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장 오은림 - [3]
라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못 올 데 왔나요?”
“그건 모르겠고. 여긴 거의 망했다가 겨우 살아나서 정복할 가치도 없는 곳 아닙니까. 왜 굳이 오셨나.”
“망할 줄 알았던 곳이 다시 살아나니까 왔죠!”
“기어이 짓밟으시려고?”
“아뇨, 그건 아니고! 지금도 경찰 피해 다니느라 피곤한데 아예 습격까지 벌여서 경찰들 미쳐 날뛰게 할 순 없죠. 그냥 문파 상태만 보러 왔어요.”
“아직 가문에 위세가 남았나, 정말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런 거 말입니까?”
“예!”
“그래서 어때 보입니까.”
“상태 엄청 좋아 보이네요? 언제나 망할 뻔했나 싶을 만큼요.”
허풍개는 여기 모인 손님들과 그들 앞에 대령 된 스시며 스테이크를 보았다. 그 뒤에는 뷔페 음식까지 호화롭게 차려져 있었다.
확실히 오가장은 아직 여력이 있어 보였다. 그때 자신에게 고작 그 정도만 보상했다는 것이 화가 날 정도로.
이번에는 라나가 한숨 쉬었다.
“대낮에 총질까지 하고도 가문의 대빵이 감옥에 안 가다뇨? 이건 좀 예상 밖이에요. 박 회장님이 무림 세력이 자기네끼리 자멸하게 하자고 말씀하실 때는 저도 잘 될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힘들 것 같아서 우울해져요.”
“그래서, 천재 마법사께서 직접 다 때려 부술 생각은 딱히 없고. 당신이랑 손잡은 박 회장이 하려는 짓도 끝내 실패한다면, 어쩔 겁니까?”
허풍개의 물음에 라나가 대답했다.
“그럼 뭐, 포기하고 여기 떠야죠?”
“그렇게 쉽게 말입니까?”
“여기에 들인 건 제 시간뿐인걸요. 백련교에서 사람들도 안 데려왔고 따로 자본도 들이지 않았으니까 잃은 게 별로 없어요. 공들인 게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이건 사업이에요. 매몰 비용은 버려야죠.”
“그러려고 부하 안 데리고 온 겁니까?”
그 물음에 라나가 웃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어도 혼자서 정복할 거예요. 부하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요. 천마니까.”
“혼자 정복한다라. 지금 정말 제가 소리 질러서 여기 모인 무림인들 다 달려들게 만들면, 그래도 혼자 감당할 자신 있습니까?”
또다시 자신감 넘치는 웃음.
“자신 있다면요?”
그리고 허풍개가 덤덤하게 말했다.
“뭘 어쩌겠습니까. 그쪽이 한국을 점령하든 말든.”
“잘 생각했어요! 그래서, 백련교 입교할 생각은 없고요?”
“없습니다. 이미 모산파에 스카우트 받은 마당이라.”
“손나!”
라나는 실망한 척했지만 딱히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기야 백련교는 중원을 정복한 상황 아닌가. 분명 모산파에도 백련교의 영향력이 거대할 것이다. 이번에 모산파에 큰돈을 투자한 박 회장부터가 그녀와 동맹이니 확실한 일이다.
결국 모산파에 들어가는 것도 백련교의 영향에 놓이는 일이긴 한데, 그 정도야 뭐. 아예 백련교에 들어가 종파를 갈아치울 맘은 없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
자신이 떠난 한국 무림을 녹림이 차지하든 마교가 차지하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닐 테고.
“그 머리칼 색은 어찌 된 겁니까. 원래 머리가 길었으니 가발을 쓰긴 어려웠을 텐데.”
“포리모ー후 주문이에요!”
“그건 또 뭔 무공입니까.”
“한국말로는 염색이라고도 해요! 머리 감으면 원래 색으로 돌아와요!”
기다란 흑발을 찰랑이며, 얼굴마저 동양인의 것과 비슷해진 라나는 어디 무림 문파의 소녀로만 보였다.
대화를 마친 그녀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뷔페 음식을 담으러 떠났다.
허풍개는 그녀를 더 신경 쓰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
행사가 재개된 것은 한 시간 후였다.
행사에 참여한 손님들은 차라리 식사 시간이 쭉 이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금분세수는 여전히 지지부진했고 오상복의 대야 타령은 끝나지를 않았다.
“그놈의 대야, 차라리 내가 사올까요?”
참다못한 손님 하나가 말했더니, 오상복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손님이 움찔하여 입 다문 가운데 다시 좌중에는 지겨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허풍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 이럴 겁니까.”
허풍개의 말에 오상복이 대답했다.
“물론 여기 모신 손님들께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 다른 일이 있으신 분은 자리를 비워주셔도······”
“길게 말하지 말고. 짧게 확실히 말해요. 손녀분 은퇴를 받아들일 겁니까, 안 받아들이고 쭉 깽판 칠 겁니까?”
오상복은 얼마 전에 허풍개에게 큰 빚을 진 한 마당이었다. 그럼에도 애써 뻔뻔하게 따지고 들었다.
“아무리 보증을 서셨다 하신들, 집안일에 이 정도로 간섭하시는 건 좀 무례한 일 아닙니까?”
“조용히 하고 들어요. 어딜 어른이 말씀하는데 끼어듭니까.”
“어른?”
“무림의 배분으로 따지면 여기서 제가 가장 어른 아닙니까. 어른으로서 중재에 나서지요.”
오상복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무림의 족보를 계산해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눈앞의 젊은이는 아버지 배분 아닌가.
허풍개가 말했다.
“집안일이니 끼어들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게 관습이니까.”
“대협께서 보시기엔 말도 안 되는 일 같습니까?”
“우스운 일이지요. 우리 사파 깡패 놈들이 법도 도덕도 다 무시하며 살지만 관습만은 준수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선택적인 규칙 준수입니까?”
“무림에는 무림의 법이 있는 겁니다. 이놈의 한국이 들어서기 전에도 우린 이 법을 지키며 살았어요! 대협께선 젊어서 모르겠지만······”
“무림의 법도는 저도 압니다. 그러니 더 오래되고 존중받아야 할 관습을 소개해드리고 싶은데.”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허풍개가 말을 이었다.
“강자존(强者尊). 센 놈이 법입니다.”
“뭐?”
“뜨자고. 칼 들고 와요. 진검이든 목검이든 상관없으니 당장.”
오상복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노 탓일 수도, 긴장 탓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허풍개가 계속 말했다.
“저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를 이기신들 별로 명예로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보증인으로서 제가 감히 발을 뺄 수 있겠습니까? 한 판 붙어서 때려눕힌 다음 쫓아내시고서 집안일 마음껏 하시지요.”
오상복은 절세고수와 한 판 붙는 상황을 피하려고 애썼다.
“어깨 부상이 아직 낫지 않으셨는데, 설령 제가 이긴들 수치스러울 뿐인 게······.”
“저와 붙는 게 꺼리신다면 다른 선택도 있죠.”
“그건 또 뭡니까.”
“손녀분과 한 판 겨루십시오. 어르신이 이기면 가주로서 호되게 혼쭐내는 셈이고, 손녀분이 이기면 패자로서 승복하시면 됩니다. 어떻습니까?”
단순히 몸값으로 치면 오상복보다는 오은림이 더욱 고수다.
그러나 오상복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오은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허풍개는 생각했다.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나? 아니면 절세고수와 붙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한 걸까?
허풍개는 오은림을 보았다. 그리고 아마 제 가주와 겨룬다면 승산이 높을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졌음을, 그녀의 얼굴에 별로 투지가 없음을 깨닫고 낭패감을 느꼈다.
그녀의 생각을 짐작할 만하다. 가문을 나가기 전에 자기 내력을 남 주어서라도 가문의 빚을 감당하려던 그녀 아닌가. 가문에 여전히 책임감이 있는 그녀로선 나가기 전에 가주의 체면을 부수는 일이 꺼려지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내가 실수했나?
아니, 아니다. 누구보다 오래 살고 싶단 놈이 사지에 뛰어들며 목숨을 도박판에 내던지지는 이유가 뭔가.
평온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천상에 닿게 해줄 공덕과 영원한 수명은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걸 얻기 위해 온갖 모순을 감당하는 것 아닌가.
그녀 또한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저는······”
그녀의 입이 열리고는 뭔가 말하려던 차였다.
대문이 벌컥 열렸다. 거기서 뛰쳐 들어온 한 남자가 외쳤다.
“모두, 모두 몸을 피하십시오!”
“뭐?”
“습격입니다!”
*******
깡패들의 회동에 습격이 닥쳐오는 일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미리 곳곳에 보초까지 세워둔 마당 아닌가.
그래서 이번 습격 소식은 당황스럽기보다는 황당했다.
“혹시 짭새들이 쳐들어오는 거요?”
웬 무림인의 질문에 남자가 대답했다.
“경찰이 아닙니다!”
“그럼 녹림? 경찰이 주변에 깔렸는데 뭔 수로? ”
“녹림도 아닙니다! 정확히 단체명은 없는, 굳이 말하자면 갱단······.”
“갱단?”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빨랐다.
거센 배기음이 울려 퍼졌다.
소리가 들린 쪽은 고개를 돌린 무림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담장 밖에 늘어선 한 무리의 바이커들이 보였다.
놈들은 이 저택을 포위하듯 바이크를 멈춰 세웠다.
확실히 갱단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스무 명의 무리였다. 다들 바이크 헬멧을 쓰고 있어서 그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체구로 볼 때는 그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설마 중고딩들인가?”
“예?”
“왜, 요새 유명한 그놈들 있잖습니까. 그놈들 아닌가 싶은데······”
아직 남아있던 무림인들 사이의 여유는 곧바로 사라졌다.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바이크에 탄 웬 놈이 장난치듯 총을 몇 발 갈긴 것이다.
다행히 맞은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기겁했다. 모두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겨야 했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오상복이 말했다.
“그나마 인천 무림 동도들께서 함께해주시어 다행입니다. 이 늙은이가 참 든든하기 그지없군요.”
“그러다 다쳐서 몸값 깎이면 보상은 해주시겠지요?”
“보상이야 물론 해드리지요······”
오은림은 그 대화를 들으며 눈을 크게 떴다.
절세고수에게 무리한 도움을 요청해놓고서도 그에 대한 보상은 흐지부지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그래놓고 다른 고수에게 보상을 약속한다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가문의 수치다.
한편 가주의 부탁에 응해, 무림인들이 하나둘씩 품에서 권총 한 자루씩 꺼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총격전이 벌어지고 몇 명 죽어 나갈 판이다.
보다 못한 허풍개가 외쳤다.
“다들 총 집어넣어요.”
“예?”
“총 집어넣으라고! 깡패 새끼들이 애새끼들 쏴 죽이면 짭새들이 정당방위라고 칭찬해줄 것 같나!”
“뭘 걱정하시는진 알겠는데, 저희가 대협처럼 절세고수도 아니잖습니까? 총 든 놈들 상대로 냉병기 들고 싸울 수는······”
“자신 없으면 저기 저택에 들어가!”
그리고 오은림이 거들었다.
“대협 말씀이 맞아요. 다 들어가세요.”
“예?”
“오가장은 손님한테 지켜달라고 싸우라 부탁하지 않아요. 다 들어가!”
자신의 말이 무시당한 상황에 오상복이 눈을 부라렸다. 그는 손녀의 머리칼이라도 쥐려는지 다가오다 멈칫했다.
그 앞을 허풍개가 가로막았다.
덕분에 오은림과 무림인들이 계속 말을 섞을 수 있었다.
“저택에서 농성해야겠다면, 아가씨도 같이 들어가시죠.”
“다 들어가면 안 되죠. 불이라도 붙으면 다 같이 뛰쳐나오려다 집중포화 맞게 되잖아요? 가뜩이나 목재건물이라 화염병 하나 던지면 큰일인데요. 몇몇은 저택 밖에서 시간을 끌어줘야 안전해요.”
그건 또 옳은 말이다.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줘야 할 테고.
허풍개는 느슨하게 자세를 잡고 날아올 총알에 대비하려 했다. 그때 오은림이 이쪽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대협께서도 들어가세요.”
“총알에 대응하려면 저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텐데요.”
“어서요. 더 수치를 주지 마시고.”
허풍개는 조금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경찰이 올 것이다. 담장에 의지해서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일이다. 정 누가 죽어 나갈 것 같으면 그때 끼어들면 될 일이리라.
허풍개가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체면 탓에 눈치를 살피던 다른 무림인들도 그 뒤를 따랐다. 다들 저택에서 가구 하나씩 끌고 와 총알을 막아줄 방패를 마련했다.
그들의 뒤를 오은림과 그녀가 이끄는 오가장의 무사들이 지키고 섰다.
그 서른 명을 제외한 무림인들은 모두 저택에 들어왔다.
20세기풍 한옥이라, 창호에는 창호지가 아니라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덕분에 저택에 처박힌 무림인들은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기겁했다.
“저거?”
바이크들이 비켜섰다. 그들이 물러난 자리로 한 거대한 차량이 질주해왔다.
대체 어디서 훔쳐 왔나 싶은 버스였다.
우지끈 하고, 버스가 대문에 충돌했다. 그러나 그 속도는 별로 느려지지 않았다.
대문을 부순 버스는 그대로 달려왔다.
버스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여기저기 놓여있던 탁자와 그 위의 음식들이 지저분하게 공중을 날았다.
“들어가!” “달려!”
바이크에 탄 습격자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시간을 끌겠다고 정원에 나가 있던 오은림과 오가장의 일원들은 이 상황에 뭘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황급히 버스를 피했다.
버스는 저택을 향해 질주해오고 있었다. 나무로 된 저택이었다. 당연히도 벽은 충돌에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모두 피해!”
허풍개가 외치자 모두 양옆으로 흩어졌지만, 정작 허풍개는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허풍개는 이쪽으로 돌격해오는 버스를 노려보았다.
기어이 버스가 저택을 들이받았다.
굉음이 울렸다. 나무와 톱밥이 흩날리는 가운데 버스가 저택에 반쯤 꽂혔다. 그제야 버스가 멈췄다.
바로 그 앞에서, 허풍개는 앞 좌석에 탄 놈을 노려보았다.
여름임에도 두꺼운 파카와 바이커 헬멧으로 온몸을 가린 그놈은, 이쪽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몰라도 저번에 본 녹림도가 쓴 것과 똑같은 단기관총이었다.
허풍개는 이를 악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총이 두렵기는 똑같다. 하물며 한쪽 어깨가 잘 움직이지 않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깨진 유리창으로 빠져나온 총구가 불을 뿜었다.
당연히도 그 총알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허풍개의 이미 다친 왼쪽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양옆에서 지켜보던 무림인들이 비명 질렀다.
“맞았―”
그러나 첫발은 절세고수의 몸을 꿰뚫었지만 뒤따라온 총알들은 그러지 못했다.
다음 순간, 무림인들은 보았다.
총에 맞은 허풍개가 갑자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더니,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의 여러 곳에서 불똥이 튀겼다. 불똥이 튀긴 허공마다 총알들이 떨어져 내렸다. 총알이 무력화된 그 틈에 허풍개가 깨진 유리창으로 뛰어들었다.
이 모든 것이 한 호흡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모두 잠시 숨도 쉬지 못했다. 대체 뭘 했는지 몰라도 저게 말이 되나.
“정말 혼자 싸워도 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