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59화 (59/103)
  • 무적비비탄 - [2]

    「허풍개 의사 탄생 121주년 기념, 영화 발표」

    「가제 ‘무적비비탄’」

    「제작비 310억, 예산을 아끼지 않고 거물 배우들 섭외 (···)」

    *******

    허풍개 앞에서 이풍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부턴 안 이럴게요. 약속······”

    허풍개는 그 배를 후려갈기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화가 치밀지만 어쨌건 저놈의 속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풍은 제 형님이 허풍개와 월녀의 관계를 알리지 못하게 막은 그때에도 대체 왜 그래어하느냐며 억울해했다. 놈은 제 형님이 사람들 사이에 더 인정받고 더 큰 명예를 얻어야 한다고 믿었다.

    한숨을 내쉰 뒤, 허풍개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바람이 해외여행 못 보내냐.”

    “예? 걔 방학 되려면 멀었는데요.”

    “그래도 어디 딴 데 보내면 좋겠는데.”

    “왜요, 형님 지금 멀리 가 있어야 하니까 그사이에 바람이 납치라도 될까 봐 그래?”

    “그래.”

    “그 정도로 사릴 필요가 있나?”

    “나 얼마 전에 구자성이랑 맞짱떴잖아. 중고딩 애새끼들도 죄다 때려잡았는데 몇 놈은 기어이 도망쳤으니 어떤 새끼가 원한 품고 덮쳐올지 알 수가 없어. 급한 대로 경호원이라도 붙여두면 안 되냐?”

    “아, 좀. 경호원 데리고 다니면 걔 학교에서 인싸 돼서 안 된다니까요. 애초에 스쿨버스 타고 다니는데 뭔 수로 경호원을 붙여?”

    “스쿨버스 내려서 걸어 다니는 지점에서라도 경호원들 따라붙게 해.”

    “에이, 돈 아깝게 뭘 그렇게까지······”

    “닥치고 해.”

    이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걱정되면, 그래 볼게요.”

    그제야 허풍개는 닦달을 그만두었다.

    그때였다. 저 밖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대협께선 잠시 떠나계신다고?”

    “그렇다니까? 그래서 나도 당분간 여기 없을 것······”

    그중 한 놈은 이도혁이고, 다른 한 놈은······.

    허풍개는 그 목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새끼는 뭐냐.”

    “아, 정진영이요? 도혁이 친구래요.”

    “그건 알아. 여기 놀러 오는 거냐?”

    “그게 아니고, 우리 건달들한테서 상납받는 사업 정리하잖아요. 원래는 그 권리 오가장에 다 팔려고 했는데 못 그랬어요. 오가장에서 짭새들 눈길 끌고 싶지 않으니 구역 확장할 맘이 없다나? 그런데 저놈이 와서 그 권리 사고 싶다니까 팔아야죠 뭐. 요샌 받을 돈 협상 중입니다.”

    “그럼 예전엔 저놈 여기 온 적 없고?”

    “아, 몇 번 왔을걸요?”

    “언제부터 들락거렸는데?”

    “음, 사 개월 전부터?”

    “그럼 이제 와서 못 오게 막긴 늦었네.”

    이풍이 눈을 껌벅였다.

    “못 오게 막아야 했어요?”

    “그랬어야 해. 아무튼 풍이 너, 저 새끼 바람이랑은 같이 못 있게 해.”

    이풍은 제 형님이 왜 그리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제 딸을 깡패와 어울리지 못하게 하란 뜻으로 받아들였다.

    “예, 그러죠 뭐.”

    그 말을 끝으로 시간이 지나, 슬슬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풍은 이도혁을 불러서는 말했다.

    “도혁아? 우리 절세고수님 잘 모시고 가라. 난 여기서 업무 봐야 하니까 이번엔 너 혼자인 거 알지?”

    이도혁은 헐레벌떡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번에 운전기사로서 허풍개를 영화 촬영장까지 모시고 가게 돼 있었다.

    “알죠, 알죠! 안전하고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이도혁의 업무는 단지 그뿐이요 위험한 일에 낄 때처럼 큰돈을 분배받지도 못할 테지만 지금 그는 신이 나 있었다.

    희열에 찬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째서?

    허풍개는 이도혁이 무적비비탄의 팬이란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연변에 있는 촬영장까지 운전하며, 이도혁은 내내 들뜬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가 얼마나 인터넷에서 어그로를 끌었냐면, 글쎄 무림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섭외된 배우 보곤 죄다 눈이 휘둥그레져선······”

    허풍개는 속으로 신음했다.

    *******

    영화 촬영장은 연변에 있었다.

    조선족 자치구인 그곳의 외곽에는 마을 하나가 있는데, 낙후된 곳이 으레 그렇듯 수십 년째 그 풍경이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삼십 년 전, 무적비비탄과 한 부부는 예의 마을에 발을 디뎠다.

    주민들조차 거의 다 떠나고 없는 그 마을이 영화 세트장으로 낙점된 것은 당시의 고증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 마을에서 감독이며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허풍개를 맞이하러 영화감독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 태도가 예의 바르다 못해 비굴했다.

    “오셨습니까!”

    감독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허풍개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여러 배우들이 잘 보이려 노력한다는 스타 감독이라더니, 그 위치에 어울리는 태도가 결코 아니었다.

    “말 놓으시지요. 제가 훨씬 어린데.”

    부담을 느낀 허풍개가 말했더니,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제가 무적비비탄 대협의 팬이라서요. 차마 그럴 수가 없네요.”

    허풍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도혁 같은 병신이 아니고서야 팬은 무슨 팬?

    차라리 무림맹 위원에게서 돈을 빌려놓고 갚지 못한 게 아닐까? 그 빚을 인질 삼아 무림맹 위원이 반강제로 섭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무림의 큰 어른을 잘 모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해둔 모양이다.

    한편 배우들은 감독이 왜 저리 저자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이 소리쳤다.

    “뭐해? 이번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분이니까 다들 인사해요. 예의 바르게······”

    쭈뼛거리면서 고개 숙여오는 배우들을 보며 허풍개는 벌써 심기가 불편해졌다. 깡패 새끼가 잘 나간다고 민간인들 인사를 받는 꼴이라니?

    허풍개의 표정은 이 시점에서 이미 잔뜩 굳었다.

    그 표정은 촬영장에 나타난 또 다른 남자를 보고서는 아예 일그러졌다.

    “이번 영화의 자문을 맡게 된 강준만입니다. 이 마을의 이장이기도 하죠.”

    마을의 한 집에서 걸어 나온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삼십 년 전까지는 형사였습니다. 무적비비탄 대협께 큰 은혜를 입은 바 있어 이 자리에 오게 됐습니다.”

    허풍개는 저 노인을 알았다.

    무적비비탄의 유명한 일화 중에는 한 형사를 도운 것이 있었다.

    그 강력계 형사는 한 회사에서 벌어진 연속된 의문사들이 무림맹의 짓이라 판단했다. 윗선의 압력과 살해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수사를 이어나갔다.

    결국 경찰청장의 사주를 받은 무림맹은 그 형사를 묻어버리기로 결정했다.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형사는 무림을 넘어 사회에서도 이름 높던 협객 무적비비탄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림맹에 밉보이는 것조차 감수하고 무적비비탄은 그 도움에 응했다.

    무림맹에서 보낸 히트맨들을 피해, 무적비비탄은 형사와 그 아내를 데리고 국경까지 넘어갔다. 기어이 압록강까지 건너 형사 부부를 이 마을에 지내게 했다.

    이번 영화의 줄거리가 바로 그 사건이었다.

    확실히 영화로 만들어낼 줄거리이기는 했다. 거기 얽힌 전투씬이며 추격씬만 해도 족히 상영시간의 절반은 잡아먹을 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무림맹이 악역으로 나오는 이런 주제를 썼는가?

    ‘무림 깡패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피하려는 거군. 미화하지 않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미화하려는 거야.’

    원래 프로파간다라는 게 노골적인 선전이면 잘 먹히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심으려는 사상은 몰래 섞어야 잘 먹히는 법이다.

    그리고 허풍개가 영화의 플롯을 미리 보았건대, 영화에서 무림맹은 깡패 집단으로서 악한 단체다. 그러나 그 구성원 중에는 선한 협객이 몇몇 있다. 그 협객들은 무림맹이 의기 높은 형사를 제기려는 조치에 반발하여 무적비비탄의 협행을 은밀하게 돕는다.

    그리고 엔딩에서 무림맹의 높으신 분들은 몰락하고, 무적비비탄을 도운 협객들이 무림맹의 높은 자리에 앉는다.

    그러니까 잘 보면 이 영화는 무림맹의 악행을 다루는 것 같아도 실은 이런 내용인 것이다. 무림맹이 악독한 것은 옛날의 일이지 요즘엔 아니다, 무림맹은 달라지려고 노력해왔으며 물론 그 구성원중엔 사람 죽여대는 깡패도 있지만 아닌 협객도 많다······.

    그 사건의 당사자이자 지난 수십 년간 무림맹과 얽혀온 허풍개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요, 차라리 무림맹을 대놓고 미화하는 것보다도 질이 나빴다.

    강준만이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오랜 도망 끝에 저희 부부 앞을 압록강이 가로막았죠. 저 뒤엔 깡패들이 득실거리는데, 마지막까지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저흴 도와주셨습니다.

    한 나룻배에 저와 제 마누라를 태우고 손수 노를 저어주시는데, 딱 허풍개 의사님의 일화가 떠오르지 뭡니까? 선인도해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겠더군요. 절로 전율이 느껴지던 게······”

    그 뒤로는 박수가 울려 퍼졌다. 배우며 스태프가 모두 자신이 얼마나 감동했는지 드러내기 위해 애를 썼다. 의인에게는 이런 칭송을 바쳐야 마땅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허풍개는 쑥스러워하는 강준만을 보았다.

    ‘저 좆같은 새끼.’

    허풍개는 저 일화가 미화되어도 엄청나게 미화되었음을 안다. 저 형사가 의인이 아니란 사실도 안다.

    저 노인, 강준만은 차마 맡은 바 사건을 대충 덮을 수 없었던 의기로운 사나이가 아니라 부패 경찰에 불과했던 것을 안다.

    무림맹이 저 남자를 죽이려 했던 것은 뇌물을 줘도 입 다물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큰돈을 요구했기 때문인 것도 안다.

    그리고 허풍개는 탈출시켜주는 조건으로 이번 사건에 대해 평생 입 다물고 있으라 당부했는데, 강준만은 그마저도 지키지 않았다.

    강준만은 한국을 탈출한 뒤, 연변 마을에 자리 잡고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소문을 내었다. 자신이 의인임을 광고하여 마을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고, 만약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면 무림맹의 짓임을 알리기 위한 언론 플레이였다.

    그 결과 무림맹의 은밀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건은 무림을 넘어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제대로 된 진상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고 영화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그때 사지라도 부러뜨렸어야 하는 건데.’

    한편 감독은 무적비비탄의 제자를 치켜세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무적비비탄 대협의 제자 분! 이분도 자문하러 여기 오셨습니다.”

    허풍개를 향해서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준만이 다가왔다.

    “만나 뵈어 정말 영광입니다. 스승님을 다시 뵙지 못해 참으로 유감인데, 그 제자 분이라도 만나 감사를 표할 수 있어 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강준만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허풍개는 무표정하게 그 손을 쥐고는 흔들었다.

    맘 같아서는 힘을 주어 그 손을 부러뜨리고 싶었지만 정말 그러지는 않았다. 새삼 그 일에 화내기에는 이미 겪은 일이 많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무례하게 보이기도 싫었으므로 마주 인사까지 했다.

    “저 또한 만나뵈니 참으로 기쁩니다.”

    그러고는 촬영장의 한 귀퉁이에 몸을 기대고 섰다. 계속 그렇게 혼자 가만히 있고 싶었는데, 그러도록 감독이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이번 사건에서 무적비비탄 대협은 탄지신공의 진정한 도(道)를 터득했다고 들었는데요. 제자 분도 그 도를 전수받아 완벽히 탄지신공을 익혀냈다 하고······ 맞지요?”

    허풍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탄지공, 익히긴 익혔죠.”

    “여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액션이니까 말입니다. 실제 어찌 이루어지는지 시범을 보여주시면 좋겠는데······ 물론 무림인들이 무공을 숨기는 건 알지만 만약 괜찮으시면······”

    정말 끔찍하게 싫었지만 이번에도 허풍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 일 아닌가.

    무적비비탄 역할을 맡은 잘생긴 배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허풍개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한 무더기 BB탄이 손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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