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녀 하아린 - [4]
하아린이 스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환갑이라고 소개했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는 주안술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라고.
그 인간은 원래 그렇다. 자기 나이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지 제대로 밝히는 법이 없다. 젊을 때는 얕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자기 나이를 서너 배쯤 늘려서 말하더니 늙어서는 늙은이 취급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두 배쯤 줄여서 말하곤 했다.
스승이 자신보다 몇 살 어리다는 사실은 몇 년 후에야 겨우 알았다. 그때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모른다.
“다 늙어서 사회 활동할 기력도 없단 건 거짓말이겠네?”
하아린의 말에 스승이 대답한다.
“그래.”
“그럼, 사부도 나랑 같이 하산해!”
“왜, 같이 애국 활동하자고?”
“그래!”
“싫다. 나한테 이상한 거 권하지 마라.”
“이상한 거라니?”
스승이 평소의 지론을 말한다.
“애국은 젊은 놈들이 총알 앞으로 달려 나가게 만들기 위한 속임수고, 민족은 허상이야.”
국모의 복수를 꿈꾸는 여자로서 하아린은 화가 치밀지만 새삼 욱하지는 않는다. 이미 여러 번 들어본 소리기 때문이다.
하아린은 다른 논리로 공격한다.
“사부의 스승님, 그분은 애국자셨던 걸로 아는데? 그분의 뜻을 안 따를 거야?”
그러자 스승이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널 키웠잖아.”
“날 키우다니?”
“내 스승이 내게 준 가르침도, 그녀가 물려준 영약도 다 네게 줬어.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그놈의 애국 활동을 해.”
정말 자기 대신 제 스승의 유지를 따르라고 그 모든 것을 베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아린은 평소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느니 말할 때마다 스승이 비웃어댄 걸 떠올린다. 그걸 보면 스승은 어린 제자의 행동을 말릴 생각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대체 무상으로 그 모든 것을 베푼 이유는 뭔가? 하산하게 된 지금도 그것을 알지는 못한다.
하아린이 걷는다.
스승은 하산하는 하아린을 마중 나온다.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힘들어지면 그만두고.”
“그럼, 돌아와도 돼?”
스승은 조금 뜸 들이더니 대답한다.
“그건 안 돼.”
하아린은 피식 웃고 만다.
산을 내려가는 길에 혼자라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사람도 잘 돕는 착한 양반이 어째 애국심만 없는지 모를 일이다.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나중에 들은 바에 따르면 스승은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없는 걸 넘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소속감조차 없다.
어릴 적의 강렬한 경험 때문이다.
그 설명을 언제 들었던가. 스승과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을사조약이 이루어진 지 꽤 지난 시기였다.
하아린이 이번에야말로 민족의 위기를 외면하지 말고 나서라고 강요하듯 권했을 때, 스승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던 것 같다.
‘다 적이야! 도와 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리면 배때기나 걷어차는 적! 애새끼 뒤지게 내버려 두는 씨발 새끼들! 그게 왜 내 이웃이고 동족이야?’
주변의 모두가 도움을 거절한 나머지 동생이 죽어버린 경험, 그 사무치는 기억은 지금도 그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어서 같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 한들 믿고 의지할 이웃으로 여겨질 수 없게 했다. 그날의 경험으로 스승은 이 땅에 소속감을 잃었다.
소속감. 당시에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아린도 이제는 안다.
자신이 혼자라고 느껴지면, 소속감은 사라진다. 그와 함께 애국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모조리 사라지고 만다.
이때 주변에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외로움은 오히려 커질 뿐이다.
뭔지 모를 소리가 들린다.
저 소리의 정체는 도움을 청하러 온 조선 백성일지도 모르고, 일본군일지도 모른다.
월녀는 칼을 날려 보낸다.
*******
날이 어둡다. 아직 낮이지만 먹구름이 가득 꼈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산속이기까지 하니 거의 저녁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이 흐린 어둠을 뚫고 날아온 사인검을 보았다.
사인검의 칼몸에는 28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그것이 실제로 빛나지는 않지만, 그 상앗빛 점은 별빛처럼 모두의 눈에 띈다.
그 점은 맹수의 눈빛 같기도 하다. 사냥감을 물색하는 포식자의 눈.
여기 모인 무인들의 눈이 사인검의 눈과 마주친다. 방금 저 칼 한 자루가 어지간한 절세고수보다 강하다느니 어쩌느니 설명을 들어서일까, 아니면 저 분위기 탓일까?
저 칼이 아무나 죽이지 않는다는 설명을 이미 들은 마당이지만 오한이 든다. 이미 사람 여럿 죽여본 무인들조차도 스산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여기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주인에게 위험한 자들인지부터 파악하려는 것일까?
사인검은 당장 모두를 살필 뿐 공격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몇몇이 애써 웃었다. 독립운동하던 무림인들처럼 차려입은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웬 콱,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시커먼 그물이 날아가 펼쳐졌다. 황군의 고수가 사인검이 가만히 멈춰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물총을 쏜 것이다.
저 그물은 철로 만든 것이었다. 일단 맞힌다면 그것만으로도 바로 저 칼을 무력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물총에 잡히는 절세고수는 없는 법이다.
“붙잡았―”
누군가 외쳤지만, 착각이란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잔상마저 남기고 그물을 피한 사인검은, 방금 공격당했음에 격하게 반응했다. 방금 그물총을 쏜 황군 고수를 향해 날아갔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억······”
사인검이 그물총을 쏘았던 황군 고수의 손을 찔렀다.
더 큰 긴장감이 모두에게 퍼져나갔다.
황군이면 월녀가 오랜 세월 몸담아온 곳 아닌가. 그곳의 구성원은 소방관보다도 공격하기 꺼려지는 대상이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저 그물총을 쐈다는 이유로 적으로 판단해버리다니? 저 검의 판단력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지금 저 칼을 조종하고 있을지 모를 월녀의 판단력이 좋지 않거나.
어느 쪽이건 입은 복장과는 상관없이 공격당하리란 사실은 명백하다.
다들 조심스레 움직이는 가운데, 사인검의 칼끝이 웬 무림인을 향했다.
그 무림인은 지금 독립운동가가 입을 만한 차림을 했지만, 그런 사실을 칼은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방금 공격한 놈과 같은 장소에 모여있으니 적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사인검이 비행했다.
절세고수가 휘두르는 칼은 육안으로는 쉽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저 사인검의 모든 동작은 절세고수의 칼질과 같았다. 그 비행 또한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속도로 이루어졌다.
곳곳에서, 연달아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 억, 윽.
네 명이 동시에 비명 지르며 반쯤 잘린 손등을 움켜쥐었다.
그들을 스치고 간 검의 궤적을 본 사람은 여기 모인 무림인 중에서 거의 없었다. 반사신경이 일반인들보다 월등한 고수들조차 눈만 깜박거렸을 뿐이다.
그 검의 움직임을 겨우 포착한 소수의 인원 중에는 장 노사 또한 있었다.
“내가 막겠다!”
그는 절세의 경지를 목전에 두었다고 평가받는 고수였다. 그의 태극검이 미사일처럼 쏘아지던 사인검을 막아낸 그 순간,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때 장 노사는 물 흐르는 듯한 태극검을 펼치면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칼 자체가 절세고수니 뭐니 하는 설명을 들었으니 이길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붙잡고는 있으리라 여겼다.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십 초면 충분했다. 사인검과 몇 합을 주고받은 장 노사가 비명 지르듯 외쳤다.
“이거 어떻게 상대하나!”
어검술은 검 혼자 움직이는 조화다. 어검술로 움직이는 검이 적을 공격할 때, 검객의 어깨나 허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공격 전에 상대방의 동작을 예상할 전조가 없는 셈이다.
그것만으로도 장 노사는 승산이 없음을 알았다. 상대 근육의 움직임을 보고 대응할 수 없다면 그저 눈으로 보고 대응해야 하는 셈인데, 절세고수를 상대로 그러라고?
이 와중에 저 홀로 움직이는 칼은 인간의 몸으로 하지 못하는 동작을 펼치기도 자유롭다.
장 노사가 자신의 가슴을 노린 공격을 막아낸 그 순간, 사인검은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빠르게 하강했다.
“어······”
그대로 자기 다리를 베어버리려는 사인검을 보고서 장 노사는 기겁했다. 이건 인간 검객이 아니라 격투 게임의 캐릭터나 할 법한 비현실적 공격 아닌가.
만약 인간 검객이 이런 짓거리를 하려거든 갑자기 주저앉아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자기 머리와 목을 상대의 바로 앞에 노출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잽싸게 목을 베어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지금 저 홀로 움직이는 칼 어디에 베어버릴 목이 있단 말인가?
지금 장 노사의 태극검은 상단을 방어하느라 하단이 비었다. 다리가 잘려나갈 위기에 장 노사가 눈을 부릅뜬 그때였다.
두 쇠붙이가 충돌하여 불꽃이 튀었다.
저 멀리서 날아온 태극검이 사인검과 부딪쳤다. 사인검과 태극검은 어지럽게 섞이기 시작했다.
태극검을 날려 보낸 허풍개가 외쳤다.
“몰라!”
허풍개는 자신의 태극검을 때려 부수기 시작한 사인검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어검술 따위로 그녀의 어검술과 맞서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어검술의 숙련도는 물론 검술의 숙련도부터 차이가 나지 않는가. 과연 태극검은 순식간에 반쯤 박살 나 땅에 떨어져버렸다.
그래서 허풍개는 맨손으로라도 상대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리고 다가온 허풍개를 상대하지 않고서, 사인검은 피했다.
허풍개는 그 자리에 허망하게 멈춰 서섰다. 사인검이 저 멀리 날아가서는 다른 표적을 노리는 게 아닌가.
또다시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낭패였지만 허풍개는 호흡을 고르며 생각했다. 그나마 죽은 사람이 없는 것은 다행이라고.
장 노사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구자성은?”
허풍개도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 누구보다 도움이 될 또 다른 절세고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저 위에 그가 보였다.
“월녀한테?”
구자성은 지금 녹림도들을 이끌고 월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인검이 다른 놈들을 베는 동안에 원래 임무를 달성하려는 것일까?
사인검도 그것을 봤다. 이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휙 하고 날아가더니, 저 멀리서 달려가던 녹림도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 고통이 어찌나 끔찍했는지 저 멀리 녹림도가 내지른 비명은 수백미터 떨어진 여기서도 생생히 들렸다.
허풍개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진 손만 베거나 찌르더니 어째서?
월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더 큰 위협으로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공격의 강도가 더욱 세진 모양이고.
그러나 구자성과 녹림도들은 후퇴하지 않았다. 어깨가 베인 녹림도마저 내버려 둔 채 계속 달렸다.
저 미친놈들.
허풍개는 입술을 깨물고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장 노사도 그와 함께 달렸다.
허풍개가 가장 자신 있는 무공 중에는 경공도 있었다. 순식간에 그들을 따라잡다 못해 추월했다.
허풍개가 산적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멈춰.”
한 녹림도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외쳤다.
“왜 막아섭니까? 이러는 동안에 저 씨발 놈의 칼이 우릴 베는······”
뒤늦게 장 노사도 여기 다다랐다. 장 노사는 달리느라 지친 숨을 고를 여유도 없었다. 태극검을 죽어라 휘둘러, 녹림도들을 공격하는 사인검을 막아내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약간이나마 말 섞을 여유가 생겼다. 허풍개가 외쳤다.
“그럼 뒤로 가. 왜 무작정 돌격하는 겁니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잔인하게 공격하는 모양인데, 이러다가 진짜 누구 죽어!”
평소에는 결코 입에 담지 않는 ‘죽는다’는 단어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경고한 보람이 없었다.
구자성은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말햇다.
“원래 작전이 칼을 어떤 식으로든 무력화시킨 다음에 월녀님한테 접근하는 것이던가?”
“잘 기억하는군요. 그런데 왜?”
“음, 내 보기엔 비효율적이어서. 기관총 진지로 돌격해야 하는데 기관총부터 제압하고 달리자는 게 말이 되나? 돌격하면서 제압해야지.”
저건 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허풍개가 노려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구자성이 변명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허풍개가 어디 지껄여보라는 듯 노려보았더니 구자성이 계속 말했다.
“결국 칼은 한 자루니까 그냥 계속 돌진하면 몇 명은 저기 끝에 닿게 돼 있어요. 희생을 감수하면 목표를 확실하게 달성할 수 있는 거지.”
“그래서, 월녀가 기어이 몇 명 해치게 만들겠다고? 그 손에 피를 묻히겠단 건가?”
“산적 몇 명 죽이는 거지요. 그게 뭐 나쁜 일이라고······”
녹림도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허풍개는 저들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저번 사건은 녹림의 산채 하나가 저지른 일 아닌가. 다른 산채의 녹림도들도 이번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이슈를 덮으려면 어째야 하는가?
단순히 더 큰 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론 부족하다. 동정 여론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국민적 영웅 월녀를 구하려다 산적 몇 명이 희생되는 일은 국민과 검찰의 동정을 끌어낼 충분한 재료가 될 것이다.
그 추측대로라면 그건 또 이상한 일이다.
허풍개가 추측한 바에 따르면, 구자성과 박 회장은 한패다. 그러니까 박 회장이 원하는 게 곧 구자성이 원하는 일이요, 구자성이 갑자기 녹림을 무림맹에서 탈퇴시키고 항쟁을 유도한 나머지 아홉 시 뉴스에 장식된 것은 작전의 하나일 뿐이다.
아마도 이런 작전일 것이다. 구자성은 총기와 마약, 민간인이 휘말리는 항쟁을 녹림을 통해 끌어냈다. 그런 사건이 하나둘씩 일어나다 보면 경찰도 정치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결국에는 박 회장이 원하는 대로 무림 전체를 소멸시키기 위한 청정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무림이 크게 축소되거나 소멸하면, 폴란드에서 온 마교 수괴는 패거리를 끌어들일 것이다. 너무나도 손쉽게 한국 무림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자성은 제 패거리인 녹림의 세력 축소 혹은 소멸을 각오한 셈이다.
그런 주제에 왜 여기서 이러는 걸까.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녹림을 챙기려고? 아니면 그냥 추측이 틀렸나?
허풍개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꺼져.”
허풍개의 말에 구자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뭐?”
“꺼져.”
구자성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양 입술이 떨리더니, 한참 후에야 서로 떨어졌다.
“이 개새끼가. 그따위로 명령을 해?”
“꺼지라니까.”
“니 잘난 사조며 스승 모두 나한테 박살 난 거 아나?”
구자성이 도끼를 들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초저주파에 주변 녹림도들의 몸이 굳었다.
“사조에 스승에 제자까지 반 죽여버려야겠어.”
허풍개도 장갑을 벗고 싸울 준비를 했다.
구자성이 도끼를 휘둘렀다. ‘텅’ 하고, 도끼가 공기를 찢어발기는 파공음은 대포의 발사음처럼 울려 퍼졌다.
그래서 대응은?
절세고수가 휘두르는 흉기는 끔찍하게 강력하다. 강남제일검을 상대할 때처럼 맨손으로 뭘 어쩌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맞설 생각은 버리고 무조건 피해야 한다.
허풍개는 보법을 밟아 옆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구자성을 견제하기 위해 손가락을 튕겼다. 탁.
장갑을 벗고 날린 금속 BB탄이 눈을 향해 쏘아졌다. 구자성은 슬쩍 얼굴을 움직였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BB탄이 그 얼굴에 명중했다.
그러나 구자성은 고통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연이은 공격에 나섰다. 허리를 비틀면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점혈조차 안 된 모습, 허풍개는 놀라지 않았다.
철포삼(鐵布衫). 몸에 얇은 철판을 두른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외공이다. 구자성은 그것을 극한까지 익혔다.
그 외공에는 실제로 피부에 뭔가를 두르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세게 날린 BB탄조차 그 피부에 충격을 주지 못할뿐더러, 탄에 담은 기를 내부에 파고들게 할 수도 없다.
괜히 허풍개며 무적비비탄까지 유독 이놈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절세고수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게다가 지금은 지혜를 짜내어 장기전을 노릴 상황조차 아니다.
갑자기 두 절세고수가 자길 도와주기는커녕 서로 맞붙는 걸 보며 장 노사가 비명 지르고 있었다.
“당신들 뭐해!”
이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한다. 어떻게?
허풍개는 기꺼이 살을 내주기로 했다.
도끼가 내리 찍힌 순간, 허풍개는 피하지 않고 어깨로 받아내었다.
도끼 날이 근육을 파고들었다. 통증이 천둥처럼 머리에 울려 퍼진 순간, 온몸에 번개가 퍼지면서 허풍개의 시간이 느리게 움직였다.
몸 또한 빨라진 그 틈에 허풍개는 손을 뻗었다.
구자성의 목에 닿은 금나수.
옥죄는 힘에는 철포삼 따위 외공이 관여할 여지가 별로 없다. 목이 졸리게 된 구자성의 미간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대로 손에 힘을 주면 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