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60화 (60/103)
  • 무적비비탄 - [3]

    오십 년 전 허풍개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남아있었다. 남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이 이 정도로 크지는 않았다.

    당시에도 하루 대부분을 수련으로 보내긴 했지만, 약간의 취미를 즐길 여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야구 경기를 좋아했다. 경기를 직접 가서 보거나 TV를 통해 볼 여유는 없었지만 수련하면서 라디오 중계를 켜둘 수는 있었다.

    국내 경기와 메이저리그 경기를 가리지 않고 중계를 들었는데, 거기 나오는 스타 선수들의 동작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물론 무림 고수들은 초인이요, 그 어느 몸값 비싼 선수보다 빠른 공을 던지거나 모든 공을 누구보다 세게 쳐낼 수 있다. 그런데도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예 스포츠 선수들에 대해 우월감을 지닌 무림인이 넘쳐나는 마당 아닌가.

    그러나 허풍개는 중계 속 야구선수들을 향해 막연한 동경심마저 품었다. 어떤 약과 기의 힘도 빌리지 않은 순수한 재능과 육체의 힘만으로, 서로를 다치거나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관중과 스폰서를 즐겁게 하고자 겨루는 그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언젠가는 그놈의 야구를 직접 해보고 싶단 맘이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투수였으므로 공을 직접 던져보고 싶어졌더랬다.

    그러나 야구공을 던지고 줍고 하자니 수련 시간이 줄어들까 봐 걱정이었다. 공을 마음껏 던질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실제 야구공을 대체할 물건이 필요했지만, 당시에는 야구 게임도 없었다.

    주변에 있던 문구점에 가서 BB탄을 사왔다. 그것을 야구공이라 상상하며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자신을 야구선수라고 망상했다.

    그럴 때면 늘 자신을 괴롭혀온 죽음의 공포마저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이후로는 투심이며 커터며 너클볼 따윌 BB탄을 튕겨 재현하는 것이 머리가 아플 때의 소소한 취미가 되었다.

    *******

    탁, 하는 소리와 함께 BB탄이 공기를 갈랐다.

    BB탄이 맞혀야 할 상대방은 건물 너머에 있었다. 뭔가를 던져서는 도저히 맞힐 수 없는 위치다.

    그러나 허풍개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양옆에 건물도 있겠다, 저 뒤에는 나무도 한 그루 심겨 있었으니까.

    장애물에 부딪칠 때마다 BB탄은 기괴한 도탄을 그렸다. 맨 처음 건물의 벽에서 튕기고, 저 너머 나무 기둥에서 튕긴 BB탄은 기어이 목표물에 가 닿았다.

    건물 뒤에 무적비비탄 역을 맡은 배우가 서 있었다.

    “어?”

    가슴으로 BB탄의 감촉을 느낀 배우는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자 더욱 크게 기겁하고 말았다.

    허풍개가 직접 다가가 손가락을 찔러 점혈을 풀어주었다.

    배우는 한동안 입만 뻐끔거리다가 겨우 물었다.

    “이게 탄지공이에요?”

    “예.”

    “어떻게······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스태프들을 뚫고 다가온 이도혁이 감탄했다.

    “탄속이 엄청 빨라졌네요? 심지어 이건 장갑 끼고 던지신 건데.”

    허풍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보입니까?”

    “대충은······”

    한편 감독이 자기가 자랑스러운 듯 설명하고 있었다.

    “저분 몸값이 4년 1400억이야. 월드클래스라고.”

    금액을 들어 말해주었더니 정확히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실감한 모양이다.

    별 관심이 없는 눈치였던 몇몇 배우들의 시선이 여기에 꽂혔다.

    허풍개는 연이어 콜라병 열두 개를 BB탄 한 번 튕겨 모조리 쓰러뜨리는 것을 보여주고, 태극권으로 진검을 받아내거나 흘려넘기는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이쯤 되니 무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묘기에 가까운 기술을 보고 감탄하기는 충분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허풍개의 손에 꽂힌 채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허풍개는 자신을 바라보는 배우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눈에는 놀라움을 넘어 희미한 동경마저 엿보였다. 일반인들이 무림인들을 볼 때 보이곤 하는 그런 동경이다.

    그리고 허풍개는 일반인들이 무림인을 동경하는 게 질색이다.

    멀쩡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깡패 새끼를 왜 동경한단 말인가?

    심지어 만인의 동경을 받는 배우들이 역으로 무림인을 동경하듯 바라보는 꼴이라니, 도저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배알이 꼴렸다. 여기 와서 오만한 배우의 시비에 걸리거나 싸가지 없게 대해진 일은 없지만, 오히려 칭송만 잔뜩 들었을 뿐이지만 상황 자체가 역하게 느껴졌다.

    격한 반발심을 느끼며 허풍개는 생각했다.

    애초에 여기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었다. 얼른 다 때려치우고 돌아갈 방법이 없을까?

    사람들에게 무례하기 굴지는 않으면서, 일은 일대로 충실히 하면서 사람들이 얼른 꺼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들 방법이······.

    무적비비탄 역을 맡은 배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적비비탄 선생님께서 태극권을 쓴다던데요. 태극권 자세를 취할 때는 어떤 식으로······”

    감독이 시키기도 전에 자신이 연기해야 할 배역을 미리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배우로서 칭찬받을 만한 태도겠지만 허풍개는 이마저 맘에 들지 않았다.

    “웬만해선 자세 안 취해요.”

    “그럼?”

    “그냥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닙니다. 싸울 때도 그러죠.”

    “언제든 BB탄을 쏘기 위해선가요?”

    “그런 이유도 있지만 허세 부리기 위한 의도가 더 크죠.”

    “허세요?”

    “별로 열심히 싸우는 게 아니라고 과시하는 겁니다. 학생들이 서로 싸울 때, 복싱이나 태권도 배웠어도 무술 자세 취하는 건 쪽팔리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건들거리면서 싸우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것과 비슷한 감성입니다. 그러니까 허세 넘치는 양아치처럼 굴면 그게 바로 무적비비탄처럼 구는 거죠.”

    허풍개는 계속해서 배우와 문답을 주고받았다.

    무적비비탄은 어떤 표정을 짓고 다니면 되나?

    기쁜 상황이든 우울한 상황이든 무표정하게 있으면 된다.

    말투는?

    글로 쓰면 거의 모든 대사가 마침표로 끝나도록 어조의 변화가 없으면 된다. 모든 상황에 감흥이 없는 것처럼 굴면 자신이 더 우월해 보이리라 믿는 왕따 소년처럼 굴면 되는 셈이다.

    이쯤 되니 지도를 받는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까지 당황한 눈치였다.

    배우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혹시 스승님께서 우울증 앓으셨습니까?”

    “우울증 없는 현대인도 있나?”

    “묘사만 들어보면 그게 좀 심해 보이는데요.”

    “우울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뭐 대충 사회 부적응자가 얕보이지 않으려고 말투며 행동까지 모든 것에 허세 부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배우가 눈을 껌벅이고는 물었다.

    “그분 제자 아니신가요?”

    “그렇죠.”

    “혹시 사제 간에 사이가 나쁘신가?”

    “딱히.”

    “그런데 왜······”

    “사실 그대로 말하는 건데요 뭘. 저부터가 그러라고 배웠고.”

    배우는 여전히 당황한 눈치였지만 뭔가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스승을 욕보이는 태도를 지적하고 들었으면 오히려 대하기가 편했을 텐데, 계속 예의 바르게 구니 허풍개로서는 아쉬운 일이었다. 무림과 연이 있는 연예 회사들이 배우들을 보내면서 미리 경고라도 해둔 걸까?

    대충 첫 만남이 끝난 뒤, 감독은 무리를 이끌고서 회식을 제안했다.

    허풍개는 벽곡을 근거로 빠지려다 감독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비건 식당 갈 거니까 같이 가자고요?”

    “예.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채식을 하셨죠? 제자 분도 그러신다니까 연변시에 있는 비건 식당 위치를 미리 알아두었죠.”

    칭찬을 바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감독에게 허풍개가 말했다.

    “저 때문에 다 속으로 욕하면서 식사하시는 꼴은 보고 싶지 않군요.”

    “설마요? 그런 놈 있으면 제가······”

    “애초에 저 야채나 과일도 거의 못 먹습니다. 무나 당근만 해도 재배된 채소라서 못 먹는데, 비건 식당에도 제가 먹을 만한 건 별로 없을 것 같군요. 나물과 버섯만 먹으면서 칼로리를 채우기도 어려운 일이고.”

    감독은 더 설득하려 했지만 허풍개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그때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어때요? 싫다는데. 그냥 고기나 먹어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김보영이던가? 오 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적 인기의 배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옆에서 이도혁이 조심스레 경고했다.

    “이미 알죠?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방송국 습격하셨을 때, 크게 다쳤다고 앓아누웠다가 꾀병인 거 걸린 그 여자······”

    허풍개와 그녀는 악연이라면 악연이라 할 만한 인연이었다. 영화를 더욱 주목받게 하기 위해, 소위 어그로를 끌기 위해 일부러 악연이 있는 배우를 섭외한 것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아는 까닭일까? 김보영과 허풍개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감독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지만 허풍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허풍개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모인 사람들을 등지고는 걸어가 호텔 방에 들어갔다. 가져온 녹색 죽을 한 번에 들이키고는 가부좌를 틀고 수련을 시작했다.

    *******

    허풍개는 출연 배우가 아니라 자문역이었으로 여기 오래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간마저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수련을 해야했다.

    눈을 감고 복기와 명상을 거듭하길 수 시간, 허풍개의 반쯤 감긴 눈에 사람들의 기가 보였다.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기였다.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이 호텔에는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묵었다. 그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허풍개는 그들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몸을 섞기 시작한 몇몇을 보고서는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시간이 더 흐르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기 방에서 잠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복도에는 급사들만 돌아다니는 가운데, 허풍개는 여전히 잠들지 않고 수련하고 있었다.

    여전히 감긴 눈에 복도에서 돌아다니는 한 명이 유독 눈에 띄었다.

    놈은 너무 천천히 조심스레 움직였다. 호텔에서 그럴 필요가 있나?

    손님이나 급사라기엔 거동이 너무나도 수상하다. 도둑일지도 모른다. 물론 도둑이라고 해서 신경 쓸 필요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그 거수자가 여기 묵은 배우 중 한 명의 방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 방엔 이미 방 주인이 있어서 더욱 위험하다. 빈집인 줄 알고 들어간 도둑이 집주인과 마주치면 강도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허풍개는 여전히 눈 감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움직이면서도 계속해서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포착했다.

    기어이 배우의 방에 들어선 거수자가 움직인 순간, 허풍개는 빠르게 일어나 손가락을 튕겼다. ‘탁’.

    그러고는 방금 일이 벌어질 뻔한 방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았다.

    “아, 아······”

    가운차림의 여배우가 몸을 떨고 있었다. 김보영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뻗은, 다른 손에 웬 주사기를 들고 있는 한 남자의 등도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있었다. 어떻게 급사의 제지를 받지 않고 들어왔는지 모를 만치 꾸질꾸질한 차림이었는데, 딱 봐도 거지였다.

    무림에서 거지라면 그 소속은 뻔한 일이다.

    ‘개방도(丐幇徒)가 왜?’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자신은 또 뭘 어째야 하는가.

    허풍개가 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김보영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김보영은 비로소 허풍개와 거지를 연달아 바라보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살인 미수야!”

    사람들이 몰려오기는 충분한 목소리요 대사였다.

    급사며 스태프들이 부랴부랴 몰려오고는 거지를 보고 기겁했다.

    여배우, 김보영이 계속 외쳤다.

    “암살 시도야! 도와주세요!”

    듣다 못한 허풍개가 핀잔했다.

    “이미 도왔잖습니까.”

    그러나 김보영은 아직 제정신이 아닌 듯 모두에게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경찰부터 불러줘요! 천서인이 절 죽이려고 해요!”

    천서인?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데.

    그게 박 회장의 본명임은 뒤늦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도 별명만을 듣다 보니 본명을 들을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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