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51화 (51/103)
  • 월녀 하아린 - [5]

    슬슬 힘을 빼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다.

    허풍개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어깨에 날이 파고드는 감각이 끔찍하다.

    지금 구자성은 목 졸려 죽기 일보 직전에도 금나수를 풀려 하는 게 아니라 도끼에 힘을 주고 있다.

    한편 피가 쏠려 시뻘게진 구자성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찼다. 놈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난 널 죽일 수 있다. 너도 날 죽일 수 있나?

    기어이 치킨게임을 하려는 모양이다. 개자식.

    통증을 참아내고, 허풍개는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놈의 목을 틀어쥔 손에 전류를 흘려보냈다.

    구자성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그 몸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주군에 붙잡혀 고문당하면서도 군인의 뺨에 가래를 뱉어대던 투쟁심은 어디 가지 않았다. 가랑이에서 노란 물을 흘리면서도 구자성은 도끼를 어떻게든 더 내려 이쪽의 심장에 닿기 위해 발악했다.

    그러나 목 졸리는 마당에 팔에다 힘을 주기는 어렵다. 서서히 놈의 도끼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더는 어깨에 뭔가가 파고들지 않게 된 순간, 놈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허풍개는 보았다. 손에서 힘을 풀며 구자성을 내팽개치듯 집어 던졌다.

    “총채주님!”

    구자성은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의지를 따라주지 못했다. 한동안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다시 산소가 공급되어서야 구자성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뭔가 외치려던 차였다.

    “멈춰요. 둘 다!”

    홍나연의 목소리, 그녀를 뒤따르는 황군 고수들이 권총을 뽑아 들고 이쪽을 겨누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모양이다. 구자성은 눈을 번쩍 뜨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아, 좀 흥분해서.”

    “흥분? 장난해요? 작전도 멋대로 깨고······”

    “내가 원래 독립운동하던 시절에도 유격전 주로 하던 놈입니다. 합을 맞출 때도 나한테 독립된 작전권이 있는 줄로 여긴단 말이야? 이 버릇을 아흔 가까워져서도 못 고쳤네. 미안합니다.”

    지난 경력을 내세우는 그 말에 홍나연은 뭐라 비난하려다 말았다.

    구자성이 허풍개를 돌아보더니 신경 써주는 척하기 시작했다.

    “무적비비탄 그 친구가 제자 잘 키웠네. 내가 십 년만 젊었으면 좀 나았겠는데······ 제가 심했지요? 많이 아픕니까?”

    허풍개는 허세 부리지 말고 바지나 갈아입으라 지적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딸린 식구가 있는 마당에 괜히 원한을 키울 필요가 없는 일이다.

    허풍개는 어깨에서 도끼를 뽑아내 던져주며 말했다.

    “이제, 가쇼.”

    구자성이 도끼를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해 보이지만 분기를 억눌러 참는 게 분명한 얼굴로 말했다.

    “암, 그래야지. 패자는 승자의 말을 들어야지요.”

    그렇다. 이겼다. 이놈을 상대로도, 절세고수를 상대로도 첫 승리다. 평소라면 이 승리를 몇 시간은 곱씹었을 텐데.

    속으로는 뭔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구자성은 순순히 뒤돌아섰다. 패거리를 이끌고 산에서 내려갔다.

    홍나연은 그들의 멀어져가는 등과 허풍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허풍개가 먼저 말했다.

    “그냥 보내요. 차라리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뭔 수로요? 심한 상처까지 입으셨잖아요.”

    “상처? 뭔?”

    홍나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깨에 감각이 없나요?”

    “아, 이거. 긁힌 겁니다.”

    홍나연은 옛 코미디 영화의 대사를 떠올리고 어이없어했지만 허풍개는 웃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제 어깨에 침을 꽂아 출혈을 멈추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림맹 놈들은 왜 안 데려왔습니까? 오려면 같이 올 것이지.”

    허풍개의 물음에 홍나연이 대답했다.

    “무림맹 사람들,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그들부터 챙겨야겠다던데요.”

    허풍개는 그들의 속내를 알 만했다. 이미 부상자가 속출했으니 언론에다 그들의 혈투를 내보이기는 충분하지 않은가. 거기서 뭔가 더 할 의욕이 사라진 것이다.

    여기 온 무림맹 위원은 그들을 더 싸우게 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무림인들은 들어먹지 않았을 것이다.

    녹림과 달리 무림맹은 여러 문파의 연합체일 뿐이다. 가뜩이나 녹림이 탈퇴하여 무림맹 자체의 덩치가 작아진 탓에 위원들의 권위가 약해진 마당이다. 몸값 비싼 고수들의 부상을 감수하고 싸우란 명령은 그 어느 문파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허풍개가 한숨 쉬었다.

    “하여간 여기 모인 새끼들 못 믿겠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정말 도우러 온 사람은 몇 없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정말?”

    “예. 차라리 혼자 가렵니다.”

    “의도는 알겠는데 그래도······”

    사인검을 상대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던 장 노사가 고함질렀다.

    “나 이러다 목 잘려!”

    허풍개는 자신의 칼을 날려 보내 돕게 하려 했지만 자신의 의지에 반응하는 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태극검, 아까 부서졌지 아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허풍개는 혼자 달렸다.

    뒤에서 홍나연이 뭐라 소리쳤지만 무시했다.

    내공을 모조리 다리에 집중하여 경공을 발휘했다. 태어나서 이토록 빠르게 달려본 적이 없다고 자부할 속도로 달렸다.

    브리핑에서 보았던, 월녀가 머무르고 있다는 장소까지 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익숙한 장소 아닌가.

    익숙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나무도, 그날의 바위도 그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월녀 또한, 수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연물처럼 그날과 똑같은 얼굴로 거기 있었다.

    허풍개는 바위에 가부좌를 튼 그녀를 보았다.

    그래, 죽으려 했다고? 남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잘 보니 그녀의 얼굴이 달라지기는 했다. 완전히 깡마른 그 얼굴, 언뜻 보이는 손도 가늘었다.

    그녀가 저 상태로 정말 이 세상을 떠나려 했다는 것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황군에서 보급해주는 식량은 며칠 전부터 건드리지도 않은 것이 분명했다.

    치매 환자보다는 우울증 환자에게서 보일 법한 모습이다. 허풍개는 오늘 아침 박애진이 한 말을 떠올렸다.

    삶에 즐거움을 하나씩 줄여나가면 왜 살아야 하느냐 물었던가?

    씨발년. 사는 데 목적이 어딨나.

    물론 월녀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 스스로 죽어가는 그 모습을 보며 허풍개는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도 한때 식음을 전폐하려 죽으려 한 적이 있었다. 아내의 무덤 옆에 자식을 묻은 날이었다.

    그러다 끝내 실패하여 미음을 먹었고, 그때 느낀 크나큰 수치는 허풍개가 평생 곡식을 포함한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담지 않게 만들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과 달리 수치스러운 결정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억’, 하고.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 가슴에 칼날이 삐죽 빠져나왔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날아온 사인검이 그 등 뒤를 관통했다.

    허풍개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등이 땅에 닿기 전에 그놈의 칼은 등에서 빠져나갔다.

    공기가 빠져나가며 바람 소리가 났다. 피가 흘러내렸다.

    챙, 챙 하는. 칼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

    허풍개는 하늘을 보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은 많지만 시간은 별로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낮이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밝지도, 충분히 어둡지도 않았다.

    저 애매한 하늘을 보며 허풍개는 생각했다.

    이럴 거면 그냥 그때 산적 놈한테 총 맞아 뒈지는 게 나았다고. 아니면 그 전에 뒤지든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늘에게 따지고 싶었다. 제자한테 칼 맞아 죽으라고 여기까지 명줄을 늘린 것인가? 그리고 눈을 뜨게 된 제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보고 경악하라고?

    그건 안 된다, 절대.

    똥을 질질 흘리며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죽어선 안 돼.

    허풍개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출혈이 상당했다. 몸 하나 꼼짝하기 어려웠다.

    갈수록 혼미해지는 가운데,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놓지 않기 위해 생각을 계속했다. 저놈의 하늘. 저 잔인한 하늘.

    하늘의 뜻은 어디 있는가? 천명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가?

    올림포스산에 신들은 없다. 곤륜산에 서왕모는 없다.

    기는 에너지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늘은 정말 지상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수행은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공덕도, 선행도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또한 지난 모든 삶마저도.

    고통 탓인지 절망적인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허풍개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문득 자신의 몸이 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양쪽 겨드랑이를 잡고 몸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자신을 끌고 가던 누군가가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따졌다.

    “뭘 봐.”

    청각 또한 흐려진 마당에도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들어온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수는 없다.

    “뭘 봐, 쌍년아!”

    허풍개는 지금 이풍이 월녀를 상대로 도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공격 대상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함일까?

    허풍개는 겨우 입을 열었다.

    “풍아. 니 사저님이다. 나쁜 말 쓰지 마라. ”

    이풍은 사저(師姐)가 아니라 사고 아니냐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제 형님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만 주목한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형님, 괜찮아?”

    허풍개도 좆밥 주제에 여기 왜 왔냐고 묻지는 않았다. 구자성과 싸운단 말을 듣고 기겁하여 달려왔으리라.

    허풍개는 털이 수북한 이풍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새끼.”

    이풍은 눈을 껌벅이더니 애써 웃었다.

    “예, 아버지.”

    허풍개는 온 힘을 짜내어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놈의 사인검은?

    사인검은 월녀를 지키듯 그 옆에 떠 있었다. 그 칼몸에 박힌 별들이 자신을 감시하는 듯 느껴졌다.

    아무튼 저 칼이 자신을 아예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월녀와 멀어져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여유가 있다.

    허풍개가 말했다.

    “내 상의에 주머니 보이지.”

    이풍은 허둥지둥 대답했다.

    “예, 주머니 있어요.”

    “거기 영약 들어있어.”

    “예?”

    “꺼내줘. 영약.”

    이풍은 그게 뭔 말인지 생각해보다가 소리 질렀다.

    “영약 먹는다고 상처 안 나아요!”

    “일단 줘.”

    이풍은 주저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했다. 이풍이 목함 뚜껑을 열어주자 허풍개는 받아서 삼켰다.

    상황이 급하다. 명상도, 행기도 최대한 빠르게.

    내면에 침잠한 허풍개는 흔들리는 번개를 보았다. 그리고 방금 섭취한 영약의 기운을 느끼고는, 모조리 번개에 불어넣었다.

    방금 먹은 것은 박 회장이 준 값진 영약이었는데, 원래 자신이 먹으려던 물건은 아니었다.

    이풍에게 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영약을 먹어도 똥만 싸지르기로 유명한 똥쟁이지만, 그걸 해결할 방법을 얼마 전에 발견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박 회장이 어마어마하게 비싼 걸 준 모양이다. 번개가 눈에 띄게 커졌다.

    그것을 확인한 허풍개는 눈을 떴다.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풍의 눈길이 거기 향한 가운데, 허풍개는 속으로 주문을 외워 한 줄기 전류를 뽑아내 보였다. 그리고 물었다.

    “좀 커진 거 같냐?”

    “예? 예.”

    “그럼 됐네.”

    다음 순간 이풍은 기겁했다. 허풍개가 전류를 뿜는 손가락을 제 가슴에 대더니, 지져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허풍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풍은 어찌나 놀랐는지 잠시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 박자 늦게 겨우 외쳤다.

    “형님? 내가 아래로 업어갈 테니까 그냥 있어요!”

    허풍개는 고개를 저었다.

    방금 그것은 일종의 치료 행위였다, 환자들한테 침놓을 때도 침에 전류를 흘려 넣는데, 도가에서 번개는 치유를 상징하고 어쩌고 하면서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허풍개가 한 발짝 내디뎠다. 이풍이 자신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풍개는 그를 밀쳤다.

    이풍이 어어 하는 가운데 허풍개는 달렸다.

    월녀에게 접근해오는 그를 향해 사인검이 움직였다.

    삐죽한 칼끝이 이쪽을 향하더니,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 어떤 백사출동이나 사일검법도 낼 수 없는 속도의 찌르기였다.

    구자성의 도끼를 맨손으로 받아내는 게 미친 짓이듯 저 찌르기를 맨손으로 받아내는 것 또한 미친 짓이다. 왼쪽 어깨가 도끼에 찍혀버린 지금 그러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미친 짓이라도 마다할 수가 없다.

    그 칼끝이 가슴에 닿으려던 순간, 허풍개는 어깨 부상 탓에 움직이기 힘든 왼손을 보조 삼아, 오른손을 바삐 움직여 공중에 원을 그렸다.

    하늘과 땅이 뒤섞이는 건곤대나이. 왼쪽 어깨의 부상으로도 어찌어찌 성공했다.

    이쪽을 찔러 온 힘 그대로, 사인검은 저 멀리 날아가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곧 다시 돌아올 테지만 상관없었다. 허풍개는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핥고는 계속 달렸다.

    월녀가 저 앞에 있었다. 몇 발짝 더 달려 기어이 그 앞에 닿았다.

    허풍개가 그녀 앞에 무릎 꿇었다. 사인검이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풍개가 월녀의 어깨를 안았다.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죽지 마.”

    사인검의 칼끝이 다시 이쪽을 향했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날아오기 시작했지만 허풍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주문을 외웠을 뿐이다. 뇌위진동변경인(雷威震動便驚人).

    허풍개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검지 끝에서 가느다란 스파크가 튀더니, 한 줄기 선이 저 위로 연결되었다.

    한 줄기 전류······ 아니, 그보다 길고 거대한 무언가.

    하늘까지 닿은 저것은 번개였다. 자연적인 번개라기엔 지나치게 가느다랗지만, 그래도 분명했다.

    하얗고 파란 전류의 선이 저 먹구름까지 이어져 있었다. 빛의 속도는 지나치게 빨라서 그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저 번개가 하늘에서 내리꽂힌 것인지, 검지에서 쏘아 올려져 저 하늘까지 닿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벼락은 그것을 불러낸 허풍개와 그 팔에 안긴 월녀를 감쌌다. ‘콰르릉’······.

    천둥까지 쳤다. 허풍개는 천둥이 목소리를 지워주길 바라며 말했다.

    “사랑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상 넘치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허풍개는 그녀에게 반했다.

    “그러니까 살아.”

    동자공도, 아내와의 사별로 인한 슬픔도 애욕을 끊어내지는 못했다.

    아내가 묻힌 이곳에서 그는 새 사랑을 느꼈고 그와 함께 크나큰 수치를 느꼈다. 아름다운 제자의 성취가 자신을 넘어섰을 때 느낀 수치는, 자기가 암컷을 보호할 만큼 강해야 한다고 믿는 수컷으로서의 수치였을지 모른다.

    수치로 가득 찬 인생이었다. 거기에 수치 하나를 더할 수는 없었다. 아내가 묻힌 이 산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산에서 그녀를 쫓아 보낸 뒤 백 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번뇌는 사라지지 않았고 수치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반쯤 감긴 허풍개의 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와 흘러내렸다. 금방이라도 목을 꿰뚫어버릴 듯 날아오던 사인검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

    *******

    허풍개는 그녀와 시선을 응시했다.

    월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에게 끌어안긴 그대로였다.

    허풍개는 그녀의 뺨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풍의 옆에 장 노사가 보였다. 저 늙은이, 별로 의욕이 없다더니 땀범벅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도 도와주러 온 모양이다.

    상황이 끝난 지금은, 두 손을 모은 채 무언가를 중얼중얼 읊고 있었다.

    “뇌대뇌이뇌삼뇌사뇌오(雷大雷二雷三雷四雷五), 우우삼단나(吘吘三檀那)······”

    뭔 소린지 들어보니 도가의 기도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번개를 부르는 주문인데, 방금 본 장면에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도사로서 따라 하려는 걸 보니.

    그 뒤로도 사람들이 보였다.

    홍나연을 비롯한 황군 고수들과 카메라맨들. 미친 칼이 사람들을 썰고 다니는 마당에 여기 무슨 배짱으로 왔는지 모를 일이다.

    다들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선 채 카메라를 열심히 들이대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 찍었을까? 모른다. 제발 그렇지 않기를.

    허풍개는 월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을 회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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