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40화 (40/103)

모산파 정보라 - [1]

허풍개는 눈앞의 목함을 노려보았다.

상자부터가 오만 원은 넘을 법한 목함, 그 안에 든 것은 십육억짜리 단약이었다.

요새 무적무적자의 위상이 높아진 덕에 시세보다 일억이나 싼 가격에 가져올 수 있었는데, 그래봤자 금전적인 이득이 생겼다고 보긴 어려웠다. 이대로 입에 들어가면 끝 아닌가.

“저번에도 비슷하게 말한 것 같지만, 내가 바람이라면 십오억 치 약을 받느니 그냥 돈으로 받고 싶을 것 같은데.”

허풍개의 말에 이풍은 히죽 웃었다.

“자식이라고 부모한테 돈 맡겨놨소? 주는 대로 받아먹어야지 어딜 감히 뭘 달라고 요구해?”

“처먹은 십구억 원 뱉어내 새끼야.”

“아, 음······ 방금은 농담한 거고, 애한테 동의받은 거 맞아요.”

“정말 맞아? 확인해봐도 돼?”

“예, 물론.”

그래서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았더니 경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약 먹겠다고 한 거 맞아요!」

허풍개는 한숨 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중학생한테 돈 얘기를 꺼내기는 싫거니와 제 아비 수입이 어떻다느니 말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친께서 이만한 돈을 벌어들인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고정수입이 있기야 하지만 하는 일이 워낙 위험한 일이잖습니까. 앞으로도 쭉 벌 수 있으리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만한 목돈이 생겼을 때 한 번에 다 써버리는 건 위험한 일인데요. 십오억이면 한 사람이 평생 먹고살기 충분한 큰돈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괜찮다니까!」

“영약 먹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까? 무공에 그 정도로 관심 있는 게 맞아요?”

「비슷해!」

“비슷하다니?”

「영약 먹어가며 무공 익히면 어린 외모 오래 간직할 수 있다던데, 맞아요? 특히 오빠한테 배우면 늙어 죽을 때까지 젊어 보일 수도 있다던데!」

차마 발뺌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첫 제자가 그녀임에야.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재능 없으면 똥만 만들고 마는 건데요.”

「괜찮아! 아무리 비싸도 복권은 긁어봐야지!」

그리 대답하는 이바람의 말에서 돈에 대한 갈망이라든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통화를 마친 뒤, 허풍개는 이풍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넌 대체 애한테 어떻게 기대감을 심어 넣었길래······”

“뭘요? 그냥 딸내미 교육을 했을 뿐인데.”

“세뇌한 게 아니고?”

이풍은 그저 웃었다. 허풍개는 그 낯짝에 주먹을 꽂아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튼 이바람이 자신의 딸은 아닌 것이다. 제 아비가 제 돈으로 뭘 해주겠다는데 이래라저래라하기는 어렵다.

이풍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 형님? 이제 바람이 불러와서 약 먹일 건데요.”

“그래서.”

“엄청 비싼 약은 막 먹이면 안 되잖아요. 고수의 도움이 있어야 원활하게 흡수되는데, 내가 아는 최고의 고수는 형님이거든······?”

허풍개는 기어이 한숨을 쉬었다.

“도와줄 테니까 불러와라.”

그리고 이풍이 웃었다.

*******

“지금 약을 섭취하면 기가 배 속에 가득 찰 겁니다. 그걸 단순히 소화한다고 몸에 기가 쌓이는 게 아닙니다. 기를 온몸에 전달하고 순환하게 만들어야 제대로 된 축기(蓄氣)가 되는데요. 이때 기를 온몸에서 순환케 하는 작업을 행기(行氣)라고 하는데, 할 줄 모르죠.”

허풍개의 물음에 이바람이 대답했다.

“어, 몰라요.”

“그걸 제가 도울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가부좌 틀고 앉아 등 내밀고 있으라고?”

“예. 옷 걷어 올리거나 할 필요는 없고.”

이풍은 제 늙은 형님과 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 형님이 아까 딸과 통화할 때 뭐라 했더라. 고정수입마저 끊길 수 있다느니 이런 돈 또 못 벌 거라느니 하면서 거의 저주에 가까운 비관적 전망을 늘어놓았던가?

거의 억지에 가까워 보였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만하다.

이바람이 십육억짜리 영약을 먹은 다음에는 영약이 아까워서라도 무공을 본격적으로 익혀야 할 것이요, 그리되면 정말 무림인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형님은 온갖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풍이 제 딸을 기어이 무림인으로 키우려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이 맞았다.

이풍은 제 딸을 무림인으로 키울 예정이었다. 그것도 가능하면 모두의 우러름을 받는 고수로.

“비싼 약을 한 번에 먹는 만큼 소화하기도 어렵겠지만 기를 중요 부위까지 전달하기도 수월할 겁니다. 운급칠첨(雲笈七籤)에 따르면 흡입된 기는 위에서 하단전으로 옮겨가 비축되는데, 이걸 최대한 멀리 순환하게 해야······”

형님이야 질색하겠지만, 그래도 워낙 성실한 양반 아닌가. 차마 돈 날리게 할 수는 없는지 중학생을 상대로도 성심껏 설명하고 있었다.

기어이 이바람이 약을 복용했다.

“더워······”

그녀는 온몸이 달아오르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허풍개는 주변에 차려둔 제단에 향을 피웠다. 하얀 연기가 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허풍개는 이바람의 뜨거운 등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에게 속삭였다.

“의식적으로 기의 움직임을 상상해요. 기는 하단전으로 향해야 합니다. 하단전은 배꼽 주변입니다. 상상했으면 그걸 위로 올려보내요. 중단전을 거쳐 상단전으로······ 심장과 뇌를 말하는 겁니다.”

그 모습이 이풍이 보기에는 할아버지가 손녀를 돌보는 것으로 보였으므로, 이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으면 상단전을 우선 상상하세요. 도교에서도 뇌는 몸의 핵심입니다······”

이풍은 지금 딸보다 어릴 적 자신을 떠올렸다.

그가 일곱 살일 때, 그 어미는 백수요 아비는 사기꾼에 가까운 족속이었다.

아비는 나가서 사기를 쳐 비정기적으로 돈을 벌어왔는데, 그런 일은 으레 조폭과 얽혀있다.

아비는 동네에서 부정하게 벌어들인 돈을 상납하기 위해 건달을 자주 만났다.

그때마다 기분이 잔뜩 상해서는 돌아와 이풍을 패거나 굶겼다.

딱 한 번은 그러다 경찰이 온 적이 있다. 이유는 몰라도 예의 건달에게 심한 굴욕을 당했던 모양이다. 엄청나게 화가 났는지 소리 지르면서 이풍을 패다가 소란을 듣다 못 한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다.

찾아온 경찰에게 이풍은 그 불쌍한 꼴을 어필해보았지만 경찰은 새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경찰은 대충 주의만 주고 떠나갔다.

경찰이 돌아간 뒤에 이풍은 조용히 얻어맞았다.

그날 어미는 너무 심하게 때리다 아예 죽여버리면 감방에 간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녀는 굶겨 죽이다가 감방 갈 것도 두려운지 이풍에게 음식을 주긴 주었다.

그러나 설거지하기 싫다는 이유로 라면을 끓여주기도 싫어했다. 둘이 외식하고 돌아와 과자 한두 봉지 던져주면 그것으로 연명해야 했다.

언젠가는 아비가 자해공갈을 거하게 쳤다. 부자를 상대로 그런 게 아니라 웬 음식점 사장을 상대로 공갈을 쳤다.

감방에 가거나 패가망신할 만한 돈을 내라고 요구받은 음식점 사장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서민의 친구로 유명한 협객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적비비탄이 집에 들이닥쳤다.

무적비비탄은 깡마르고 멍든 이풍을 보고는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선언했다.

아비는 그제야 죄인답게 머리를 조아렸다.

무적비비탄은 그 아비에게 이것저것 시키던 건달마저 손봐주었다. 아비를 상대로는 왕처럼 굴던 그 건달이 무림 고수를 상대로는 그러지 못했다.

다시는 그 아비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요 앞으로는 사기에 가담시키지도 않겠노라 무적비비탄에게 무릎 꿇고 맹세하는 것을 어린 이풍은 보았다.

이후로 이풍은 양아버지가 된 무적비비탄을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자신의 새로운 아버지가 경찰도 손대지 않던 섬노예들을 구출하는 것을, 용역깡패들을 물리치고 회사 중역을 상대로 협박하는 것을 보았다. 국가에서도 돌보지 않는 이들을 협객이 대신하여 돌보는 것을 보았다.

이 와중에 이풍은 비로소 제대로 된 음식을 먹으면서 학원에도 다니게 되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이 밝자 비로소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여덟 살, 제 양아버지가 건강해지라고 보내준 태권도장에서 이풍은 주먹을 내지르며 이미 무림인을 꿈꿨다. 제 아비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 위대한 아버지. 당신이야말로 신이고 정의다.

올바른 정의는 사회와 경찰이 아니라 협객인 당신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직장인들 앞에서 으스대는 건달들은 당신 앞에 무릎을 꿇는다.

딸을 서울대를 나오게 해 대기업에 보내봤자 즐거운 인생이 펼쳐지는가. 야근하다 카페인에 중독되어 수명이나 깎아 먹을 뿐이다. 아무리 봐도 커피 대신 영약이나 섭취하는 무림인의 삶이 훨씬 건강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림에서 활동하며 온갖 더러운 꼴을 보겠지만 사회는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다고. 불합리한 상사한테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딸을 보느니 건달들의 비굴한 인사를 받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자신이 위대한 아버지처럼 되지 못했으니 딸이라도 그리되어야 할 것이다. 무적의 무공을 지닌다면 그 무력에서 나오는 자신감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는 하단전의 구멍으로 들어가 척추에서 맴돕니다. 두 갈래로 뻗어나갑니다. 한 갈래의 기는 심장에 머무르다 아래로 향하고, 나머지 한 갈래는 머리를 향해······”

설명을 듣다 말고 이바람이 움찔했다.

그녀의 체내 기를 살피던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척추에서 뻗어나가야 할 기가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이풍도 저랬던 것 같은데. 어쩌면 이 또한 유전일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도울 방법이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뇌법을 얻은 뒤, 환자들을 치료하며 허풍개는 나름대로 시험해본 것이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써먹기로 했다.

주문을 외워 무형의 번개를 그녀의 몸에서 피워냈다. 실제 전기라기보단 기에 가까운 번개였다.

“으······”

기괴한 느낌에 이바람이 몸을 떨었지만 고통은 없을 것이었다.

번개는 막힌 것을 뚫고 그녀의 몸을 내달렸다.

뚫린 것은 다시 막히지 않을 것이다.

번개의 뒤로는 기 또한 함께 달렸다.

기가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중단전을 맴돌다가 위로 향했다.

이윽고 상단전에 닿았다. 상단전의 기는 아래로 내려가 온몸으로 퍼졌다가 한 바퀴 돌아 다시 머리로 돌아왔다.

그것을 확인한 허풍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비싼 영약을 먹였다지만 이 정도 성과를 거둘 줄은 몰랐다. 자신은 수행을 거듭한 끝에 서른넷에야 이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바람의 호흡이 빨라졌다. 허풍개는 계속해서 그녀를 인도했다.

“머리는 하늘과 통하는 궁전입니다. 뇌는 니환궁(泥丸宮)이라 부릅니다. 니환궁 안에는 동방궁(洞房宮)이 있습니다. 동방궁은 사신(司神) 중앙황로군의 분신이 머무르는 궁전입니다. 천상계의 중앙황로군이 하강하여 동방궁에 안착합니다.

그로써 천상계와 뇌는 서로 이어집니다. 천상계는 대우주이고 당신의 몸은 소우주입니다. 두 우주는 합쳐집니다······”

허풍개는 모산파의 무공을 익혔다.

모산파는 방술적인 색채가 강한 도가 문파다. 방술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머리다. 머리가 뜨여야 비로소 영적인 신내림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상단전 개통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이루어야 모산파의 무공 또한 극한까지 익혀낼 수 있다. 모산파의 고수가 되려거든 반드시 해내야 하는 셈이다.

그것을 월녀가 약 몇 알 먹였다고 바로 해내는 걸 보고 어찌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그 시점에 이미 월녀는 당시 자신을 능가하게 된 셈이었다.

월녀가 스물쯤에 이룬 그 경지를 허풍개는 쉰이 넘어서야 겨우 이뤘다.

그리고 지금, 스물도 안 된 소녀가 해내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바람의 뇌에 들어간 기는 증발을 시작했다. 증발이란 소멸이 아니라 변화요 이동이다. 기는 형태를 바꾸어 그녀의 얼굴로, 목으로, 머리카락으로 퍼져 스며들었다.

그리고 모발에 스며든 기는 그보다 위로······ 하늘로 뻗어나갔다.

하늘로 나아간 기 또한 순환했다. 하늘의 청기(淸氣)가 되어 머리로 돌아왔다. 그로써 더욱 정순해진 기는 다시 온몸으로 뻗어나갔다.

방안에 가득 채워진 연기가 사물을 가리고 있었다. 덕분에 무형의 것들이 더욱 잘 보이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은 허풍개의 눈에 똑똑히 파악되었다.

‘아린이가 이랬을 때는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은데.’

한 번 겪어본 일이라서일까? 지금은 그때만큼의 수치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손녀에 가까운 아이를 보며 수치심을 느꼈다간 너무 비참할 테니까.

허풍개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며 이풍을 바라보았다.

“잘 된 것 같네.”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날 오후, 이풍은 바로 딸을 검사장에 데려갔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받아들고는 희열에 가득 찼다. 허풍개의 손을 붙잡고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질러댔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아버지!”

이때 허풍개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래도 무림인으로 키울 생각은 말라고 경고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자식이 잘된 아비에게 축하의 말을 보내야 하나?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허풍개는 그저 살짝 웃었다. 이풍도 제 양아비를 따라서 활짝 웃었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