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56화 (56/103)
  • 오가장 오은림 - [4]

    허풍개의 발이 버스의 바닥에 닿았다. 자신을 보고 스무 명이 놀라는 것과 동시에 일순 느려졌던 시간의 흐름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는 상관없었다. 버스 안의 스무 놈 모두 총을 들고 있지만 이 정도의 거리에서는 총격하기 어렵지 않은가.

    그래도 총 든 놈들을 상대로 방심할 수는 없다. 거리를 좁히기 위해 더욱 가까이 달라붙었다.

    일반인들과 무림인의 반응속도는 현저한 차이가 난다. 어어, 하는 반응마저도 한 박자 늦게 뒤따랐다.

    허풍개의 오른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공기를 갈랐다. 무리의 중심에 있던 놈의 머리칼을 낚아채고는 좌우로 연달아 흔들었다. 양옆에 있던 두 놈과 그놈의 머리통이 순식간에 네 번 충돌했다.

    단 한 수로 세 명이 동시에 쓰러져서야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야!”

    맘 같아서는 양손을 모두 휘둘러 손에 잡히는 족족 쓰러뜨리고 싶은데, 왼팔이 움직이지 않는 지금은 그러기 힘들다.

    그래서 허풍개는 왼팔은 아예 뒷짐을 져버리고는 오른손만 움직였다.

    오른손에 잡힌 놈의 턱을 위로 밀쳐 그 머리가 천장에 충돌하게 하고는 덤벼오던 놈의 팔을 붙잡고 꺾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열다섯 명. 모두 뒷걸음쳐서 물러나려 했지만 그럴 공간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 파고든 허풍개는 양 떼 사이의 호랑이처럼 움직였다.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쳐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고, 손가락으로 목을 점혈해 뻣뻣하게 굳게 만들었다. 용기를 내어 주먹을 뻗어온 놈의 팔을 한 팔만으로 꺾어버렸다.

    이 상황에 놈들은 발작적으로 대응했다. 이 좁은 버스에서 도망치려는 놈, 열리지도 않는 뒷문을 열려고 애쓰는 놈까지 나왔다.

    이 와중에 한 명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총을 움켜쥐었다.

    원래 훈련되지 못한 병사는 제멋대로 사격하는 법이다.

    “씹새꺄!”

    놈은 바로 주변에 동료들이 있는데도 기어이 총을 겨누었다.

    허풍개는 무표정하게 긴장했다. 저놈이 자신을 맞힐 것 같아서가 아니라 자기 친구를 맞힐 것 같았기 때문에.

    총구를 보고 피하는 건 포기해야겠군. 본인도 제 총알이 어디로 뻗을지 알지 못할 테니.

    놈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눌렀다. 허풍개는 한 박자 먼저 팔을 움직였다.

    맨손으로 총알을 잡는 묘기가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엔 반만 성공했다. 손바닥을 파고든 총알이 끔찍하게 아팠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손바닥에 기를 집중해 잠시 출혈을 막았다. 그러고는 과시하듯 손바닥을 펼치자 총알 하나가 드러났다.

    불투명한 바이커 헬멧 너머로도 권총을 쥔 놈의 표정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공포로 인해 확장되어 있던 놈의 동공이 눈 전체를 차지할 듯 커졌다.

    허풍개는 탁, 하고 총알을 튕겼다. 놈도 두꺼운 파카와 헬멧으로 무장하고 있어 BB탄이 먹힐 것 같지 않았지만 납탄은 충분히 먹혔다.

    “이극······”

    복부에 맞았다. 놈이 무릎 꿇더니 입에서 침을 줄줄 흘렸다.

    이제 완전히 놈들의 전의가 사라지고 모두의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지만 허풍개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또 어느 머저리가 총질할지 모르니까.

    허풍개는 이런 상황이 정말로 싫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들을 패는 것도, 그리 하찮은 놈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거나 다치는 이 상황도 너무나 지겹다.

    빨리 모산파에 가든가 해야지, 이 짓거리를 계속하자니 도저히······.

    등 뒤에서 웬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돕지요!”

    아까 들어본 무림인의 목소리였다. 그는 목검 하나 들고서는 주변 놈들을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꽤 반가운 지원이었지만 허풍개는 무관심한 척 고개를 돌렸다. 한 놈의 가슴을 벽에 압박하여 숨을 못 쉬게 만들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이크를 탄 놈들이 있었지 아마?

    그놈들도 총을 들었는데 오가장 인원들은 목검만으로 놈들을 상대하고 있다. 도와줘야겠지?

    직접 보니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 정원 너머, 무너진 대문 앞에 연기를 흘리는 바이크와 그 주인들이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만하다.

    오은림은 버스가 밀어닥쳐 입구가 뚫리자 저택을 지원하는 것은 바로 포기했을 것이다. 바이커들의 진입이라도 차단하기 위해 입구를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그녀는 대문 옆 담장에 몸을 웅크려 엄폐한 채, 뒤따라 들어오려는 바이크들을 상대로 목검을 휘둘러 죄다 쓰러뜨렸을 것이다.

    결국 바이커들은 단 한 명도 정원에 들어오지 못한 데다가 그녀를 도와 입구를 지키던 오가장 사람들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정말이지 훌륭한 판단이었다. 반사신경이 월등한 고수들 사이에도 저런 상황판단력은 흔치 않다.

    그런데도 무림에서 은퇴한다고? 좀 아깝긴 하네.

    허풍개는 머리를 흔들어 문득 떠오른 생각을 머리 밖으로 쫓아냈다.

    *******

    상황이 정리된 것은 습격으로부터 불과 오 분도 안 되어 이루어진 일이었다.

    “무적무적자 만세!”

    “한국 무림의 자랑!”

    허풍개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목소리들을 흘려넘겼다. 사로잡힌 습격범들을 바라보았다. 한 무림인이 그중 한 놈의 헬멧을 벗겨보고는 기겁했다.

    “진짜 중딩이네? 미친 세상······”

    무림인들은 습격범들에게서 압수한 총기들을 한곳에 모은 뒤,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총기도 은근슬쩍 그사이에 섞었다.

    한편 오은림은 여기저기 허리를 숙이고 다니느라 바빴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하여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또한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와중에 오가장 가주 오상복은 박살나 버린 저택의 벽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성큼성큼 걷더니, 포박된 습격자들에게 다가가 그 머리통을 걷어차는 게 아닌가.

    한 번 걷어차고 끝이 아니었다. 무슨 각법 연습이라도 하듯 연달아 걷어차는데 파공음마저 울려 퍼질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무림인 하나가 말렸다.

    “그만 패요.”

    오상복이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내 집에 쳐들어온 불청객도 못 패나!”

    “그만하시라니까.”

    “왜, 비폭력주의이신가? 미성년자가 상대니까 봐줘야 한다고 그러려고?”

    그 말을 받은 것은 오은림이었다.

    “그게 아니라 경찰이 오잖아요. 구치소 밥 오래 드시려고 그러세요?”

    오상복이 그제야 폭력을 멈췄다. 자신의 손녀에게 눈을 흘겼다.

    “너 아주, 나 무시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러더니 오상복은 그녀 옆에 늘어선 오가장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의미는 명백했다. ‘니들은 이따가 보자.’ 자기 지시가 아니라 소가주의 지시대로 움직인 것에 원한을 품은 것이다.

    오가장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오은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편 방금 말씨름했던 무림인이 말했다.

    “그 정도로 화나셨음 같이 싸우지 그러셨소? 저택 안에 같이 피신하는 거 보곤 이 집 주인이 아니라 손님인 줄 알았네.”

    여기에는 반론할 여지가 없는 모양이다. 오상복은 뭐라 쏘아붙이지 못했다. 욕설을 지껄이며 그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이 못 배워처먹은 자식이······”

    오상복의 눈에는 분노뿐만 아니라 억울함도 보였다. 허풍개는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칼 들고 총에 맞서라니 그럴 자신이 없었지? 나이 먹고 그러지 못했다고 비난받으니 억울해 죽을 것 같겠고.

    일제 강점기 무림에는 그게 일상이었는데. 제대로 고생한 적 없는 애송이 같으니.

    일흔도 안 된 오상복의 나이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좋은 시절의 깡패다. 무림 문파가 지역의 노조를 조종하여 선거를 좌지우지하고, 동네 건달을 넘어 기업에 상납을 받던 시절의 깡패.

    오상복은 자기네 구역에서 산적들이 도발한답시고 사람들을 보내 노래방에서 총격전을 벌이게 만든 바가 있다. 그 무대뽀 정신은 과감함이 아니라 옛 시절 막 나가던 버릇에서 나왔을 것이다.

    오은림이 애원했다.

    “손님이랑 싸우지 마세요, 제발.”

    그마저도 지금 상황에는 따지는 것으로 여겨진 걸까. 오상복은 부릅뜬 눈으로 중얼거렸다.

    “은혜를 몰라, 이년이. 애비가 가정교육을 안 시켜서 그런가?”

    오은림이 눈을 크게 떴다. 오상복이 계속 말했다.

    “한량 똥쟁이 밑에서 태어난 년을 그래도 약빨 잘 먹힌다고 소가주 앉혀줬더니.”

    오은림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눈에서 드러난 것은 눈물이 아니라 분노였다. 그녀가 말했다.

    “곧 경찰이 올 거예요.”

    “그래서 뭐!”

    “그 전에 하던 거나 마저 하지요. 칼 들어요, 가주님.”

    “뭐?”

    “칼 들어요. 누가 센지 사람들 앞에 보이자고요.”

    그제야 오상복은 습격이 있기 전 허풍개가 한 제안을 떠올렸다.

    모두가 자신을 욕보이는 이 상황에는 승리하여 체면을 차릴 필요가 있다고 여긴 걸까. 아니면 순수하게 손녀를 두들겨 패고 싶었던 걸까.

    오상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 가져와.”

    경찰이 올 상황에 진검을 쓸 수는 없었다. 목검을 쥔 둘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각자 든 삐죽한 칼날을 앞세운 채로.

    일제 강점기, 무공이 독립운동의 수단이던 시절 오가장은 점창파 검객에게서 무공을 배워 익혔다. 그 무공으로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보다 확실한 것은 오가장이 명문 정파의 무공을 전수받은 이래 그 가르침을 훌륭히 갈고 닦았단 것이다.

    찌르기를 중시하는 검과 기하학적인 자세 및 초식들, 사일검법(射日劍法)은 펜싱을 닮았다.

    넓은 정원을 대결장 삼아 서로의 칼이 부딪쳤다. 부딪치고 흘리고 찔렀다.

    같은 검술로 펼치는 그 대결은 언뜻 비등해 보였지만 연신 뒷걸음질 치는 것은 오상복이었다.

    펜싱에서 후퇴는 거리 조절을 위해 필수지만, 너무 많은 거리를 후퇴하면 패배로 친다. 무림 검객끼리의 대결에서도 그렇다.

    한 발짝 더 물러난 오상복의 등이 담장에 닿았다. 더는 물러날 거리가 없다. 오상복이 그제야 발악하듯 공격의 템포를 빠르게 했지만 오은림의 눈은 차가웠다.

    수평으로 빠르게 움직인 그녀의 칼날이 오상복을 공격을 걷어냈다.

    손가락 조작만으로 그 칼끝은 바로 오상복의 목을 노리더니 방금 방어 동작은 즉시 찌르기로 전환되었다.

    그녀의 칼끝이 오상복의 목젖에 닿았다. 목검이므로 찌른들 죽지는 않겠지만, 오은림은 금방이라도 찔러버릴 듯 움직이지 못하게 위협하면서 모두에게 선언했다.

    “내가 이겼어요.”

    오상복은 뒤늦게 패배를 받아들였다. 조금 뜸 들이고는 최후의 자존심을 담아 외쳤다.

    “그래, 그리 은퇴하고 싶으면 해라! 더는 여기에 낯짝 비추지 말고!”

    “내가 왜요?”

    오은림이 여기 모인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무림 동도 여러분. 기껏 초대해놓고서 말을 번복하니 심히 죄송스럽지만······ 금분세수는 취소입니다.”

    저건 또 뭔 소리인가. 허풍개는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은림이 계속 선언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오가장주 오상복을 꺾었습니다. 그로써 제 자격을 증명했으니 이제 제가 가주입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인정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가 말한 자격은 아마 승리자의 자격이겠지만,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그녀의 다른 자격을 인정했다.

    가장 암울한 상황에 무리를 이끌어야 할 가주의 자격 말이다. 이미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게 해 무림 전체의 위기를 자초했던 오상복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맨 먼저 한 남자가 소리쳤다.

    “오가장주 오은림!”

    허풍개는 그 얼굴을 보았다. 김성진, 이도혁 친구 정진영의 형님이랬나?

    그 동생 정진영도 외쳤다.

    “오가장주 오은림!”

    생각해보면 비무 한번 이겼다고 가주직을 승계받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 이런 일을 인정해줬다간 괴상한 선례가 남을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분위기에 취해서, 혹은 오늘 식장에서 내내 모두를 짜증나게 했던 오상복을 욕보이기 위해서 무림인들은 다 함께 소리쳤다.

    “오가장주 오은림!”

    끝내 오가장의 사람들마저 그녀를 지지하여 외치자 오상복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경찰이 다다르기 전에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지지하지요.”

    허풍개와 오은림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오은림이 고개를 숙였다.

    허풍개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개운해 보이는 동시에 슬퍼 보였다.

    그녀의 심정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결정을 번복하는 것부터 예상 밖 아닌가.

    그러나 오늘 가주가 벌인 추태가 그녀에게 가문의 일원으로서 민망함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떠난 뒤에 성난 가주가 남겨진 오가장 사람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의 맘을 움직였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K22

    “모두 손 들어!”

    경찰에 연행되는 와중에도 오상복은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충격을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의 귀에 대고 오은림이 속삭였다.

    “그래서 할아버지, 내력은 언제 전수해줄래요? 며칠은 구치소에서 조사받느라 바쁠 테니까 이 주 후면 적당할 것 같은데, 괜찮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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