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54화 (54/103)
  • 오가장 오은림 - [2]

    정진영은 인천 무림인이다. 무공다운 무공이라곤 쓰지도 못하고 영약 한 알 입에 담아본 적 없는 몸이지만 스스로는 그리 생각했다.

    어쨌건 형님으로 모시는 남자는 고수 아닌가. 고수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 자신도 언젠가 고수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러니 미리 무림인을 자처해도 된다.

    그리고 인천 무림인이 인천 무림의 행사에 빠질 수는 없다. 오가장의 소가주가 은퇴를 선언하기로 한 오늘, 정진영이 형님과 함께 오가장의 행사에 참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째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은 오지 않았지만, 아직 이름을 떨친 적이 없으니 억울해도 어쩔 수 있나?

    정진영은 오가장의 대궐 같은 한옥을 보았다.

    얼마 전에 망할 뻔했다지만 부자는 삼 년을 간다던가? 여전히 오가장의 정원에는 요리사며 온갖 사용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네들 월급 줄 돈은 있는 모양이지.

    나도 언젠가는······.

    금분세수식은 오가장의 정원에서 열리고 있었다. 온갖 수석들이 깔린 정원의 중심에서 오가장 소가주가 입을 열었다.

    “다망하신 와중에도 여기 모여주신 무림 동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저 오은림은, 오가장의 소가주이자 인천 무림의 일원이었던 이로서, 이 자리를 빌어······”

    오은림의 앞 탁자에는 강철 대야가 올려져 있었다. 대야 안에 가득 찬 모래알들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정진영이 물었다.

    “진짜 금가루일까요?”

    형님, 김성진이 대답했다.

    “설마. 오가장 망할 뻔한 게 얼마 전인데? 그냥 모래를 금색 물에 담갔다 뺀 거겠지 뭐.”

    그 대야에 오은림이 손을 넣어서 씻으면, 그리고 여기 모인 무림인들이 그것을 보면 금분세수식은 끝이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대야에 갖다 대기도 전에 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만에 가득 찬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 대야, 왜 니 멋대로 사용해?”

    사람들이 보았더니 오가장 가주였다.

    오상복. 나이가 지긋한 그 노인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손녀를 향해 호통쳤다.

    “그거 내가 젊었을 적에 선물 받은 물건이야. 그걸 누구 허락받고 맘대로 쓰냐구?”

    오은림은 제 할아버지를 바라보더니 공손히 대답했다.

    “몰랐어요. 창고에 박혀있어서.”

    “애지중지해서 닳을까 봐 모셔둔 건데?”

    “죄송해요. 다른 대야 쓸게요.”

    오상복이 제 손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세숫대야라도 가져오진 않기를 바란다. 장난치듯 행사 치르는 건 여기 모인 무림 동도께 큰 실례가 아니겠니? 은퇴하는 건 자유지만 나가면서 그따위로 우리 가문에 먹칠하는 건 용납 못 해. 식 치를 거면 제대로 치러라.”

    오은림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가운데 오상복만 혼자 계속 말했다.

    “뭐하니? 얼른 애들 시켜서 대야 사 오게 하지 않고.”

    오은림은 가문의 꼬붕 중 누군가에게 지시하려 하진 않았다. 지금 그녀의 명령을 들었다간 그녀가 나간 뒤에 가문에서 무슨 꼴을 당할 것인가.

    오상복은 부릅뜬 눈으로 지금 움직이는 가문 사람이나 꼬붕이 하나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네가 직접 사올래? 여기 모인 분들은 그때까지 쭉 앉아서는 손님 모셔놓고 대체 언제 돌아오나 기다리셔야겠지만 뭐, 이제 무림 나가실 분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나······”

    오상복이 노골적으로 이번 금분세수를 방해하는 가운데,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누구 편을 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가장 가주가 돌아온 마당이니 기어이 오가장의 영업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 세가 확연히 줄겠지만 어쨌건 인천 무림의 이웃인 건 분명한 일이다.

    같은 무림맹 소속끼리 전쟁할 게 아니고서야 앞으로도 같이 협조하며 일해야 할 텐데 가주의 뜻을 무시할 수가 있나?

    하지만 이 은퇴를 무적무적자가 보증했다던데? 오가장 가주를 존중하겠다고 절세고수를 무시할 수야 있나?

    그 친구 육 개월 뒤에 모산파 간다니까 눈치 볼 필요 없는 것 아니냐.

    아니다. 앞으로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고, 무림맹에서 협상 잘 하면 남게 할 수도 있다. 애초에 오가장은 힘 다 빠졌는데 굳이 굽혀줄 필요가 있느냐.

    그래도 그동안 오가장 가주랑 잘해왔는데 어찌······.

    무림인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던 와중이었다.

    오가장의 대문 쪽에서, 자그마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미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 착석한 마당인데 누가 지각이라도 했나?

    사람들은 지각생이 누구인지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는, 한참 대화하던 것도 잊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

    “정말 왔네······.”

    무림에 인맥이라곤 없는 정진영도 저 남자를 알아보았다. TV에서 봤기 때문이다.

    허풍개 의사의 사손, 무적비비탄의 제자.

    무적무적자가 여기 왔다. 한국에 넷뿐인 절세고수이자 요새는 허풍개 의사만큼이나 유명해진 고수다.

    정진영은 저번에 이풍의 사무소에 갔을 때 고수인 형님이 왜 그리 고개를 숙여대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에는 불만까지 품었는데, 요새 TV를 보고는 왜 그래야 했는지 이해했다. 무공에 조예라곤 없는 일반인들조차 그 위대함을 알 수밖에 없는 고수 아닌가······.

    무적무적자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정진영의 시선이 그 뒤를 따랐다. 그와 함께 여기 모인 다른 무림인들의 시선도.

    모두가 자신을 지켜보는 가운데, 무적무적자는 비어있는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

    오가장 가주 오상복은 여기 무적무적자가 왔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그렇다고 그 앞에서 손녀를 꾸중할 배짱은 없었다.

    “손님들을 모셔놓고 손녀하고만 말 섞을 순 없지요. 다들 식사는 하고들 오셨습니까? 안 하고 오셨다면 그것참 다행이겠는데요.”

    오상복의 손짓에 사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여기 모인 손님들의 앞에 음식과 술을 나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이 행사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자기 앞에 놓인 음식들을 손님들이 본체만체하자 오상복의 표정은 굳었다.

    무적무적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모인 손님들은 여전히 그 거동을 살피기 바빴다.

    결국 참지 못한 오상복이 무적무적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희 대접이 맘에 안 드시는지요?”

    허풍개가 대답했다.

    “실례인 건 알지만 제가 벽곡을 해서. 속세의 음식을 입에 담을 수 없는 몸이니 부디 양해해주십사 합니다.”

    오상복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세고수씩이나 돼서 저 정도로 예를 차리는데 뭔가 트집을 잡기는 어렵다.

    그리고 뭔가 더 말하려던 차, 그 손녀가 선수를 쳤다.

    “양해는요?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 제대로 대접해드리지 못하니 저희가 오히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부족하나마 차라도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오은림의 제안에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저 거절하면 예가 아닌 것 같군요.”

    오은림이 허풍개를 사랑채로 안내했다. 허풍개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굳게 닫힌 사랑채에 들어와서야 오은림의 자세가 변했다. 그녀는 쇼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물었다.

    “여기 왜 오셨어요?”

    “올 줄 몰랐습니까.”

    “오시면 안 됐지요. 주변에 경찰이 쫙 깔린 거 모르세요? 누가 누가 무림인인지 파악하려고 길목마다 사복 경찰들이 매복했는데, TV에도 나오신 분이······”

    “압니다. 그네들 시선 피해서 여기 왔으니 괜찮고요.”

    “시선을 감지하실 수도 있나요?”

    허풍개는 일제 강점기 순사들의 시선을 피해 다닌 건 물론 도쿄의 저택에 잠입한 적도 있는 자신의 경력을 내세우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저 왜 안 불렀습니까.”

    오은림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요. 이미 잔뜩 끼쳤으니까요.”

    “그래도 부르셔야 했습니다. 이건 체면 문제입니다.”

    “체면이요?”

    “제 보증이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하는 상황이던데요. 이대로면 제 체면이 상하지 않습니까. 정말 무시당했다간 갚아주어서라도 체면을 복구할 의무가 생길 텐데 난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귀찮아지기 전에 여기서 상황을 정리하고 싶군요.”

    “그래도······”

    여전히 오은림이 그 도움을 거부하는 기색이자 허풍개가 말했다.

    “내가 저번에 다 집어치우고 산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죠.”

    “그러셨던 것 같네요. 저 위로하시려고······”

    “위로하거나 공감해주려고 한 말 아닙니다. 그거 진짜 내 소망이에요.”

    “정말요?”

    “예. 평온하게 산속에서 홀로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래오래, 가능하면 영원히 그럴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오은림이 지적했다.

    “그리 소박한 게 꿈이신 것치곤 온갖 위험한 일에 끼시던데요? 총구 앞에 몸을 가로막으시고, 총격전에 끼어드시고, 그래서 자주 다치시고요. 지금도 저번 부상이 낫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요.”

    허풍개는 한숨 쉬었다.

    “그게 문제죠. 평온하게 살고 싶은 놈이 온갖 험한 일에 끼어야 하는 것 말입니다. 누구보다 오래 살고 싶은 놈이 가장 위험한 일에 목숨을 들이밀어야 하는 것도 모순이겠고. 그러고도 아직 평온을 얻지 못했으니 참 못났지요.”

    거기까지 말하고는 어색하게나마 씩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른 분을 통해서라도 대리만족하고 싶군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오은림도 더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둘이서 함께 자리에 돌아왔다.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허풍개에게 쏠린 가운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구요?”

    “저, 도혁이 친굽니다. 저번에 사무소에 인사드리러 갔는데 못 뵈어서······”

    허풍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반갑습니다.”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더니 정진영은 눈을 크게 떴다.

    허풍개가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정진영은 기절할 듯 기뻐하며 어쩔 줄 모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이분은 제 형님인데. 이분도 인사드리고 싶어 해서, 괜찮으시면······”

    그 뒤에 선 남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김성진이 고개를 숙였다.

    “김성진입니다······.”

    허풍개가 안절부절못하던 그 손도 붙잡고 악수해줬더니, 김성진의 얼굴에도 희열이 가득 찼다.

    방금 순수하게 감동한 듯한 제 의동생과는 다른 종류의 기쁨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허풍개는 무심한 척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다들 무림을 넘어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절세고수가 얼굴 모를 무명소졸들과 인사하는 걸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나중에는 누구냐고 말 붙여볼지도 모를 일이다.

    이걸 노리고 일부러 다가온 걸까? 뭐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육 개월 뒤에 떠날 텐데 하수 놈들이 절세고수와의 친분을 과시하든 말든.

    한편 오은림은 비로소 여기 모인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기, 오은림 아가씨?”

    “예, 말씀하세요.”

    무적무적자가 노골적으로 편들어주는 마당이기 때문일까? 몇몇 무림인들은 그제야 오은림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두 하수가 떠나간 뒤에는 허풍개 혼자 구석 자리에 남겨졌다. 여전히 시선이 여기 집중된 마당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허풍개에게 다른 무림인들도 말을 걸러 올 것이었다. 그건 또 귀찮은 일이다.

    허풍개는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할 겸 수련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감긴 눈에 사람들의 기(氣)가 보였다.

    ********

    당장 사람들의 몸에 보이는 기는 상당했다. 그야 무림인들이 모인 장소 아닌가.

    그러나 여기 모인 고수들의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는 기가 하나 보였다.

    참으로 정순하면서도 막대한 기였다. 얼마 전에 본 월녀의 것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기. 여기 모인 다른 고수들의 기를 일반인의 수준으로 보이게 만들 만치 태양처럼 빛나는 기.

    허풍개는 모른 체하려다가 결국 참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섰다.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재 마법사님.”

    새까만 생머리의 소녀가 눈을 깜박였다.

    “엥, 그게 누구예요?”

    허풍개는 자칭 천마를 바라보았다. 발뺌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그 여자랑 상관없다면, 여기 천마 있다고 소리 질러도 됩니까.”

    “그건, 야메로!”

    정말 당황했다기보다는 당황한 척 과장하는 것 같았다. 허풍개는 한숨 쉬었다.

    “폴란드계 미국인이라면서 왜 자꾸 왜어를 씁니까.”

    “그거 일본어 아닌데요? 폴란드말이에요!”

    “또 헛소리를.”

    “오빠 폴란드인이에요?”

    “아뇨.”

    “그런데 왜 폴란드계보다 폴란드말 잘 아는 척해요? 폴란드계가 폴란드말이라 하면 그런 줄 알아야죠!”

    허풍개는 또 한 번 한숨 쉬며 물었다.

    “그래서, 여긴 왜 왔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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