알면서 왜?”
「내가 시킨 일이라고 한 적 없다니까? 그보다 그놈의 영화 자문역은 왜 맡은 건가. 뒤늦게나마 명예를 신경 쓰기로 했나?」
“모산파에서 하라니까 왔지. 당신이 모산파 투자자니까 나보다 더 잘 알 것 아닌가?”
그 말엔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침묵이 이어지더니 박 회장은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편 앞에서는 이도혁이 운전하고 있었다.
이도혁이 물어왔다.
“저기, 이 거지가 개방도일 거라 했죠.”
“예.”
“그런데 거지라고 다 개방도는 아니지 않나?”
“개방이 뭔지 압니까?”
“무협 소설 좀 읽었으니 알죠. 거지로 이루어진 무림 단체 아닙니까. 그런데 거긴 구파일방에 속하는 정파일 텐데······ 암살 사주를 받는 건 좀 이상한데요?”
“제대로 정장 입고 다니는 개방 장로들은 정파의 명숙이 맞죠. 하지만 밑바닥에서 돈 벌어야 하는 아랫놈들은 정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런 일 저런 일 가리지 않고 다 하는 사파 나부랭이지. 각지의 개방 분타는 그저 상납 경쟁하는 갱단이고요.”
이 시대에 개방은 명문 정파입네 하면서 무공 팔아 돈을 벌지 못한다. 근사한 도가 무공과 불가 무공을 내버려 두고 거지네 무공을 익히고 싶어하는 부자는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개방이 그나마 거지들 사이의 연락망을 통해 정보단체 비슷한 일을 하긴 했지만, 스마트폰만 켜도 각지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요즘 와선 그런 일마저 없다.
결국 요즘 개방도들은 뒷골목에서 약을 팔거나 이따위로 살인 청부나 받으며 운영하는 처지다, 하는 것을 허풍개는 굳이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다.
이도혁이 무림에 가진 환상을 깨기 위함이었다. 허풍개는 멀쩡한 청년이 무림인을 우상화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누구는 이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해서 안달인데 저놈은 대체 무슨?
허풍개가 계속 설명했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개방 분타의 세력이 큰데, 이 연변에서는 아예 개방이 다 해 먹는 수준이죠. 애초에 거지가 뭔 수로 호텔에 잠입했겠습니까.”
“종업원이 못 본 것 아닌가······”
“호텔에 잠입할 거면서 거지 꼴로 차려입은 이유는 무엇이겠고.”
“옷이 없어서?”
“개방도인 걸 내보여서 위압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입은 겁니다. 좆되기 싫으면 자기 일 방해하지 말란 거죠.”
이도혁은 신음하더니 문득 물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일도 직접 나서주시네요?”
“그럼 안 됩니까?”
“스승님을 음해해서 형량 늘리려 한 여자잖아요. 정말 도와도 되나 싶은데······”
“그게 뭔 상관입니까.”
허풍개가 너무 딱 잘라 대답해서 이도혁은 당황했다.
“이것도 그건가요? 협객은 도울 사람 안 가린다는?”
허풍개는 자세한 설명 없이 침묵했다.
사실 김보영 그녀에게는 별로 유감이 없다. 애초에 당시 사건에서 중태를 연기한 것은 박 회장이 시킨 일이요, 김보영은 그가 꾸민 음모에서 한 배역을 맡았을 뿐 아닌가.
애초에 그 음모는 무적비비탄도 동의한 일이라서 따질 수가 없거니와 김보영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멍청한 짓으로 그 음모를 중간에 파탄 내 형량을 줄이게까지 해주었다. 허풍개로서는 그녀를 미워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고 그 여자가 맘에 든다는 것은 아니지만, 맘에 안 드는 년이라고 안 도울 건 또 뭔가? 언제부터 맘에 드는 놈들이 도움을 청해왔다고.
“멈춰요.”
“예?”
“저기 개방도 있네.”
차를 세운 이도혁은 길가의 거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거지와 개방도를 구분할 수 있나요? 기를 보고서 그러는 건가?”
“기 보고선 구분 못 하지. 개방도라 해봤자 말단은 영약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일반인과 별 차이가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표정 보고.”
거지와 노숙자 중에서 개방도를 찾아내기는 비교적 쉽다. 그 얼굴을 보면 된다.
고통에 찌든 노숙자 중에서 유독 생기가 넘치는 놈이 있다. 나는 노숙자지만 보통 노숙자가 아니란 사실, 겉보기로는 이렇게 초라해 보여도 사실은 신분을 숨긴 무림인이란 사실에 우월감을 품고 있는 노숙자다.
심지어 그 노숙자가 행인들을 보며 비웃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놈이 바로 개방도다.
바로 그런 노숙자가 길목에 당당히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허풍개는 그 노숙자에게 다가갔다.
“개방도지?”
개방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만 껌벅였다. 허풍개가 무림에서의 자기 신분을 말하고서야 그 태도가 변했다.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분타주 좀 보자고 전해요.”
*******
이도혁을 돌려보낸 뒤, 허풍개는 거지 둘과 함께 걸었다.
한 명은 방금 길목에 앉아 있던 개방도요, 다른 하나는 청부를 받고 온 개방도였다.
허풍개는 청부를 받은 쪽 개방도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차에서 내릴 때만 해도 고문당한 여파로 겁에 질려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자기 소굴로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자신감과 함께 분노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결연한 다짐 같은 것이 그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거지 소굴, 그러니까 연변 개방 분타에 도착했을 때, 예의 거지는 재빨리 분타주로 보이는 중년 거지에게 달려갔다.
그는 울분에 가득 찬 표정으로 분타주의 귀에 무언가를 호소했다. 자신이 당한 일과 보복에 관해서였다.
과연 분타주는 소굴에 찾아온 유명한 고수를 환영해주지 않았다.
“무적무적자시라고?”
“예.”
“무적무적자, 나도 알지. 곧 모산파 간다는 절세고수님 아뇨. 여긴 왜 오셨나?”
“개방도가 나랑 일하는 사람을 해치려 했으니 따지러 왔는데. 문제 있습니까.”
“이 친구 개방도 아닌데?”
“방금은 둘이서 오순도순 대화 나누시더니?”
“그냥 거지새낀데 일단 같은 거지니까 데리고 있는 거요. 그런데 개방도인 줄 알고 고문하셨다고?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개방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는단 거니까. 애초에 개방이 있는 곳에서 거지를 괴롭히는 것부터가 문제고······”
허풍개는 저쪽에서 뻔뻔하게 구니 이쪽도 그렇게 굴기로 했다.
“고문이라니, 그런 적 없는데.”
“이 친구는 고문 당했다는데? 무슨 전기충격 같은 것도 당했다 하고.”
“증거는 있나. 살펴보면 상처 같은 거라곤 침 하나 찌른 자국밖에 없을걸.”
“고문한 적 없다면서 그건 또 어떻게 알았고?”
“몸수색하다가 알았지. 그래서, 저 거지가 사람 제끼려 했는데. 거지들 책임진다는 개방에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겁니까.”
개방 분타주가 혀를 찼다.
“정말 따지러 왔나 보군? 그것도 혼자서······”
“불만 있나?”
“있다면?”
허풍개는 자신을 노려보는 거지 떼를 바라보았다.
이 건물 안에 거지는 쉰 명 가까이 바글거렸다. 심지어 지금 그들은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다. 이 정도면 무공이고 뭐고, 그냥 식칼 한 자루씩 들고 달려들어도 당해낼 수 없을 만하다.
그리고 허풍개가 말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삐딱한 자세 그대로.
“덤비쇼. 선공 양보할 테니.”
그 말에 웬 거지가 발끈했다. 주저 없이 주머니에서 웬 쇠붙이를 꺼냈는데, 당연히도 총이었다.
그리고 허풍개는 오가장에서 중학생이 총을 겨눴을 때보다도 긴장하지 않았다. 저번 중고딩들은 죄다 파카를 입고 왔지만 여기 거지 놈들은 웬 면티나 입고 있었다. 플라스틱 BB탄이 두꺼운 파카에는 막히지만 면티는 당연히 무시할 수 있다.
거지가 총을 겨누는 속도보다 허풍개의 대응이 훨씬 빨랐다.
탁, 하고 주머니에 든 손가락을 튕겼다.
“어서.”
총구를 겨누려다 말고, 거지의 몸이 굳었다.
다른 거지 하나가 또 총을 꺼냈지만 허풍개는 그쪽에 시선도 주지 않았다. 또다시 손가락을 튕기고, 탁.
석상처럼 굳어버린 거지 둘 사이에서 허풍개만 계속 말했다.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