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48화 (48/103)
  • 월녀 하아린 - [2]

    모산파와의 정식계약은 반년 뒤였다. 그때까지 모산파에서 온 두 명은 이 근처에 머무르기로 했다.

    둘은 그저 호텔에서 지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박애진이 말했다.

    “앞으로 모산파의 간판이 될 분인데 어떤 분인지 미리 알아두면 좋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저희도 뭔가 배우면 좋겠고요.”

    다큐멘터리라도 찍듯, 박애진은 허풍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 절세고수가 평소에 뭘 먹는지,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수련은 얼마나 하는지 관찰하겠단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 생활을 자기네도 본받고는 모산파에 전달하겠다고도.

    그리고 관찰을 시작한 첫날부터 충격을 받았다.

    박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이것만 드신다고요?”

    허풍개는 참깨와 송진을 섞은 죽을 순식간에 들이키고는 대답했다.

    “예.”

    “삼시 세끼, 이것만?”

    “예.”

    “대체 왜요?”

    “벽곡하기 위해서죠. 모산파에선 안 그럽니까?”

    “벽곡까지는 안 하고, 그냥 채식 위주로 식사하는데요. 그마저도 도관에서야 손님들 보는 눈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퇴근하면 고기도 먹고 그래요.”

    “고기를 드신다고?”

    “채식은 수련에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이십 년 전에 결론이 났거든요.”

    그 결론이란 도교적인 논리가 아니라 과학적인 분석에 따른 것이 분명했다. 야구 구단이 세이버메트릭스를 통해 선수들을 관리하듯, 거대 무공 시장에서도 통계와 데이터를 중요시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허풍개는 자기가 지닌 지식이 낡았음을 인정하는 노인으로서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물론, 노인답게 새 방식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래도 전 해오던 방식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뭐, 절세의 경지에 이른 분에게 저 따위가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는 일이긴 한데······.”

    “저도 제 방식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누구한테 무공 가르칠 일이 생겨도 제 식습관을 권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요.”

    충격적인 식사 장면을 본 이후로는 끔찍할 만치 심심한 일과가 이어졌다.

    수련, 의원으로서의 일. 수련······.

    허풍개는 휴식을 위한 시간마저 명상으로 보냈다. 사실상 하루 내내 딴짓하는 시간이 없는 수준이었는데, 박애진은 보여주기 위해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나 더 지켜봤더니 아니었다. 안 보는 척하면서 몇 주 내내 관찰했더니, 허풍개의 일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식사도, 수련과 일에 할애하는 시간도 소름끼칠 만치 똑같았다.

    결국에는 관찰하던 쪽에서 먼저 기가 질렸다.

    박애진은 결국 관찰을 포기하고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이렇게까지 수행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이미 최고의 경지에 이르셨으니 더 높이 오를 곳도 없을 텐데요.”

    허풍개는 쉽게도 대답했다.

    “오래 살아야지요.”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리라 생각했다. 도교부터가 불로장생하기 위한 종교 아닌가. 도사가 수련하는 이유로서 그보다 나을 게 또 뭔가.

    그러나 박애진이 듣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래 살기 위해 수련하신다고요?”

    “예.”

    박애진은 조금 고민하더니, 무례를 무릅쓰고 질문했다.

    “벽곡하시니까 먹는 즐거움은 못 누리시지요?”

    “예.”

    “동자공 익히셨다니 그쪽 일도 못 즐기시겠고요.”

    “그렇죠.”

    허풍개가 남사스럽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박애진은 조금 움찔하고는 계속 물었다.

    “취미도 없이, 그냥 수련만 하시고요.”

    “예. 문제 있습니까?”

    “아뇨, 그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나 싶어서요.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둘씩 줄여가면 삶의 즐거움이 충분히 남나요?”

    “별로요.”

    “그럼?”

    “죽지 않기 위해서죠.”

    이마저도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박애진은 더 물어보려다 말았다.

    뭐, 음주 운전하거나 약 빨다 난교파티하는 걸 걸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모산파에 무공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지켜보는 사람이 다 미쳐버릴 만한 저 생활을 모범 삼으라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그날 오후였다.

    이풍의 사무소에 웬 손님이 찾아왔다. 왕실 문양이 새겨진 정장을 입은 여성이었다.

    “전에 뵀지요? 홍나연입니다. 황군에서 나왔습니다.”

    “아, 그, 황실 고수 분?”

    이풍이 감탄하는 가운데 홍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률 씨 계신가요?”

    “저기 밑에 있습니다. 불러드릴까요?”

    “예. 도움이 필요한데, 협조 요청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풍은 헤벌쭉 웃으면서 눈을 빛냈다. 황군의 일을 맡아서 하는 것보다 무림인으로서의 커리어에 좋은 일은 달리 없다.

    “뭔 일인데요?”

    “월녀님께서······”

    홍나연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 이 땅의 모두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시각, 허풍개는 침술원 내 환자들을 위해 켜둔 TV를 보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속보였다. 만월산 출입 금지를 알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화면을 보았다.

    헬기 위에서 촬영하는 모양이다.

    TV 화면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도복 차림의 여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허풍개는 당연히도 알고 있었다.

    그 주변을 맴도는 칼 한 자루도.

    「그러니까 저흰 그냥 거기 다가갔을 뿐인데, 검이 저 혼자 날아오더니 (···)」

    손을 찔린 두 경찰관이 겪은 일을 중얼중얼 호소하고 있었다.

    저 홀로 날아다니는 칼에 찔린 것은 저 두 경찰뿐이 아니었다.

    무전을 듣고 예의 장소에 접근한 다른 경찰들도 사지 어딘가를 칼에 찔렸다.

    또한 특종이다 싶어 현장에 달려간 어느 기자는 어딘가를 찔리지는 않았지만, 목젖에 칼이 겨눠지는 위협을 당했다고 했다. 칼에 찔린 경찰들을 구조하기 위해 현장에 당도한 구조대원들에게는 아무런 위해도 가해지지 않았고.

    「월녀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제 목소리―」

    산속 월녀를 향해, 확성기로 뭐라고 소리치던 남자가 기겁하여 나자빠졌다.

    날아온 칼이 확성기를 갈라버리더니 도로 날아가 산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뉴스에 나오기에는 유치할 만치 판타지 같은 장면이었다.

    *******

    “구자성이가 허풍개 담그려 했다던데. 혹시 그쪽이랑 작당한 일이요?”

    박 회장의 물음에 라나가 대답했다.

    “아뇨! 제가 왜요?”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죠! 허풍개 오빠 때려잡으면 경험치가 오르나요? 월녀 언니가 복수하러 올 뿐인데요!”

    “천마씩이나 되어서도 월녀는 못 이기나?”

    “그건 모르겠고, 월녀 언니 잡아도 경험치 안 올라요! 그 대신 국민적 영웅을 해쳤다고 나라 전체가 화나서 군이랑 경찰이 날뛰겠죠. 그랬다간 피곤해서 어떻게 장사하겠어요? 영국에서처럼 적자 보기 싫으면 장사 접고 딴 데 가야 돼.”

    “그럼 구자성이 왜 그랬을까?”

    “뭐, 조급해졌나보죠?”

    “조급하다니?”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자성이 오빠한텐 제가 잘 말해볼게요.”

    “말 안 들어 처먹으면 어쩔 겁니까.”

    “뭐, 어쩔 수 없죠? 그 오빠는 제 부하가 아니라 동업자라서요. 통제고 뭐고 없어요. 그래서, 회장님은 일 잘돼가요? 허풍개 오빠, 모산파로 가는 거 맞죠?”

    “글쎄.”

    “글쎄라뇨?”

    “허풍개는 미친놈이요.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뭘 할지도 알 수 없지.”

    박 회장은 한숨 쉬더니 계속 말했다.

    “위인전 나온 명성까지 버려가면서 그놈의 신분 세탁은 왜 했는지도 모르겠어. 영약 섭취에 미쳤다면서 일은 좆나게 가려 받더군. 감옥 가는 거랑 신분 노출되는 게 싫은지 평소엔 몸을 끔찍하게 사리더니, 영약 하나 줬다고 정말 방송국을 습격하질 않나. 자기가 하는 말이랑 행동이 죄다 모순투성이라······”

    “음, 그럼 그쪽은 모르겠다 치죠. 아무튼 저번 사건, 아홉 시 뉴스에 며칠 내내 나오게 해서 다행이죠?”

    “딱히. 고작 오가장이랑 만월산 산적패 때려잡는다고 만족할 수가 있습니까? 이번 사건으로 인한 화제를 반도 전체에 옮겨붙게 해야 돼요. 그래야 정치권이 움직이고 경찰이 움직여서 무림 깡패를 때려잡게 될 겁니다.”

    “어······.”

    “말 섞다 말고 어디 봅니까?”

    “스마트폰이요. 정확히는 인터넷 기사 보는데······ 회장님도 이거 봐요.”

    “보긴 뭘 봐?”

    “우리 엿 된 거 같아요.”

    “자꾸 뭔 소리······ 씨발.”

    “나쁜 말 하지 마요!”

    “씨발.”

    *******

    달리는 차 안에서 허풍개가 물었다.

    “그녀가 떠난 건 몇 달 전이란 말씀입니까?”

    홍나연이 대답했다.

    “예.”

    “황군은 그걸 알면서도 방치했다고요?”

    “식량과 생필품만 보급해드렸죠. 산속에 계속 계실 수 있게요.”

    “왜?”

    “월녀님은 존엄하게 떠나고 싶어하셨어요.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등신불처럼? 자발적으로 천천히 죽어가겠단 걸 내버려뒀다고? 그녀는 중도 아닌 도사인데.”

    “변명하진 못하겠군요. 저희도 후회 중이니까.”

    “애초에 의사는 왜 안 부른 겁니까?”

    “불렀습니다.”

    “불렀다고?”

    “의사한테 물어보니 치매는 아니라 했습니다. 뭔 놈의 치매 증상이 저러냐고. 이번 일에도 자문을 구해봤더니, 주변에 접근하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치매가 어딨냐던데요.”

    허풍개는 조금 생각해보고는 입을 열었다.

    “치매일 수도 있죠. 물론 아닐 수도 있고.”

    “의원으로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그녀와 같은 무공을 익힌 놈으로서 말하는 겁니다. 저는 벽 너머에 있는 인간을 볼 수 있어요. 상단전이 개통됐거든.”

    “그거 참 대단한데, 지금 무공의 성취를 자랑하시려는 건 아닐 테고······”

    “상단전이 개통된 건 그녀도 마찬가집니다. 상단전이 뭡니까?”

    “머리죠?”

    “대충 뇌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녀의 뇌는 검을 띄우고 제한적인 투시를 하게 된, 여러모로 보통 사람의 것과는 다르게 발달 된 뇌입니다. 그런 뇌가 고장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르겠네요······.”

    “그래요, 모르죠.”

    그러니까 같은 사례도, 알려진 치료 방법도 없을 터였다. 차 안에서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허풍개가 물었다.

    “그래서, 황군에선 어쩔 겁니까?”

    “그분을 진정시켜야지요.”

    “어떻게?”

    “일단 물리적으로라도 붙잡아서, 최선을 다해 약물치료를 하든 어쩌든······.”

    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허풍개는 애써 생각했다. 그나마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고.

    월녀가 죽인 사람이야 많지만 아무나 죽여대던 것은 아니란 게 다행이다.

    그녀의 광증이 도진 이후, 지금까지 크게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아직 없다. 지금 이대로라면 그녀가 말년에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수치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노화가 정신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음도 알려져서 다행이다. 덕분에 현재 국민들은 그녀를 미친년이라고 욕하는 게 아니라 동정하고 있다니까.

    그래, 그녀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 자신과 달리 수치스러운 일 따윈 한 적 없는 그녀는 계속 고결한 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기어이 무슨 일을 저질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 전에 막아야 할 것이다.

    잠시 후 차량은 만월산 앞에서 멈추었다.

    “부령님!”

    황군 고수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들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군이 급히 불러낸, 한국의 다른 무림인들도 여기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허풍개는 자신이 사극 촬영장에 잘못 온 줄 알았다.

    희거나 검은 한복에 낡은 모피 옷을 입은 무림인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리 입고 있답니까? 검이 날아다니면서 접근하는 사람들 공격한다니까, 찔리기 싫음 방검복이라도 입고 와야하는 것 아닌가······”

    이풍이 다가가서 물어보니 모피 옷을 입은 한 무림인이 대답했다.

    “절세고수의 칼을 방검복 입는다고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런 차림이 낫지요. 월녀님의 향수를 자극하려면 말입니다.”

    “향수라니?”

    “이 모피 옷, 녹림이 독립운동할 때 입던 복장입니다. 같은 독립운동가이신 월녀님께는 친숙하겠죠? 날아다니는 검이 아무나 해치는 게 아니라 사람 가려가며 공격한다니까, 복장을 이렇게 입는 게 아마 도움될 겁니다.”

    눈앞의 무림인이 녹림도임을 깨달은 이풍은 흠칫했다. 요새 큰 사고를 친 녹림도가 여기 나오다니?

    녹림뿐만 아니라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들도 몸값 비싼 고수들을 여기 보냈다. 그들은 월녀를 제압할 준비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준비를 더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송을 위한 준비였다.

    사건이 사건인지라 현장에는 방송국 차량이 한가득했다. 그리고 어딘가의 가주며 회주쯤 되는 무림인들은 카메라맨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한국 독립과 한국 무인들의 영원한 우상, 월녀님께 일어난 일을 저희 한국 무인들은 진심으로 유감으로 여깁니다. 그분을 돕기 위해서라면 한국 무인들은 결코 몸을 사리지 않을 것입니다.”

    허풍개는 무림맹이 이 사건을 일종의 거대한 이벤트로 여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간의 시선을 두 무림 문파의 추잡한 총격전에서 백이십 세 독립운동가에게 일어난 비극으로 돌릴 만한 이벤트, 그와 동시에 한국 무림인들의 기여를 보이기 위한 이벤트 말이다.

    허풍개가 주먹을 움켜쥐던 그때였다.

    검은 차 한 대가 다가오더니 멈추었다. 그 안에서 노인 한 명이 내렸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노인을 향했다.

    “총채주님? 한 말씀······”

    구십 세에 가깝지만 여전히 당당한 풍채의 노인은 카메라 빛을 피하지 않았다. 옛이야기의 호걸처럼 미소 지으며 기꺼이 인터뷰에 응했다.

    “예, 반갑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구자성이었다. 한국 녹림의 총채주가 여기 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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