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객 허풍개 - [4]
허풍개는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미쳤소?”
“미치긴.”
“늑대를 내쫓고자 범을 부르는 것조차 아니군. 갈색 늑대를 쫓아내려고 회색 늑대를 부르는 셈이잖아.”
“그래, 무림맹이나 마교나 똑같은 거 알아.”
“알면서 왜.”
“부르려는 게 회색 늑대가 아니라 금색 늑대니까.”
“털색이 중요한가?”
“중요해. 해외종이라 눈에 잘 띄잖나? 게다가 제 패거리가 이 땅에 없으니 저 멀리서 불러와야 하는데, 그것만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면 여기 자리 잡지 못하게 막을 수 있어. 이 땅에 적응 끝난 갈색 늑대보다 훨씬 뿌리뽑기 쉽지.
그놈의 토착종을 몰아내려면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지······. 이번에 일 저지른 게 오가장이던가? 조선 시대에서부터 유력가문이었지 아마.”
박 회장은 이번에 오가장이 몰락할 것이며, 그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씨 가문이 인천에 터 잡고서 만들어낸 시의원이 몇 명이요 인천 시장이 몇 명이다.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뭐 하려면 거기 가주한테 인사부터 해야 했다.
요즘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그놈들 인맥이 사라진 건 아니라서 그놈들한테 후원받은 고위인사들이 각계에 널렸다. 어지간한 중범죄를 저질러도 인천 시청과 인천경찰청이 합심해서 그놈들을 감쌌을 텐데, 이번에는 일이 너무 커서 그러지 못할 뿐이다······.
그 웅변을 듣기 귀찮았던 허풍개가 도중에 끼어들었다.
“내 알기로 말이요. 해외종이 일단 못 들어오게 하는 건 쉬운데, 들어오게 한 이상엔 쫓아내기 어렵다고 알고 있거든.”
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베스나 황소개구리, 악명 높은 외래종들 나도 알지. 그런데 그렇지 대부분의 해외 생물은 적응 못 하고 죽어. 죽고 사라지니 유명하지 않을 뿐이야.”
“마교 수장쯤 되면 베스나 황소개구리일 것 같진 않고?”
“뭐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박 회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갈색 늑대가 있는데 금색 늑대를 들여오면 안 될 이유는 또 뭔가? 둘이 공존하지 못할 게 확실한 이상 결국 늑대는 한 마리만 남는 것 아닌가?”
“그 마교 기지배는 총을 팔잖나. 온갖 약물도.”
“내 보기엔 기존 깡패들이 하는 짓이랑 별 차이도 없어. 그리고 그게 내 알 반가? 외국 범죄조직 못 들어오게 막는 건 국정원이랑 경찰 일이지 나 같은 사업가가 할 일이 아니잖나.”
허풍개는 눈을 깜박였다.
그놈의 금색 늑대, 댁이 도왔으니 댁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 너머로 나오려 했지만 도로 삼켰다.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회장 놈 감정 상하도록 실랑이 계속할 이유가 뭔가. 내가 언제부터 그놈의 공익에 신경을 썼다고?
“뭐 불만 있나?”
박 회장의 물음에 허풍개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래서 모산파 갈 건가, 안 갈 건가?”
“뭐, 갈 수 있으면 가야지.”
“그럼, 됐네. 아무튼 이번 일은 정말 유감이야. 말로만 사죄하느니보다는 돈으로 줄 생각인데, 그게 낫지?”
“훨씬 낫지. 돈보다는 영약으로 주는 게 낫고.”
박 회장이 웃었다. 윙크하더니 주머니에서 목함 하나를 꺼냈는데, 허풍개는 사절하는 법 없이 바로 받아 챙겼다.
“그래서, 더 묻고 싶은 거 있나?”
그리고 허풍개가 물었다.
“회장님 당신, 금발 기지배랑 동맹이면 산적 두목과도 동맹이겠군. 금발 기지배랑 산적 두목이 동맹이니까. 맞소?”
박 회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그놈 부하가 내상까지 입으면서 나한테 총질하던데. 분명 구자성이 뭔가 말해둔 게 분명하거든. 나 제끼려고 절세고수 셋이서 합의라도 했나.”
박 회장은 정색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정말?”
“산적 새끼 생각을 내가 알 게 뭔가? 내 그 새끼도 죽여버리고 싶은데 일단 협조하니까 참는 거야. 하여간 그 좆같은 새끼······.”
박 회장이 떠난 뒤, 이록 검사가 도로 들어왔다.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민들 말 들어보니 진짜 이름 높은 의원이시던데. 함부로 깡패로 몰아가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저자세다.
단순히 회장 친구라서는 아닐 테고, 억지로 잡아넣지 못하게 된 마당에 검사라는 인간이 피의자를 취조실도 아니고 병실에 찾아와서 압박한 일이 걸려서 저러는 모양이다.
변호사도 없는 와중에 뭔가 수작이라도 부리려고 한 것일까? 물론 그것은 허풍개가 알 바가 아니었다.
“저 깡패 맞으니까 됐습니다.”
“너무 비꼬진 마시고. 나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닌 것치곤 열심이시던데.”
“그거야 뭐, 나 학생 때부터 장학금 주신 회장님이 권유하니까 의욕 없어도 열심히 하는 거죠 뭐.”
이록 검사는 요즘 세상에 깡패 잘 때려잡는다고 정계라도 진출할 수 있나, 하고 중얼거렸다. 부장 검사는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리 설치냐며 한바탕 욕설을 지껄였다고도.
그리 잔뜩 불쌍한 티를 내더니 언제 술 한번 사겠다고, 접대 한번 제대로 하겠다고도 말했다.
허풍개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미안해서 그래.”
“미안할 거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 깡패 맞고, 법 어기면서 돈 버는 놈입니다. 검사님이 법 어겼다고 비난할 처지가 되나. 어디 가서 이번 일 말 안 합니다.”
“그래도······”
“뭔가 해주고 싶으면 여기서 빨리 내보내 주기나 해요.”
이록 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보지요.”
*******
“아니, 빨리 나오셨네! 마중 나가게 연락이라도 하시지!”
“뭐하러.”
“두부 사둘걸!”
허풍개가 사무소에 들어오자 이풍이 달려와 와락 끌어안았다.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몸을 밀쳐냈다.
“나 콩도 안 먹는 거 모르냐.”
그리 쏘아붙이고는 바로 사무소를 내려가 침술원을 열었다. 잡담하거나 그동안 고생했노라며 인사를 나누는 일조차 없었다.
그러자 이풍이 섭섭해하는 걸 넘어 당황했지만 허풍개는 거기 신경 쓸 수 없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와중에 갇혀 지낸 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공덕을 쌓고, 수련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도 자길 위해 수고한 사람들에게 매몰차게 굴 수는 없다. 침술원 영업을 종료하고는 사무소에 도로 올라와 감사의 말을 건넸다.
“고생했습니다.”
그제야 이풍이 씩 하고 웃었다.
허풍개는 이도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쪽도 나 구명하려고 힘썼다고?”
이도혁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음. 뭐.”
“고맙습니다. 뭐 받고 싶은 거 있나?”
“괜찮아요.”
“싸구려나마 영약이라도 한 알 줄까.”
“아니, 아니. 정말 괜찮아. 정말······.”
이도혁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말을 흐렸다.
그놈의 구명 운동은 실패였다.
무적비비탄에게 도움받은 사람들에게 연락하자니 그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가족에게 말해보았다.
알다시피 증조부님이 허풍개 의사에게 구해진 데다 나는 무적비비탄에게 구출된 적 있는 놈이다. 지금 그 제자가 누명을 썼다. 마땅히 은혜를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둘 다 난색을 보였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데 웬 조폭계 일에 휘말리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그놈의 구명운동은 가족 하나 끌어들이지 못했다. 강렬한 수치심과 회의감만 남기고 끝났다.
이풍이 중얼거렸다.
“하여간 씨발, 그 은혜도 모르는 버러지들······.”
순간 자기 부모를 욕하는 줄 알고 이도혁은 흠칫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이풍이 지금 그 세 여자를 욕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구출되어놓고 엿을 먹인 그 세 여자들.
이도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평소 이도혁은 눈앞의 절세고수를 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반말하다가 존대하다가 그랬는데, 죄책감이 머리까지 꽉 찬 지금은 존대였다.
허풍개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괜찮죠. 왜, 뭐 문제 있어 보이나.”
“체포될 위험도 무릅쓰고 구하러 갔더니 배신을 당했잖아요.”
“내 멋대로 도운 거고, 도움 거절할 기회도 안 주고 대뜸 저질렀는데 뭔 배신입니까. 어차피 내가 안 갔어도 늦게 도착했으나마 경찰이 해결할 수도 있었는데.”
“해결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셋 다 죽거나 크게 다칠 수도 있었고.”
“뭐 그랬지. 그런데 그거 들이밀면서 은혜 갚으라고 윽박지르기라도 해야 하나.”
이도혁은 허풍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그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화도 안 납니까?”
“화? 왜?”
“아니, 화날 일이니까······.”
“그 아줌마들은 오억씩 벌어서 좋고 난 좆대로 해놓고서 금방 풀려났으니 다 좋은 거 아닌가.”
그러더니 허풍개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난 협행하면서 보람 같은 거 안 느낍니다.”
확실히 저 말을 이도혁은 예전에도 들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눈앞의 젊은 협객이 사이코패스인 줄로 알았던가?
“보람을 느끼고 싶으면 소방관을 해야지 협객을 왜 해.”
그러나 지금 이도혁은 눈앞의 젊은 도사에게서 한 늙은이를 보았다. 그 늙은이는 세상사에 기대를 버린 늙은 도사다.
이풍이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속도 좋아? 난 개빡쳐 죽겠는데. 지금 피해자 찾아가서 협박이라도 했다간 바로 철창행이라 몸 사리는 거지, 성질 같아선 그냥······”
허풍개가 말을 받았다.
“헛소리 말고. 내가 도와주는 대가로 오가장에서 돈 주기로 했는데 그거나 체크해요.”
“오가장 새끼들 지금 자기 앞가림도 벅찬데 토해낼 돈이 있나 모르겠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건가.”
“뭐 그럴 순 없지. 이거 은림이 그 아가씨한테 미안해서 어쩌나? 뭐 그 아가씨는 자기 몸이 가장 큰 재산이니 오가장 망해도 잘 먹고 잘 살 거긴 한데······”
이풍이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허풍개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뒤돌아서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끝내기 위한 수련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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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건 이번 일이 선행이었음은 분명했다. 큰 공덕으로 칠 만한 일이었다.
공과격에 나름대로 큰 숫자를 기록할 수 있었지만 허풍개는 웃지 않았다. 요새는 이 일에 회의감이 드는 탓이다.
그래도 뭐, 이번 일로 아예 소득이 없던 건 아니다.
허풍개는 그날 전투에 나타난 자기 몸의 조화를 떠올렸다. 온몸에 번개가 흐르던 그 조화, 정확히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때 감각을 떠올리며 앞으로 수련하면 재현할 수 있을 듯도 하다.
듣기로는 만력제가 호풍환우하거나 번개를 불러낼 수 있었다던데, 이럴 수도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만력제처럼 승천하기 위한 길 중 하나일까?
다른 절세고수는? 그들은 자신보다 수련한 기간이 많다. 그들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조화 한두 가지를 경험했거나 몰래 숨기고 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앞으로도 필사적으로 수련해야 하리라.
허풍개는 복기를 마친 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었다.
요새 겪은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려 했지만 모조리 쫓아냈다. 불쾌한 일 꽤 당했지만 그게 뭐 중요하다고.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뭔가 받기를 바라는 건 마음 수련에 방해될 뿐이요, 더 나아가 정신건강에 해로울 뿐임을 허풍개는 이미 알았다.
이미 아는 사실들을 다시금 되새겼다.
공덕이 중요할 뿐, 다른 사람에게 뭘 했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존재 또한 중요하지 않다.
인간의 정신은 소우주요, 천상계는 대우주이다. 둘을 합쳐 완전하며 다른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도사가 오곡조차 입에 넣지 않는 이유가 뭔가. 곡식은 대지의 정(精)이요, 하늘에 오르려거든 지상의 것을 거부해야 하는 까닭이다.
지상이며 지상 위 다른 것들은 선도 수행에 필요하지 않다. 끔찍하게 복잡해진 사회도, 칭송과 명예도, 감사와 보람도 다 쓸데없는 것이다.
허풍개는 명상하기 위해 내부로 침잠했다.
성난 번개가 내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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