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58화 (58/103)
  • 무적비비탄 - [1]

    이도혁은 호흡을 멈춘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현상을 보았다.

    도사가 검지를 위로 향하자 하늘이 호응했다.

    천둥이 울렸다. 저 위에서 떨어져 지상과 연결되는 하얗고 푸른 선, 그 가느다란 번개를 보며 이도혁은 잠시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었다.

    이도혁과 함께 주변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라 기절할 것 같은 눈치였다.

    그들은 수첩이며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모산파의 박애진이 검증을 위해 각국에서 불러 모은 스카우터들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서는 얼마 전 TV에 나와 전 세계에 유명해진 이 도사의 기적이 CG나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줄 것이었다.

    “무림인은 가진 삼 푼을 숨기란 말이 있지 않나요? 새로운 걸 얻을 때마다 바로 공개하시네.”

    이도혁의 말에 이풍이 대답했다.

    “그거 돈 걸린 비무에서 승부 조작하려는 놈들이 쓰는 말이야. 돈 받고 진 뒤에 추궁받으면 무림에선 원래 이러는 거라며 헛소리하는 거지. 몸값 올리려면 가진 거 전부 과시해도 모자라다?”

    낙뢰에 감싸인 도사의 몸이 번뜩였다. 그 머리칼은 모두 섰다가 가라앉았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나온 것은 한 박자 후였다.

    “대단합니다!”

    스카우터들은 사무적인 일로 왔음에도 모두 열띤 얼굴로 칭송을 늘어놓았다.

    확실히 그럴 만한 장면이었다. 절세고수가 마법을 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정도로 마법 같기는 또 어렵다.

    그러나 정작 박수와 칭송을 받는 도사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허풍개는 무표정한, 어찌 보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모두의 반응을 반쯤 무시하고 있었다.

    지금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실제로 속이 편하지 않았다.

    허풍개는 방금 번개가 떨어진 하늘을 향해 속으로 질문했다.

    이 번개는 대체 누가 떨어뜨려 주는 것인가?

    뇌부(雷部)의 신장(神將)인가? 혹은 뇌공뇌모(雷公雷母)인가? 그도 아니면 천제(天帝)가?

    아니, 하늘에 누가 있기는 한가?

    ‘대답해!’

    물론 구름 몇 개 떠다닐 뿐인 맑은 하늘에서 대답 따윈 돌아오지 않았다. 개통된 상단전이 하늘과 기를 주고받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하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지금 허풍개를 답답하게 하고 있었다.

    번개를 떨어뜨릴 수 있게 된 건 좋다. 그러나 그뿐이면 무슨 소용인가? 그놈의 번개가 수명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면 세간의 허명을 얻고 끝날 뿐인데.

    도사로서의 경지가 더욱 높아진 지금, 조급함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는 이런 의심까지 들었다.

    애초에 번개를 부리는 게 정말 신선의 자격은 맞나 하는 생각이다.

    사실 뇌법과 신선을 연관 짓는 것은 자신만의 해석일 뿐, 도가 서적에 똑바로 적혀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신선이 되려거든 어째야 하는가? 더 많은 영약을 취해야 하나? 혹은 공덕을 더 쌓아야 하나?

    아니면 혹시, 깨달음이라도 필요한 건가? 설마.

    허풍개는 사후의 등선(登仙)인 시해를 믿지 않듯 깨달음이란 개념 또한 믿지 않는다. 불로불사를 포기하고 죽음 이후를 기약하는 것도, 수행에 깨달음을 요구하는 것도 전부 불교적 요소 아닌가.

    도교에 그런 개념들이 도입된 것은 비교적 요즘의 일이다.

    전진교의 개파조사 왕중양이 유교와 불교적 요소를 도교에 도입하고, 약과 같은 외단(外丹)이 아닌 자기 수양을 통한 내단(內丹)의 수련을 중시하게 된 것이 요즘 사람에게 익숙한 후기 도교다.

    반대로 약을 복용하며 신(神)을 신앙하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것이 도교의 원래 모습이다.

    그리고 요즘 무림에 유행하는 도교는 바로 그 초기 도교다.

    옛날이야 수은이며 비소 화합물 따위를 연단하여 약이랍시고 복용하다가 중독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그와 같은 방식의 도교는 당나라 이후부터 인기가 줄었지만, 영약의 성분을 철저히 분석할 수 있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도교의 대세가 되었다.

    허풍개도 그와 같은 옛 도교를 따랐다. 깨달음이며 사후세계를 믿는 도교? 약 처먹고 잡신을 모시는 옛 도교보다야 세련돼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걸 왜 믿어야 하는가? 차라리 그보다 세련되고 근사한 기독교를 믿고 말 일이지.

    “정말······ 정말로······”

    당연히 무림맹에서도 스카우터를 보냈다. 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이번에 진인을 모셔갈 모산파는 놀라운 복을 받았군요? 만약 진인께서 모산파에 가지 않으시더라도 이것만으로 엄청난 혜택을 받은 게 아닐 수 없습니다! 모산파 무공을 익히면 이런 기적을 부릴 수 있다는 게 증명된 셈이잖습니까? 문파와 그 무공의 위상 자체가 확 뛰어오른 셈이지요······”

    어느새 무적무적자를 부르는 호칭은 ‘대협’을 넘어 진인이 되어있었다.

    뒤에서 박애진이 흡족하게 미소 짓는 가운데 무림맹의 요원은 계속 말했다.

    “원래 절세고수들의 몸값은 측정할 수 없는 법이지만 이 정도면 절세고수들중에서도 가장 비싸다고 봐도 될 듯한데요? 적어도 구자성보다는 열 배 비싸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허풍개가 무례한 수준으로 말을 끊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러나 무림맹 요원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웃으며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게, 제안을 드릴 게 있어서요.”

    “한국에 남아 구자성이며 자칭 천마랑 싸워달라는 거라면 거절이요.”

    “아, 그게 아닙니다! 물론 그래 주신다면야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걸 어찌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이제 일주일 지나면 허풍개 의사님의 탄생일이잖습니까?”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바로 지금 허풍개의 속이 불편한 이유 중 하나였다.

    곧 생일이었다. 그것은 허풍개에게 남은 수명이 앞으로 구 년밖에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게 뭐요?”

    “그날을 기념하여 저희는 한 가지 발표를 할 예정인데요! 저희가 이번에 제안 드리려는 건 바로······”

    무림맹 요원의 설명을 듣고 난 허풍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화를 찍겠다고?”

    *******

    무협 장르는 무림인들의 가장 훌륭한 프로파간다 수단 중 하나다.

    야쿠자들이 야쿠자 영화를 후원하듯 무림인들은 무협 소설과 영화를 후원한다. 사파 무림인들은 자신들을 미화하기 위해서, 정파 무림인들은 자신들을 광고하기 위해서.

    무림에 얽힌 불미스러운 일이 많은 지금, 무림맹이 무협 영화를 한 편 찍어내기로 한 것은 당연히도 이미지 회복을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미지 회복에 걸맞은 한국 무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무림맹 요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영화에선 무적비비탄 대협이 주인공입니다! 제자 분의 허락과 협조를 받고 싶어서요.”

    그러자 허풍개가 즉시 내놓은 대답은 이러했다.

    “꺼지라고 해요.”

    “예?”

    “안 된다고.”

    그리고 무림맹 요원은 당황한 눈치였다.

    “저, 이미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누구랑? 수감되어 계신 무적비비탄과?”

    “아뇨, 그분과는 연락이 안 됐지만······ 이풍 대협과 모산파와 이미 논의가 끝난 줄로 압니다. 이번 영화 제작에 모산파도 투자했을 텐데요? 그래서 이미 배우 섭외도 끝나고 곧 제작에 착수할 예정인데······.”

    허풍개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자신과 상의도 하지 않고 그런 일을 진행하다니?

    ‘이풍, 이 개새끼······.’

    박애진에게 사실이냐 물어보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적비비탄 대협도 이제부터는 모산파의 계보에 속할 테니까요. 모산파에서 밀어주는 게 맞지 않겠어요?”

    허풍개는 신음했다.

    이미 허풍개는 계약을 앞당겨달라는 모산파의 요구를 거절한 데다, 앞서 계약이 무산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의 사고를 저지른 적도 있었다.

    이 와중에 영화 하나 찍겠다는 것까지 엎어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야 할 이유가 그저 개인의 불호뿐이라면 더욱.

    *******

    “요새 사부 매일 봐서 좋다. 자주 오기 힘들 거라면서 매일 오네, 히히······”

    “그 나이에 방정맞게 좀 웃지 마라, 기지배야.”

    “어찌 웃든 내 맘이지. 그래서 사부, 영화 하나 찍을 거라구?”

    “무적비비탄이 주인공이래. 내가 주연배우인 건 아니고, 그냥 자문 겸 몇몇 액션 지도나 해달라는데······.”

    “잘됐네. 사부 허락도 없이 멋대로 찍은 드라마 몇 개 제외하면 사부가 주인공인 영화는 처음 아니야?”

    “당연히 처음이지. 그동안 내가 다 거부했으니까. 이번에도 거부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고.”

    “가뜩이나 나 때문에 사부가 방송국 습격범으로 유명해졌잖아. 이참에 이미지 회복도 하면 사부한테도 좋고 모산파에도 좋은 일인데 왜 거부를 해?”

    “무적비비탄은 어디 영화 주인공이 될 만한 위인이 아냐.”

    “왜?”

    “무적비비탄은 그리 정의롭지 않았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부야말로 한국 무림 협객의 상징쯤 되는 거 같던데?”

    “내 뉴스 봤니?”

    “쭉 봤지. 수십 년 동안 신문 오려서 보관도 해놨어. 보여줘?”

    “진짜 해놨네, 이년······.”

    “봐, 여기. 경찰도 손대지 않던 섬 노예 문제를 한 달 만에 해결한 협객 무적비비탄······”

    “돈 받고서 한 거야. 천일염 이미지를 훼손하고 싶었던 업체의 의뢰였지.”

    “이땐 납치된 애도 구해줬네. 돈 한 푼 안 받고 말이야.”

    “난 돈 받으려 했는데 부모가 돈을 안 줬을 뿐이야. 급한 상황이니까 착수금도 안 받고 일단 나서긴 했는데, 막상 구하고 보니 부모가 줄 돈이 없다더라. 척 보기에도 돈 많은 새끼들이 그러니까 확 패버리고 싶었는데. 애새끼가 지켜보고 있어서 겨우 참았어.”

    “그 외에도 사부가 한 일 많은데?”

    “죄다 거지 같은 일뿐이었어.”

    월녀가 한숨 쉬었다.

    “사부.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때 사부한테 도움받은 사람들이 그 말 들으면 화낼걸? 그때 위안부 끌려갔던 아가씨들만 봐도······”

    허풍개가 고개를 저었다.

    “허풍개로서의 나는 의인이라 자부해도 됐어. 준수해야 할 법이라곤 일본 놈들이 강요한 거였으니까. 법을 무시하며 협행에 나서는 건 아주 떳떳하고 훌륭한 일이었지.”

    허풍개는 하소연하듯 계속 말했다.

    “하지만 무적비비탄은 아니야. 무적비비탄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는 건 어디 뒤 구린 놈들, 순 깡패 새끼들뿐이지. 얼마 전에는 한 젊은 년이 도와달라길래 도와줬어. 무림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걸 나름대로 열심히 도왔거든.”

    “그래서?”

    “결국엔 그년, 깡패 두목이 되더라고. 무적비비탄이 하는 일이 다 그래. 주변에 다 깡패뿐이니까 누굴 도와도 깡패를 돕는 거고 뭘 해도 깡패에게 이로운 일이 되는 거야.

    그중에서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일은 몇 개 안 돼. 몇몇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뒤가 구린 일이어서 수치스럽기까지 해.”

    “자꾸 자신을 비하하지 마, 사부.”

    “깡패가 자길 비하하지 않으면 누굴 비하하니?”

    “사부가 왜 깡패야?”

    “무적비비탄은 깡패가 맞아. 내 양자를 봐봐. 이풍 그 새끼, 대학물 먹이려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데. 보고 배운 게 깡패짓이다 보니 지금은 깡패들한테 상납받는 훌륭한 깡패야. 이대로면 그놈 딸내미도 깡패가 될지 모르지. 이게 누구 잘못이겠니?”

    “그만.”

    허풍개가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월녀가 가느다란 양팔로 허풍개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부는 훌륭한 사람이 맞아. 당당한 위인인 내가 보증해.”

    이때, 허풍개는 그녀의 위로를 듣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얼굴에 피가 쏠려 확 붉어진 것을 숨기느라 애썼을 뿐이다.

    며칠 전 꿈에 그녀가 나왔다는 것,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급히 속옷을 세탁해야 했다는 것은 죽어서도 밝힐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것은 곧 이 몸이 여전히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요, 번개까지 부리게 되었음에도 신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얼른, 얼른 신선이 되어야만 이놈의 지긋지긋한 아랫도리의 욕구에서도 해방될 것인데······.

    “그래서 영화 찍는 거 도우려면 당분간 바빠지겠네?”

    월녀의 말에 허풍개는 애써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 같더라. 촬영장이 저기 연변에 있다니까······ 그동안은 네 얼굴 보러 오지도 못할 거 같은데.”

    월녀가 웃었다.

    “그건 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보니, 사부?”

    “응?”

    “생일 축하해.”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