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산파 정보라 - [3] (수정)
지나치게 달콤한 건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들었다. 허풍개가 말했다.
“숨기면 안 될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저 동자공 익혔습니다.”
박애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 말을 옆에 선 명국인에게 번역해주었다.
번역을 듣고서 명국인의 표정이 굳었다. 허풍개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명국인이 말했다. 그것을 박애진이 번역해주었다.
“같은 사내로서 크나큰 유감을 표하고 싶대요.”
허풍개는 표정을 관리하고자 애쓰며 말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무공 광고할 때 큰 약점이 있단 말입니다.”
“약점이라뇨?”
“고수라고 배우러 갔더니 동자공 익히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저것도 배워야 저만큼 경지에 오를 수 있나 싶어서 배울 의욕이 줄겠죠. 안 배우면 저만큼은 안 되겠구나 싶을 테고.”
내가 절세고수씩이나 되어서 어디 재벌가에 무공 사부로 취직하지 못하는 이유가 뭔가. 재벌가 자제들이 동자공이란 단어만 들어도 소스라치는 까닭이다.
그 점을 구구절절 설명했더니 두 모산파 도사는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박애진이 말했다.
“문제없을 것 같다는군요. 제가 보기에도 그렇고요.”
“어째섭니까?”
“아시다시피 요즘 무공 시장 주 타겟이 노인층이잖아요? 노인들 상대로 장사할 건데, 그때 동자공은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대요.”
“강점?”
“욕구를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억지로 참아야 하는 노인네들한테 그래야 할 훌륭한 이유를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네요? 실제로 요새 노인층엔 동자공이 인기라고도 하고요.”
허풍개는 아연했다. 어떻게든 계약을 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절세고수인들 이렇게까지 끌어들이려 할 이유가 있나? 명국인들의 과도한 수준의 자국 우선주의를 고려할 때, 외국까지 와서 이러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풍이 보기에도 조금 이상한 상황인 것 같았다. 조금 생각해보더니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혹시 명국에도 그 영상 퍼졌습니까?”
박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교 아가씨랑 겨루는 영상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퍼졌지요. 그거 보고 얼른 달려온 거고요.”
“어우 씨, 우리 천마님 너무 사랑스럽네. 이제 보니 은인이야 아주······.”
이풍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박애진이 부연했다.
“게다가 방금 본 것도 있고요.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약점은 덮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방금 본 거면, 칼 둥둥 떠다니는 거 말씀하시나?”
“예. 어검술 말이에요. 그게 정말 된다는 거야 한국 드라마 보고 알았지만 실제 보게 될 줄은······.”
이풍과 박애진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즐거운 듯한 그 대화를 허풍개는 반쯤 홀린 기분으로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모산파의 초빙이라.
모산파가 아무리 영세했다 해도 무림 명문이다. 무협 소설에도 나름의 비중을 차지하는 정파 중의 정파 아닌가.
그리고 허풍개는 정파에 언제나 동경심을 가져왔다.
자신이 무림 깡패라는 사실, 그러니까 사파 무림인이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지녀온 마당이다.
자신이 월녀의 스승이라고 떳떳하게 밝히지 못한 이유가 뭔가. 무림 깡패 따위가 스승임이 알려졌다간 그녀의 명예에 흠집이 날까 봐 두려웠던 까닭이다.
위인전에서야 허풍개 의사라면 독립운동가로 나오지만 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허풍개는 자신이 사파 무림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이 수치스러운 일이란 것도 알았다. 얼마 전에는 중고딩들을 시베리아에 보내기까지 한 마당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막 나가는 사파 새끼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런데 이제라도 정파 명함을 달 수 있다면, 그러고도 만족스러운 수입을 올릴 수 있다면······.
너무나 달콤한 일이기에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갑자기 한국을 떠야 한다는 사실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게 이득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이곳이 120년이나 살아온 곳이란 사실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내와 자식의 무덤이 이 땅에 있지만 이장이 뭐 별 거라고. 아내의 무덤에는 뼛가루도 묻지 않고 칼 한 자루 묻었을 뿐이니 꺼내면 될 일이요, 자식의 유골함도 꺼내서 옮기면 그만이다.
그리고, 하아린······.
명국으로 떠나면 그녀의 얼굴을 보기 어렵게 되겠지만 어차피 지금까지도 일부러 거리를 벌려오지 않았는가. 자신이 저 멀리 가버리면 그녀에겐 이로운 일이리라.
둘 다 120살이 넘어선 지금, 둘은 이제 사제 관계를 넘어 유일하게 같은 시절과 기억을 공유하게 된 사람이라는 사실은 애써 무시해야 할 것이다.
허풍개가 한참 생각에 잠겨있는 가운데, 이풍과 박애진의 대화는 어느새 꽤 깊은 영역까지 이르렀다.
“절세고수 합류했다고 광고하면 모산파는 투자 더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겠죠. 투자 더 끌어모은 다음에 계약하길 바라세요?”
“그래요. 이왕 절세고수 광고해서 투자 더 끌어들일 거면 방금 본 어검술도 광고합시다! 확실히, 검 둥둥 떠다니는 것보다 투자자들 환장할 만한 게 또 없어. 싸구려 CG로 보이지 않으려면 사람들 좀 모아서 검증도 해야 할 테고······”
“시간 좀 걸릴 텐데 괜찮으실까요?”
“뭐, 괜찮아요! 어차피 나도 할 일이 있고 말입니다.”
“할 일이라 하시면?”
“한국 투자자들은 내가 좀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럼요. 내가 이 판에서 얼마나 굴렀는데? 게다가 박 회장 전화번호도 알고 있거든요? 그 양반이랑 세트로 무공에 관심 있는 재벌 노인네들 끌어들이면······”
이풍은 지금 여기 있는 누구보다 신이 나 보였다.
허풍개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보수를 협상하여 어떻게든 더 받아내려 애쓰는 것이 이풍의 주 업무였는데, 마침 상대는 한국에 인맥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마당 아닌가. 자신의 우위를 활용하여 그 어느 때보다 우월한 조건으로 계약할 기회였다.
둘이 대화를 마친 뒤, 이풍은 기대감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하는 걸로 진행해도 되죠?”
허풍개는 조금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서 허풍개는 자신의 아내를 떠올렸다.
정보라. 그녀는 즐거운 듯이 모산(茅山)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해주었더랬다.
그녀의 칼을 모산에 가져가 묻으면, 그녀의 영혼이 즐거워하지 않을까?
그녀의 영혼이 남아있는지 어떤지는 도사로서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
이후로는 놀라울 만치 일사천리였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앞에서 허풍개는 어검술을 선보였다.
카메라가 한 자루 검의 비행을 생생히 담는 가운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Bravo!”
허풍개는 떨떠름하게, 이풍은 내내 웃음을 거두지 못한 촬영 이후로도 쉴새 없이 계약을 진행해나갔다.
모산파에 투자할 후원자들을 국내외에서 모으고, 모산파의 장문인과 대화를 나누면서 일을 진행해나갔다.
이런 일에 허풍개는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그 일은 이풍이 전담해서 진행해나갔다.
그리고 약 두 달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이풍은 그 어느 때보다 들뜬 목소리로 계약의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4년에 1200억까지 계약금 얘기 나왔어요!”
허풍개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 정도면 메이저리그 스타급 선수나 받을 수 있는 계약금 아니냐?”
“구파일방이면 메이저리그 팀 못지않지 뭘! 내 보기엔 더 받을 수도 있어요.”
“지금 모산파가 별로 잘나가는 것 같진 않던데 그럴 돈은 있고?”
“괜찮아! 지금 모산파엔 돈이 없는데 모산파 장문인은 돈이 있대요.”
“문파보다 장문인이 부자라고?”
“왜, 지금 모산파 장문인이 게임 회사 대표라고 하거든요? 요새 전 세계 모바일겜 매출 1위라던데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돈 많은 양반이라 이거지.”
“예. 그런데 그 인간이 사회적 입지나 올려보려고 문파 인수한 거지 문파 운영해서 수익 얻는 거엔 아무런 의욕이 없었대. 모산파엔 얼굴도 잘 안 비추고 돈도 별로 안 보태줘서 모산파가 가난한 거라는데, 요새 투자자들이 몰려들고 하니까 그 양반이 드디어 모산파에 출근했단 겁니다. 지갑도 기꺼이 열겠다 하고요······”
이풍이 연신 즐거운 듯 말하던 중이었다.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아든 뒤, 이풍의 얼굴에서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 노래방에서 총격전?”
「예. 돈은 집안 땅 다 팔아서라도 드릴 테니까 모쪼록 와주십시오, 제발······」
늙고 거친 목소리, 오가장 가주의 목소리였다.
그와는 예전부터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이다. 심지어 같은 인천 무림인이기까지 하니 친목을 다져 마땅한 이웃인 셈이다.
그래서 이풍은 그를 대할 때면 늘 웃으며 예를 차리곤 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이풍은 허풍개마저 놀랄 만치 성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도와달라니, 미쳤소?”
「제발······ 요새 우리 은림이와도 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연을 봐서라도」
“아니, 씨.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전화기 너머 오가장 가주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풍은 주저없이 통화를 종료했다.
“뭐냐?”
허풍개가 묻자 이풍은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허풍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숨기려는 걸 보니 뭔지는 몰라도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이도혁이 들어와서는 소리치듯 말했다.
“이거 보셨어요?”
이풍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뭘?”
“지금 인터넷에 난리인데요. 노래방에서 웬 패거리가 총격전 벌인다고······.”
이풍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가.”
“예?”
“꺼지라고, 새끼야!”
이풍이 소리 지르는 가운데 이도혁은 황급히 방을 나섰다.
허풍개는 TV를 틀어보았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중, 하단에서 긴급속보가 나가고 있었다.
「인천 성난고래 노래방, 폭력단 총격전 발생」
이풍도 그것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저 병신 새끼들, 미쳤나 진짜······ 무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어?”
오가장 가주의 전화를 떠올릴 때, 저기 나온 ‘폭력단’이 오가장이란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저걸 나보고 도와달라고 했다고?”
허풍개의 말에 이풍이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저걸 우리가 왜 도와?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허풍개는 언급된 노래방과 이곳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차 타고 가면 5분 거리네.”
이풍이 기겁했다.
“형님? 이건 안 돼요. 진짜 안 돼.”
“알아.”
허풍개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이풍은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은 눈치였다. 둘 다 아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님, 저번에 총 맞아서 여기 온 새끼들 있잖아. 내가 그 새끼들한테 협박해서 돈 뜯어내자니까 형님이 뭐라셨소. 이런 일은 뉴스에 뜰지 모르니까 손 떼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이건 저번에 그것보다 확실하게 뉴스에 나와요. 보니까 이미 인터넷에 쫙 퍼진 모양인데, 이건 무림맹 위원이 아니라 국회의원이 나서도 못 숨깁니다. 얽혔다간 구치소에서 몇 주 있다 나오면 다행이고 한 패로 몰리면 아주 그냥 좆되는 거야.”
“알아.”
“그리되면 1200억짜리 계약 엎어지는 겁니다.”
“안다고.”
그때 허풍개와 이풍의 휴대전화가 동시에 진동했다.
도움을 청하는 오가장의 메시지가 왔나 하고 봤더니 아니었다.
- 긴급재난문자
[인천경찰청] 동인천 성난고래 노래방에서 폭력단 총격전 발생. 민간인 한 명 총상, 두 명 억류 중. 접근 및 외출 절대 금지
허풍개는 예의 메시지를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민간인 한 명 총상에 두 명 억류, 특히 총상이란 단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상황이 심각하다 못해 민간인이 죽어 나갈 지경인 모양이다.
경찰이 알아서 해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허풍개가 말했다.
“풍아.”
“예?”
“운전해라.”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형님, 내가 말했잖아!”
“일단 가서 바로 뭔가 하진 않고, 상황이나 보자. 짭새들이 잘 해결할 것 같으면 나대지 말고 돌아오고.”
“짭새들이 제 일 못 할 거 같으면 나댈 거고?”
“어쩌면.”
“절대 안 된다니까요!”
“네가 운전하기 싫으면 도혁이 시킬까.”
이풍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하는 생각을 허풍개도 당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천이백억짜리 계약, 일생일대의 계약을 코앞에 두고 이딴 일에 휘말려선 안 된다는 생각. 설령 그런 계약이 없더라도 이런 일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 모든 생각을 허풍개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풍이 말했다.
“아니, 갑시다.”
“미안하다.”
“미안할 일을 왜 해?”
이풍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소 밖으로 걸으며 말했다.
“형님 나설 필요 없을 거 같으면 안 나댈 거라고 했죠?”
“그래.”
“제발 그러길 바랍니다. 현장에 얼씬도 안 하는 게 최고긴 한데······”
둘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바삐 차량에 몸을 실었다.
모든 일을 빠르게 진행해야 했다. 운전하면서도 이풍은 전화를 걸어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박애진 씨? 저 이풍입니다. 그게 말인데요, 일이 생겼거든요. 예. 어쩌면 계약 진행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는데 상의하고 싶어서······”
*******
“그 절세고수, 혹시 기소되면 계약은 바로 취소할 거냐 물어봤다고?”
명국인 남자의 말에 박애진이 대답했다.
“어.”
“기소될지도 모를 일을 하러 갔다 이건가?”
“그렇대.”
“절세고수씩이나 돼서, 왜?”
박애진이 말했다.
“협을 위해서라는데.”
명국인이 눈매를 좁혔다.
“협?”
“뭔 소린지 이해가 안 되지? 그래서, 뭐라고 대답해? 혹시 구설수 휘말리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다 취소니까 당장 집어치우라고 협박이라도 해?”
명국인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럼?”
“무운을 빈다고만 전하지.”
“왜?”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절세의 경지에 오른 도사가 하는 일이잖나.”
“그게 뭐.”
“이해가 안 되는 일을 하니까 그 정도의 경지에 오른 것 아니겠나. 도가의 말학으로서 막아선 안 되는 게 아닐까.”
박애진은 조금 뜸 들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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