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45화 (45/103)

협객 허풍개 - [3]

이 와중에 현장에서 붙잡힌 허풍개가 몸을 빼내기는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검찰이 보기에 무림 깡패가 돕겠다고 끼어든 게 좋게 보일 리는 없다. 게다가 웬 협객이 순수하게 돕겠다고 나섰다는 것보다는 한패가 증원을 왔다는 것이 훨씬 그럴듯한 정황 아닌가. 순순히 풀어줄 리는 없다.

그래도 아예 쭉 붙잡혀 있으리라 여기지는 않았다. 조사와 심문을 거친 끝에 풀려나기는 하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깡패건 아니건 거기서 행한 일은 명백하지 않은가.

대체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가 문제요,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다는 이유로 모산파와의 계약이 엎어지는 게 문제일 뿐이다.

허풍개는 이 사건에 끼어들며 그 정도를 각오한 바였다. 조금이라도 더 바삐 움직여 등선을 위해 노력해도 모자랄 마당에 구치소에 발 묶이는 것은 뼈아픈 일이요, 천이백억짜리 계약이 날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감내하리라고.

아예 공범으로 묶여 수감되는 일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그러리라 여기지는 않았는데, 어디까지나 그것은 최악의 가능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예상을 뛰어넘어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병실을 찾아온 검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여기 통화 내역, 사건 당시에 오진백이 댁한테 전화 걸었지?”

오가장 가주를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자기네와 연관되게 하기 위해 정말 자기 번호로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뭔 얘기 했는지 말해보라니까.”

검사는 추궁을 계속했다. 피의자가 변호사와 만나지도 못한 마당에 병실에서 이러는 게 뭐한 것일까. 지금 검사 명찰은 달고 있지 않았는데, 허풍개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록. 하도 자주 찾아온 데다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라 외워버렸다.

허풍개가 대답하지 않자 이록 검사는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묵비권 행사 그거 별로 똑똑한 짓 아니야. 죄가 있든 없든 조사하는 사람한테 제대로 협조 안 하면 악감정만 쌓이게 만드는 거야. 그래서, 거기 왜 갔냐니까?”

허풍개는 고심 끝에 대답했다.

“도우려고.”

“누구. 오진백이?”

“거기 붙잡혀있다던 민간인 셋.”

이록 검사가 혀를 찼다.

“거기 있던 아줌마 셋은 그리 말 안 하던데?”

*******

병실에 찾아온 이풍이 고함질렀다.

“그 씨발년들, 미친 거 아니야!”

당시 노래방에 억류되어 있던 세 여자는 허풍개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느니,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했다느니 하는 얘기만 했을 뿐이다.

셋 모두, 자기네를 도와주려 한 젊은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강간미수 피해자가 현장에서 도와준 사람을 위해 진술하지 않는 일은 들어본 적이 있다. 그리하여 의롭게 나선 사람이 강간미수범을 폭행했다고 고소당한다든가, 심지어는 일을 저지르려 한 범인으로 몰리는 억울한 경우다.

그런데 이번에는 증인이 셋인 마당 아닌가. 셋 다 그리 희귀할 만치 몰염치한 사람이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허풍개는 자신이 도우려 왔음을 어필하고자 일부러 그녀들에게 말까지 걸었다. 그랬는데도 셋 다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구는 데다 자신을 위한 증언까지 거부하다니?

이것은 화가 나는 것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한 일이라서 허풍개는 이 일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변호사 선임은 했지?”

허풍개의 물음에 이풍이 대답했다.

“했죠! 무림맹에서도 돈 엄청 썼어요.”

“그런데도 그러나.”

“진짜 말이 안 돼! 변호사가 증인 셋 다 만나서 사정하려 했는데, 말 걸어보지도 못하고 다 쫓겨났더라니까?”

“셋 다 말이지. CCTV에 내가 뭐 했는지도 안 찍혔고?”

“카메라가 총알 맞아서 안 찍혀 있었대. 장난하나?”

이풍은 한동안 씩씩거리더니 화내기도 지친 모양이었다. 탈진한 듯 억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 아닌가.

“녹림에서 뭔가 수작 부린 거 아니요? 그 세 년한테 협박을 했다든가, 뇌물을 줬다든가 해서······.”

“무슨 이득이 있어서? 날 나쁜 놈으로 만든다고 지네들이 착한 놈 되는 것도 아닌데.”

“절세고수를 빵에 가둘 수 있으면 이득 아니요?”

허풍개는 조금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이 낮아. 그놈들 지금 아무리 몸 사려도 모자란데, 피해자들을 만나서 협박하거나 뇌물을 준다? 쌍팔년도도 아니고 요즘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형님 안 계시면 구자성이가 한국 무림 유일한 절세고수로서 다 해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라니까.”

“그럼 뭡니까?”

이풍의 물음에 허풍개가 대답했다.

“녹림이 아니라 다른 놈이야.”

“다른 놈, 누구요?”

“구자성이보다 위험한 놈.”

“혹시 그 양반이야?”

“아마.”

“그런, 씨발······”

이풍은 이후로도 한참이나 성을 냈다. 그리고 무림맹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겠노라 맹세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위로차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맘 편히 먹어요. 어떻게든 나오게 할 테니까. 이도혁이도 형님 돕겠다고 요새 엄청 바쁘더라.”

“도혁이가?”

“응. 사람 모아서 구명운동 벌이겠다느니 뭐니 하면서 열심히 발로 뛰고 다니는 모양이던데? 아주 기특해. 내가 그 새끼 처음엔 그냥 싼 값에 험한 일 시킬 수 있는 호구라고만 생각해서 잘 대해준 건데, 지금 보니 꽤나······”

이풍이 물러간 뒤, 허풍개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다.

그러나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도 해오던 수련이 오늘만큼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맘이 너무 심란한 탓이었다.

불안감이 머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기어이 기소되어 갇혀버리면 어쩌느냐는 생각.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러 풀려나지 못하면 끝장이다.

일단 형을 살게 되면 그 수감 기간은 남은 수명의 대부분을 잡아먹을 것이다. 감옥에서는 공덕을 쌓지도, 영약을 먹기 위해 돈을 벌고자 일할 수도 없다. 그대로 시간이 흘러버리면 끝장이다. 그대로 늙어 죽고 만다.

그것은 자신이 당할 수 있는 그 어떤 죽음보다도 끔찍한 일이다. 감옥 안에서, 느리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니? 하루하루 다가오는 죽음을 체감해야 할 것이다. 분명 그때 자신은 그 두려움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고통스럽게 불로 태워 죽이더라도, 톱으로 사지를 잘라 죽이더라도 그보다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상상은 상상만으로 너무나 아찔해서, 허풍개는 명상하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병실을 뛰쳐나가거나 탈출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대, 그 사람이야말로 이 일을 이 지경으로 이끈 사람이자 자신을 그나마 도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음 날에도 이록 검사가 찾아왔다.

분명 자신은 사건에 얽혔기는 하지만 주동자는 아닌데, 어째서인지 이상할 정도로 자주 찾아오고 있었다.

“당신 평소에 침술원 운영하면서 자리 비우는 일이 꽤 있었다는데 맞나? 다른 직업으로 위장하고 있다가 가끔 무림 조직에 청부받는 외부 히트맨으로 일하는 거 맞지?”

허풍개가 입 다문 가운데, 검사는 계속해서 이것저것 추궁했다.

“묵비권 그거 별로 똑똑한 짓 아니라고 말 안 했나, 응?”

초짜인 걸까? 그 언성이 갈수록 높아지던 와중이었다.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병실에 드리웠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외모와 기업인답지 않은 풍채, 박 회장이 말했다.

“일 열심히 하는군? 보기 좋아.”

이록 검사는 불청객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바로 일어나서 허리를 굽히며 깍듯한 예를 표했을 뿐이다.

“예,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박 회장이 웃었다.

“그런데 이 사람한텐 안 그래도 돼.”

“예?”

“이 사람 내 친구야.”

이록 검사는 눈만 껌벅거렸다. 박 회장이 손을 휘저었다.

“뭐해? 가봐. 말 좀 섞게.”

이록 검사는 조금 주저하더니,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물러났다. 이제 병실에는 둘만 남았다.

박 회장이 말했다.

“방금 그 친군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자기 할 일 하려고 했던 거니까.”

허풍개가 물었다.

“회장님이 스폰하는 친구요?”

“맞아. 그래서 대체 여긴 왜 끼어들었나? 또 그놈의 협객 노릇이야?”

“그렇다면.”

박 회장이 눈매를 좁혔다.

“요즘 세상에 그런다고 칭찬 받겠나?”

“칭찬 바라서 한 거 아니요.”

“뭘 바라서 했건, 경찰 있는데 괜히 나대지 좀 말라니까? 이번에는 그 새끼들이 출동부터 늦게 해서 내가 별로 할 말이 없긴 한데······.”

“그래서, 훈수 두러 왔나?”

“아니. 당신 빼주겠다고 말하러 왔어.”

“그럴 수 있소?”

“있어.”

“아무리 검찰에 끈이 있어도 지금 상황에 뭘 어쩌긴 어려울 것 같은데.”

“오가장 두목 놈이나 직접 총질한 새끼들은 나도 못 빼주겠지만 뭐, 고작해야 BB탄이나 날려댄 당신 하나 정도야 기소 안 당하게 해줄 수 있지.”

“그렇다면, 고맙소.”

“너무 고마워하진 말아.”

사실, 정말로 고맙지는 않았다.

허풍개는 짐작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

“세 여자한테 증언 조작하게 시킨 거, 회장님이 그런 건가?”

“맞아. 내가 시켰네.”

의외로 박 회장은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너무 원망하지도 말고. 두당 오억씩 주겠다는데 안 넘어가면 그게 마더 테레사지 노래방 도우미들이겠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왜 십오억이나 썼소?”

“당신이 내 구상을 망칠 뻔했으니까.”

“구상이라. 나한테 방송국 습격시켰을 때랑 비슷하게 일 키울 셈인가 보지.”

“당연히 그래야지. 사건을 조명하고 또 조명해서 무림에 대한 혐오를 키워야 해. 정치권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게 해야 하고. 확실히 그럴 만한 일 아닌가?”

박 회장이 계속 말했다.

“이건 두 무림 조직의 주변 민폐 신경 안 쓰는 더러운 항쟁이야. 실제로도 그랬으니 당연히 TV에도 그리 나와야 하지. 그런데 여기에 무림 협객이 끼어들어 이 사건을 영웅 서사로 만든다? 그건 용납 못 해.”

“그래서 사건 조작까지 하셨다. 방송국 습격 때도 그러다가 일 망친 걸로 아는데.”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니야. 당신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욕보게 만든 건 뭐, 이해해줄 거라 믿네. 애초에 당신은 명예욕 전혀 없지 않은가. 위인전까지 나온 양반이 신분 세탁이나 하고······ 그렇지? 허풍개 노사님.”

허풍개는 새삼 놀라지 않았다. 박 회장도 허풍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 선대 회장과 허풍개가 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그나마 당신 얼굴 팔리는 일은 막았어. 현장에 BB탄 쫙 깔렸으니 무적비비탄과 관련됐네 어쨌네 기사 나오는 건 못 막았지만, 다행히 공중파에서도 그러지는 않는 마당이고.”

“그것도 당신이 손 썼나?”

“무적비비탄의 팬들이 목소리 내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긴 한데······ 어쨌건 당신한테 도움이 되긴 할 거야. 그러니까 허풍개 노사님? 모산파로 가.”

“글쎄, 지금 내가 거기랑 계약이 과연 될까?”

“돼. 나도 모산파에 투자했고 다른 회장도 끌여 들였어. 이번에 모산파에서 회의 열리는 거 다른 회장들 대표로 출석해서 계약 파투 나지 않게 막았지.”

“그건 확실히, 고맙군.”

박 회장이 웃었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을 반복했다.

“모산파로 가.”

박 회장이 계속 말했다.

“모산파에 가서는 돌아오지 마. 수련하고, 비싼 영약 먹고 그러라고. 무림 깡패들이랑 얽히지도 말고. 다 늙어서 이런 대접이나 받고 이게 뭔 꼴인가? 가뜩이나 이제 무림이 시끄러워질 건데 계속 있으면 욕봐. 그러니까 모산파에 가. 당신한텐 그곳이 어울려.”

정말이지 허풍개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확답은 주지 않자 박 회장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무림 깡패들 혐오하는 거 알지?”

“알지.”

“당신은 예외야. 사실 당신 맘에 안 드는 게 한두 군데가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당신마저 그냥 깡패 새끼라곤 폄하 못 하지. 당장 우리 아버지만 해도 당신 도움을 얼마나 받았는데? 그날 내 강아지 무덤 같이 만들어줄 땐 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아나······.”

허풍개는 물끄러미 박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하나 물읍시다.”

“묻게. 뭔가?”

“그 금발 천마랑 손잡았나?”

이번에는 박 회장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왜?”

“당연히, 무림 깡패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기 위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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