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장 오은림 - [1]
“정신 좀 맑니.”
“이 정도면 맑아. 사부 봐서 그런가?”
“그러니까 진작 병원 오라니까, 기지배야. 옛날부터 왜 그리 말을 안 들어처먹어.”
“병원 덕 아니야. 여기서 주는 약 먹으면 머리 뿌예지기만 하는데.”
“그러고 보니 우울증약도 처방받았지. 그거 먹음 정신 몽롱해질 만도 하겠다. 그럼 지금 대화하기도 힘드니?”
“몽롱해도 기억할 건 다 기억하니까 괜찮아. 그래서 말인데, 사부?”
“말해.”
“그때 사랑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나?”
“내가 그랬나?”
“그랬어.”
“그랬던 것도 같네.”
“정말?”
“스승으로서.”
“그런 의미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내가 백이십 살 처먹고 백 년 만에 사랑 고백이라도 하리?”
“못 할 게 뭐 있나?”
“기지배가, 스승이나 놀려먹고······ 그래서 사인검은 잘 치워놨어?”
“응. 고궁박물관에 기증했어. 도난 방지할 겸 엄중히 관리할 거래. 박물관 자체가 워낙 멀리 있고. 나 정신 못 차리는 사이에 멋대로 날아와서 사람 찔러댈 일은 더 없을걸.”
“그건 다행이네.”
다행이라 말하면서도 허풍개는 씁쓸함을 느꼈다.
왼손에 쥘 권총 한 자루에 오른손에 들 환도 한 자루, 거기에 조종할 사인검 한 자루만 있으면 월녀는 천하제일인이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고금제일인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무기가 이제는 박물관에 처박힐 신세라니?
월녀가 물었다.
“그런데 사부, 모산파 간다고?”
“어.”
“언제?”
“반년 뒤에.”
“반년이라.”
“혹시······, 같이 안 갈래?”
“같이?”
“응. 이상한 뜻은 아니고. 너도 모산파 무공 익혔으니까······”
“됐어.”
“못된 년, 주저도 없이 대답하네.”
“사부는 참, 아무리 애국심이 없어도 그렇지. 어딜 감히 한국의 영웅을 이국땅에서 여생 마치게 하려고 그래?”
“그래서, 반년 뒤부턴 못 보는데 괜찮고?”
“괜찮아. 아, 이마저 딱 잘라 대답했다고 너무 섭섭해진 말고. 어차피 반년 뒤엔 나도 여기 없을 거라서 그래.”
“여기 없다니?”
“나 오래 못 살아.”
“의사가 그래?”
“아니. 느끼는 바에 따르면 그래.”
“야, 이년아. 의사 면허도 없는 년이 자꾸 자기 진단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몸 상태가 그리 안 좋으면 검진 더 자세히 받아보라니까?”
“몸 상태와는 상관없어. 그냥, 느낄 수 있어.”
“자꾸 불길한 소리 말고······”
“어차피 곧 떠날 생각이었어. 이번엔 그게 미뤄진 거지. 그게 다야.”
“야!”
“너무 화내지 말고, 사부. 우리 나이쯤 되면 똥 싸다 죽어도 호상이야.”
“그럼 난 이번에 헛짓거리 한 거니?”
“사부.”
“내가 그놈의 고아한 시해를 망친 거야? 그냥 너 거기서 비쩍 말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서 아주 눈치 없게 군 거니?”
“아니. 칼이 이놈 저놈 찔러대지 못하게 막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 죽겠지. 그리고······”
“그리고, 뭐?”
“즐거웠어. 사부가 나 구하러 오는 거 보니 젊을 때로 돌아간 거 같아서 좋더라.”
“기지배가······.”
“확실히, 사부 보니까 좋아.”
“자꾸 뭐래, 낯간지럽게.”
하아린이 웃었다. 그녀는 정말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스무 살 그때와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때까진 자주 찾아올 거지?”
허풍개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겨우 대답했다.
“노력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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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성은 목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어이구, 그놈 독하네. 지 스승처럼 맨손이라 얕봤는데 살을 내주고 목을 노려오네? 어린놈이 아주 무서워죽겠어······.”
주변에 늘어선 녹림도들은 총채주의 한탄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가운데 구자성만 계속 말했다.
“애들 싸움이면 내가 이겼다고 치는 건데. 그놈은 피 났고 난 목만 붓고 끝났으니까. 정말 그리 주장하면 늙은 놈이 나잇값 못하는 소리 한다고 욕먹겠지?”
기어이 한 녹림도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만월산채 채주 김용성이었다. 그는 전국에 수배된 몸이었지만 저번 싸움에 참여했다. 방송국의 카메라가 멀쩡히 돌아가는 마당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죄송해? 뭐가?”
“그때 저희가 도끼로 그놈 찍어버렸으면 되는 건데요. 그러질 않고 벌벌 떨며 구경만 했으니······”
“김용성 이 친구야. 절세고수 둘이 맞짱 뜨는데 치졸하게 부하들 동원하면 쓰나? 그거 알려지면 산적 놈이 말년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다고 무림인들 사이에 무슨 욕을 먹겠어? 그때 그건 잘했어! 그런데 말이야. 김용성이.”
“예, 총채주님.”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치졸하게 굴어도 돼.”
“예? 예.”
“그때는 죄송할 짓 하면 안 돼. 알아듣겠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놈과 또 붙을 일이 있을까요? 원래 절세고수쯤 되면 서로 싸우는 일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요새 일어난 절세고수들끼리의 싸움 셋만 해도 반백 년 만에 일어난 대결인데······.”
구자성이 웃었다. 수호지의 호걸들이나 보일 법한 호기로운 웃음이었다.
“혹시 모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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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까지 탄 이후로는 많은 것이 변했다.
이풍의 사무소 전화기는 이십사 시간 걸려오는 스카우터들의 전화 탓에 플러그를 뽑아두어야 할 지경이었다. 모산파와 계약할 예정이라 알려도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이곳저곳에서 번개를 불러내는 도사를 초청하고 싶어 했다.
오늘만 해도 허풍개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에, 자신을 알고 찾아온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워했다. 침술원을 열기도 전에 그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제야 침술원 영업 끝난 거요?”
이풍의 물음에 허풍개가 한숨쉬었다.
“웬 할매가 저기 함경도에서 기차 타고 왔다면서 징징 짜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 있나.”
“돈이라도 더 받죠?”
“돈 받으려고 하는 장사가 아닌데 무슨.”
이풍이 낄낄거렸다.
허풍개는 따라 웃지 않았다. 그저 오늘 고생해서가 아니라, 이 일이 그다지 좋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명성을 얻은 것은 좋다. 무림인의 몸값이란 게 실력뿐만 아니라 이름값의 영향도 있어서 유명하면 그것만으로도 벌이가 늘어난다.
하지만 사파 무림인이고, 대중에 공개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는 처지라면 이 정도로 유명해지는 것은 또 꺼림직한 일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은 공중파에 얼굴이 팔린 여파로 그 뒤를 캐지는 일이다. 기자들이 번개를 불러낸 도사가 사실 사파 무림인이란 걸 알게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여기 상납하는 동네 깡패들이 원한을 품고는 방송국에 제보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되었다간 모산파와의 계약이 틀어질 것이 염려되었다.
모산파의 박애진을 불러서는 상담했다.
처음 봤을 때 이미 말했지만 난 깡패 같은 일을 해왔다. 불법적인 일도 여럿 했는데, 이번에 그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어째야겠느냐?
그랬더니 박애진은 그저 웃으며 말하는 게 아닌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람 속도 모르고 저리 속 편히 대답하다니. 허풍개는 어이가 없어서 따졌다.
“그리되었다간 투자자들과 장문인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제가 투자자도 장문인도 아니긴 하지만, 장담컨대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 염려 마세요.”
“어찌 그리 장담할 수 있습니까? 모산파의 이미지가 걸린 일인데요.”
“그동안 뭘 하셨든 무슨 상관인가요? 진인을 모시는 일인데요.”
“내 나이에 진인은 무슨······”
“눈앞에 계신 분을 진인이라 부르지 않으면 또 누굴 진인이라 부르겠어요? 이건 모산파 도사로서가 아니라 국뽕을 느끼는 한국계로서 드리는 말씀인데, 진인께서 가주시기만 해도 모산파로선 영광일 거예요.”
“그건 또 왭니까.”
박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도사시잖아요. 그런 분이 모산파의 가르침을 익혔다는 것만으로도 모산파 도사들은 지금 잔치를 벌이고 있지 않을까요?”
허풍개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세계에서 제일 월등한 도사라고?
번개를 불러내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확실히 비쥬얼적으로 도사로서 그 정도로 잘나 보이기 어렵다는 것은 허풍개도 인정했다. 하지만······.
허풍개는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옆에서 이풍이 이 여자가 매우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박애진이 말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본파에서 정식계약을 앞당길 수 있겠느냐고 문의가 왔어요. 생각에 변함이 없으신가요?”
허풍개는 월녀를 떠올리고는 대답했다.
“예. 여기서 벌인 사업 정리할 것도 있고······.”
“그렇다면야. 높으신 수련에 더욱 성취 있으시길.”
본파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면 더 설득할 법도 하건만, 박애진은 군말 없이 고개 숙이고는 물러갔다. 그 뜻을 무조건 존중하겠다는 태도였다.
어검술을 본 그날부터 이미 박애진이 허풍개를 대하는 태도는 깍듯하기 그지없었지만, 요새는 아예 신상(神像)을 대하듯 굴고 있었다.
웬 젊은 여자, 그것도 아내의 먼 친척이 저러는 것을 허풍개는 견디기 어려웠다.
둘만 남은 가운데 이풍이 웃었다. 한참을 기분 좋게 웃다가 문득 물었다.
“형님이 여기서 뭘 하셨든 모산파에서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건 좋지만······ 그래도 빨리 정리해야겠죠?”
이풍은 동네 건달들에게 수금 받는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이 뒤가 구린 일이라서 요새 유명세를 얻은 도사가 계속할 만한 일이 못 되었다.
“그래야지.”
“그래서, 상납받을 권리 어디다 팔아넘길까요? 역시 가까운 오가장에 파는 게 무난한가? 그놈들이 지금 돈 없어서 제대로 값 쳐줄 리 없긴 한데······”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가장에 뭔 수로 넘기냐. 거기 이미 망했잖아.”
“아, 오가장 영업 재개할 수도 있어요. 오가장 가주 풀려났다니까.”
“어떻게?”
“증거불충분이라나? 총격전 뉴스가 한창 뜰 때는 서로 눈치 보다가, 뉴스에서 월녀님이랑 형님 얘기만 하니까 기회다 싶어서 제대로 도와줬답니다. 높으신 분들이 슬슬 수사 끝내라고 압박했나 봐요.
하기야 오가장쯤 되면 여당이며 야당이며 뒷돈 받고 그랬을 테니까, 이번에 정말 조직 폭력단으로 처벌받아버리면 곤란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하여간 끈질겨 정말.”
허풍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충 알아서 팔아넘기라고 말해두었다. 그 일에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놈의 상납받을 권리를 어디 팔지 않고 그냥 포기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면 한시라도 빨리 이놈의 지긋지긋한 깡패 노릇을 그만둘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이제 사파 무림인으로서의 수치스러운 생활은 끝이다. 이젠 모산파에 가서 문파의 가장 큰 어른이 되어 수련만 하며 살면 된다.
목가적인 산속 도사의 삶, 그것이야말로 저 조선 시대부터 내내 꿈꿔온 삶이 아니던가.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면서도 돈까지 받으며 영약도 쭉 섭취할 수 있다니? 요새는 정말 이토록 일이 잘 풀릴 수가 있나,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닌가 종종 의심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요, 이제 자신은 구파일방의 일원 모산파의 절세고수가 될 예정이다.
깡패한테 받는 상납이든, 무림맹과의 연계든 깡패 같은 일은 모조리 다 집어치우자. 오가장이 다시 일어났든 말든 신경 쓰지 말자.
그리 결심한 다음 날이었다.
「오은림 아가씨의 은퇴를 무적무적자 대협께서 보증하셨단 게 사실입니까?」
전화기 너머 무림인에게 이풍이 대답했다.
“예. 저도 그 보증 직접 들었습니다. 뭐가 문제라도 있나?”
「그게, 아까 그 아가씨가 금분세수식을 시작했는데요」
“아니, 오은림 그 아가씨가 진짜 우리 안 부르기로 했나보네. 민폐 끼치기 싫다더니 진짜 이름만 빌리기로 했나? 그래서 뭐 문제 있습니까?”
「그게, 금분세수라니 뭔 말도 안 되는 짓이냐고 노발대발하는 분이 있어서······.」
이풍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뒤, 옆에서 장부를 정리하던 박성철이 기겁했다.
이풍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오은림의 무림 은퇴식을 훼방 놓는 놈이 있다고?
그건 분명 분노할 만한 일이었다. 오은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증한 제 형님의 체면을 생각할 때 그랬다.
“번개맨 보증을 씹으려 해? 감히, 어떤 미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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