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52화 (52/103)
  • 월녀 하아린 - [6]

    하아린은 태어나서 이 정도로 쇠약했던 적이 없다. 그녀를 이 방에 가둔 일본인들은 식사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중세 죄수를 괴롭히기 위해서나 쓰였을 법한 무거운 족쇄 탓에 거동조차 자유롭지 않다.

    일본인들이 이렇게 잔인하게 구는 것에는 보복하려는 감상적인 이유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녀가 탈출했다가는 다시 잡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고종 황제를 같은 저택에 머무르게 하는 것도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한 보험일 것이다.

    그만큼 일본인들이 자신을 두렵게 여긴다는 생각에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꼈던 것은 잠시였다.

    이 포로의 꼴을 비웃으러 오는 놈도, 위로하러 오는 누군가도 없다. 같은 건물에 있다는 고종 황제와도 말 한마디 섞어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지금 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느낀다.

    천천히 죽어가는 느낌, 이 또한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다. 이 외로움과 고독감을 견디기 어렵다.

    방문이 열린다. 하아린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식사는 방에 달린 조그만 구멍으로 주는데, 뭐하러 직접 만나려고?

    몸 상태를 확인하려는 일본인 의사일지도 모른다. 하아린은 반갑다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일본인을 상대로 친근감을 느끼다니, 차마 그럴 수는······.

    그러나 감정을 통제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 사실을 하아린은 문이 완전히 열린 순간 깨닫는다.

    하아린은 이런 상황에는 정숙해야 한다는 걸 도쿄의 공포로 군림한 암살자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얼굴을 보고서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연다.

    “사부.”

    *******

    허풍개 의사를 아실 겁니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분이죠.

    사실 알려진 것처럼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는 아니셨어요. 민간 쪽에서 활동하는 협객이셨죠.

    오히려 민간의 부탁을 해결하다 보니 독립운동가들과는 충돌하는 일이 잦았는데요. 독립군이 군자금 모으려고 마을에 세금 거두는 일이 있었잖습니까?

    그때마다 허풍개 의사께선 마을 사람들 부탁받고 독립군이랑 싸워서 쫓아내는 일이 많았죠. 김좌진 장군과도 이때 충돌해서 서로를 상종 못 할 원수로 봤다고 하고요.

    전국 각지에서 유격전 벌이고 군자금을 모으던 구자성 장군과도 그때 사이가 틀어져서······.

    허풍개 의사님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라 알려진 것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입니다. 그때부터 일본이 한국인들을 전장에 끌고갔잖습니까? 그 시점부터 일본군과 자주 얽혀서 그런 거지요.

    마을 청년들을 명부에 적어 제출하려던 면서기 때려눕혀서, 징집에 응하지 못할 명분을 만들어준 다음 마을 청년들 안전한 곳에 숨겨주고.

    저기 남태평양 섬 항구까지 노 저어 건너가서는 위안부에 끌려간 아가씨들 나룻배에 태워다가 다시 노 저어서 데려오고······.

    섬에서 탈출하려는 배에다 족족 어뢰 쏴대던 미군 잠수함도 그거 보고 황당해서 그냥 내버려 뒀다지 않습니까?

    이때 허풍개 의사님한테 붙은 별호가 도해선인(渡海仙人) 혹은 선인도해(仙人渡海)인데요. 조선 사람만 구해온 게 아니다 보니 저기 필리핀 마닐라에는 한국에도 없는 허풍개 의사 동상 하나 있답니다. 선인도해상(仙人渡海像), 교과서에 나오죠 아마?

    언젠가는 노 저어서 바다 건너다 일본까지 잠입한 적도 있지요.

    왜, 월녀님이랑 고종 황제 구해낸 일 말입니다. 그거 드라마에 단골 출연하지 않습니까?

    그 일로 허풍개 의사님을 왕정복고 계열 운동가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분은 월녀님 구하려고 한 거지 고종 황제를 구하려던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같은 건물에 있길래 겸사겸사 구해온 거라지요.

    결과적으로 월녀님이랑 고종 황제 구한 것이 독립운동가들 사기 진작에도 도움이 됐고, 해방 이후 좌우 통합에도 큰 도움이 됐으니까 결과적으론 독립운동을 했다, 이렇게 봐도 되긴 하는데······.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때 이미 허풍개 의사님이랑 월녀님은 깊은 친분이 있는 사이였단 겁니다.

    심지어 사제 관계라는 소문도 있는데,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두 분이 같은 모산파 무공을 수행하셨거든요. 당시 모산파 계열 수행하신 분이 그 두 분밖에 없었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뭔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허풍개 의사님에겐 제자가 있다는 것도 꽤 알려졌지요?

    전설도 있고 악명도 있는 무적비비탄 말입니다. 현재 수감되어 있는 그분의 제자가 바로 이번에 여러 뉴스에 나온······.

    아, 번개요? 무림에선 저분이 그럴 수 있다는 건 유명한 일입니다. 진짜 벼락을 내리실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요. 저번에 모산파 이적 제안을 받았다던데 모산파에 참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그 두 분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걸로 알려진 구자성 장군님도 이번에 노구를 이끌고 나서셨지요.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세월이 흐르고, 당시 협객들이 음지로 숨어들면서 무림이 여러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무림이 국민의 동경을 받는 것은 그 시절 영웅들의 향수가 한국인들을 자극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무림의 협객 무적비비탄이 범죄자이면서도 쌍팔년도 어수선한 시기에 남아있던 희망을 상징하듯이, 여러 무림의 협객들 또한······.

    *******

    박 회장은 리모컨 단추를 부러뜨릴 듯이 힘주어 TV를 껐다.

    그러나 보기 싫은 방송이라고 아예 못 본 척 외면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시 TV를 켜자 예의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월녀와 허풍개와 그 제자 어쩌고.

    뭐라 뭐라 열심히 떠들어대던 TV는 젊은 도사의 손가락과 거기 이어진 번개를 내보이고 있었다.

    월녀가 눈을 뜨는 장면을 끝으로 게스트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시 봐도······”

    장 노사는 저 장면을 현장에서 직접 봤음에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탄스러운지 감탄사마저 토해내고 있었지만 박 회장은 지금 그럴 수 없었다.

    만약 이번 일이 정말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면 순수하게 감탄했을지 모른다. 정말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며 전화를 걸어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자신과 상관있는 일이었고,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상관있는 일이었다. 이번 일이 자기 일을 망쳐버렸으니까.

    이제 그 어느 방송국도 노래방 총격전 사건을 내보내지 않았다. 저놈의 번개, 저놈의 월녀와 허풍개. 그리고 구자성을 비롯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옛 무림인들의 미담을 보여주느라 바쁠 뿐이었다.

    박 회장은 저 방송을 꾸미기 위해 무림맹이 큰돈을 썼으리라고 추측했다.

    영 말도 안 되는 추측은 아니었다. 무림 문파들이 방송계에 인맥이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무림 문파들이 운영하는 연예 회사들의 거대함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박 회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살짝 흘러나왔다.

    “그래, 사람이 번개 부르는 게 사람들 눈길 끌기 좋다 이거지. 노래방 도우미가 총 맞은 거랑 깡패 새끼들이 대낮에 총격전 벌인 것보다 훨씬.”

    박 회장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고는 장 노사가 말을 받았다.

    “우리 회장님 노력한 건 나도 알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않나? 운이 안 좋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뭔 수로 신경을 안 써요―!”

    박 회장의 입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여기 있는 사람이 일반인이었다면 정말 고막에서 피를 흘리며 기절했을지 몰랐다.

    장 노사는 방금 그 굉음에 진동하는 창문을 보며 혀를 찼다. 마구 흔들리는 꽃병이 넘어지지 않도록 바로 세우며 말했다.

    “일의 성사를 하늘이 안 도와주는데 화낸들 뭐 어쩌나?”

    여기까지만 해도 장 노사는 살짝 웃고 있었다. 그는 이번 일을 경사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무당파 출신이고 지금 TV에 나온 것은 모산파 무공을 익힌 도사지만, 어쨌건 같은 도가 무공 아닌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공을 전수한 구파일방의 일원으로서 자부심을 품는 건 물론, 도사로서 더욱 힘껏 수련할 의욕을 느끼고 있다. 이번 일이 명국에도 알려졌는지 그곳의 동료들에게 얼마나 많은 전화를 받았는지 모른다······.

    박 회장이 중얼거렸다.

    “사람이 안 죽어서 그런가?”

    생각에 잠겨 웃다 말고, 장 노사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뭐라고?

    박 회장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제성이 부족했던 건가? 역시 누가 진짜 죽어야 잊히지 않고 그러나?”

    *******

    병실에 누워 허풍개는 이풍이 깎아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평소에는 과수원에서 재배된 과일도 웬만하면 먹지 않지만 부상을 낫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놈의 번개가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와, 씨······”

    이풍은 TV에 나오는 제 형님을 보며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허풍개는 TV 끄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기어이 촬영한 모양이지? 그 정도로 위험을 감수할 맘이 있으면 날아오는 칼 시선이나 끌어줄 것이지, 씨발 새끼들.

    기자들의 직업정신에 감탄할 맘은 들지 않는다. 자신의 경력과 무공이 광고되어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도 별로 없다.

    사람들의 평가를 완전히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허풍개는 그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 조명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들춰지는 것이 두렵고, 스스로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는 월녀와의 사제관계가 알려지는 것도 두렵다.

    그래서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는데, 기자들은 기어이 주변 인물에게까지 마이크를 들이댄 모양이었다.

    「아, 그 청년. 진짜 명의죠. 시술비도 적게 받아서 몸 아플 때면 자주 거기 침술원 찾아가는데요. 뭔가 찌릿하고 나면 몸이 가뿐해져서 매번 용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진짜 피■츄 못지않네요그려. 그동안 느낀 게 착각이나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었던 걸 알아서 놀랐습니다」

    “저 양반 또 침술원 오면 할인해줘요.”

    이풍이 웃으며 말하는 가운데 허풍개는 속으로 걱정했다.

    저대로 쭉 인터뷰 하다 보면 동네 깡패들한테 상납받는 것도 금세 들키겠네. 모산파와의 계약에 악영향이 없으면 좋겠는데······.

    방송이 끝나고 광고가 나오는 시간, 이풍이 입을 열었다.

    “형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물어봐.”

    “형님 혹시 허씨 아니요?”

    허풍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아니다.”

    “정말?”

    허풍개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 성씨가 뭐건 뭐가 중요하냐.”

    “뭐, 하기야 정말 형님이 허풍개 의사님이면 그건 좀 그렇죠? 당시 여든쯤 되는 양반이 일곱 살 애한테 형님이라 부르라 했단 셈인데, 그건 좀 주책이긴 하네.”

    허풍개가 노려보았지만 이풍은 씩 하고 웃었다. 허풍개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너, 그때 장 노사가 지켜준 거야?”

    “뭔 소리예요?”

    “나 옮기러 현장에 왔잖아. 그때 사인검이 가까이 다가오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 아냐. 장 노사가 막아준 거냐고.”

    “장 노사 그 양반은 그때 가슴 베여서 치료받느라 잠시 누워 있었을걸요? 빠르게 지혈하고서야 다시 도우러 온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어떻게 그리 멀쩡하냐?”

    이풍이 눈을 껌벅였다.

    “어, 형님 태극검이 지켜줬는데.”

    “내 태극검이?”

    “형님이 조종한 거 아니요?”

    허풍개는 당시 현장에 챙겨간 자신의 복제 태극검을 떠올렸다.

    “그 검은 그때 부러졌는데. 부러진 채 자동으로 움직였나?”

    허풍개는 태극검이 부러지면 어검술을 통해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칼날이라도 떨어져 나가는 순간 마음속 칼의 형상과는 다른 형태가 되어버리는 탓이리라.

    그러나 그때 미성년자 청부업자들이 습격해왔을 때 그랬듯, 칼이 자동으로 움직일 때는 뭔가 다른 것일까?

    그게 아니면······.

    문득 생각난 다른 가능성에 허풍개는 흠칫했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솟구쳤다.

    “그 태극검, 혹시 복제보다 좀 낡아 보이든?”

    허풍개의 물음에 이풍이 대답했다.

    “글쎄? 자세히 기억은 안 나요. 뭔가 빠른 것들이 챙챙거리면서 부딪치던데. 나 같은 하수 새끼가 그걸 볼 수가 있나?”

    허풍개는 뭔가 더 물으려다 말고 한숨 쉬었다.

    “그래서, 월녀님은? ”

    이풍이 눈을 빛냈다.

    “저기 옆 병실에 계세요. 왜, 만나 보시려구?”

    허풍개는 주저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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