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39화 (39/103)
  • 하수 정진영 - [4]

    오가장 소가주 오은림이 들어왔을 때,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시체처럼 늘어선 여덟 명이었다. 눈 뜬 채 일렬로 누워서는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들 있었다.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소년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죽은 줄 알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온몸에 침이 꽂혀 있는 게 아닌가. 회로 쓰이기 위해 마취된 생선과 같은 몰골이었다.

    섬뜩하기까지 한 그들의 꼴을 보며 오은림은 감탄했다.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침술로 유명했는데. 제자 분이 완벽하게 이어받았나 보군요?”

    이풍이 씩 하고 웃었다.

    “아주 잘 배웠죠! 그래서 아가씨, 어깨는 어때요? 저번에 찔렸던 거 치료는 잘 되고 있나?”

    “치료 잘 되고 있으니까 싸돌아다닐 수 있는 거겠죠? 아무튼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래서 여기 부르신 건······”

    오은림의 물음에 이풍이 정색했다.

    “이놈들이 우리 절세고수님 습격하려다 조져진 건 들었죠?”

    “그랬죠. 미친놈들이 겁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영상 한 번 봤으면 따발총이라도 준비해서 갔을 텐데.”

    “이 새끼들은 그 영상 안 봤나 봐.”

    지금 둘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백 년이 지나도 회자할 것이라 예상되는 그 영상을 말하고 있었다.

    절세고수 둘의 영상, 거기서 무적무적자는 총격 세 번을 연달아 튕겨내는 말도 안 되는 기예를 보였다. 그것을 보면 총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덤빌 맘이 들지 않을 만하다.

    “절세고수를 습격하면서 그 영상 왜 안 봤대요. 병신들인가?”

    “애초에 무림을 잘 아는 놈들이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놈들이 아가씨 부친을 습격한 놈들 아닌가 의심스러워요.”

    “예?”

    “이 자식들이 무림인 노리고서 범행 저지르는 거 같더라고? 의뢰를 받고 무림인을 죽이기도 하고, 대충 인천 무림인이면 아무나 죽여놓고 웬 조직에서 보수를 받기도 하나 봐.”

    이풍이 말하길, 몇 달 전에 침술원을 망가뜨린 것도 이놈들이 한 짓이라고 했다. 침술원에서 혼자 지내니 습격하기 좋아 보이는 무적비비탄을 노리고 왔다가 아무도 없자 화가 나서 몽땅 때려 부쉈노라 실토했단 것이다.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진짜 말도 안 되죠? 그 정도로 어설퍼서 오히려 무서워. 그냥 무림인인데 혼자 다녀서 노리기 좋다 싶으면 대상이 누구건 아무나 습격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절세고수도 겁 없이 습격하는 거지 뭐. 아마 아가씨 부친께서도······.”

    무슨 말인지 오은림도 잘 알아들었다.

    이런 천치들이라면 혼자 다니는 무림인이라면 그냥 사냥할 대상으로만 봤을 것이다.

    오은림의 부친이 죽일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 따윈 따로 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놈들이 정말 제 아버지를 해쳤다던가요?”

    “그런 말은 안 했죠. 물론 이놈들이 안 했을 수도 있는데 관련됐긴 했을 거 같아요. 뒷배가 따로 있을 테니까.”

    “뒷배요?”

    “총 한 자루에 백만 원쯤 하는데 중딩들이 뭔 돈이 있어서 샀겠습니까? 분명 어디 조직에서 대출해주는 김에 웃돈 붙여서 비싸게 팔아먹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조직을 찾아내면 정말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거 같은데.”

    오은림은 조금 생각해보더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찌······”

    “은혜는 무슨? 저번에 보니까 자칭 천마랑 싸울 때 국뽕대협보다 여기 아가씨가 훨씬 더 활약했드만. 우리 절세고수님한테는 전우인 셈인데 당연히 챙겨줘야죠.

    그래서, 녹림이랑 싸움은 잘 돼가요? 아가씨 지금 부상 중이라 싸움에 나서지도 못할 텐데요. 오가장은 지금 전력 부족해서 어째······”

    이풍은 지금 전우인 절세고수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꼬드기는 것이었지만 오은림은 알아듣지 못했다.

    “뭐, 괜찮아요. 당장 전력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아니, 왜 전력이 왜 안 필요해요?”

    “녹림이랑 싸우는 거, 처음 습격에나 수십 명씩 동원했지 이후로는 그러지도 않네요. 그냥 한두 명이 기회 엿보다 총 쏘고 튀고 총 쏘고 튀고 그러고 있어요.”

    “아, 그거 야쿠자들 항쟁 방식······.”

    “예. 아무튼 쪼잔하게 싸우니까 무적무적자 대협께서 나서실 필요 없어요.”

    “우리 절세고수님 나서면 하룻밤에 정리될지도 모르는데······”

    이풍이 입맛만 다시던 와중이었다.

    허풍개가 침술원에 들어왔다. 사건현장의 뒷정리를 하고 온 것이었다.

    허풍개가 오은림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가씨. 이놈들 오가장에서 잡아갈 거지요.”

    “예. 사람 불렀으니까 곧 데려갈 거예요.”

    “잡아가서 아예 담그지는 말아줘요.”

    그 말에 이풍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은림을 대신해 항의했다.

    “안 담그면? 대충 심문만 하고 풀어주라고? 그랬다간 경찰한테 가서 나불대면 우리랑 오가장 모두 좆되는 거 아냐?”

    “시베리아 탄광 같은 데 보내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러시아 마피아들이 감시하니 절대 탈출 못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오은림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대답했다.

    “그것도 뭐, 괜찮네요. 차라리 바다에 빠뜨려달라고 애원하게 되겠네. 그런데 만약 이 중에 진짜 제 아버지 원수가 껴있으면요? 그래도 죽이지 마요?”

    허풍개는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어찌 복수하든 어쩔 수 없죠. 그러고서 처리했노라고 제게 따로 보고만 하지 말아주면 좋겠군요.”

    “그럴게요.”

    오은림이 고개를 끄덕이던 중이었다.

    허풍개가 그녀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오은림이 당황하는 가운데 허풍개가 물었다.

    “지쳐 보이는데 괜찮습니까?”

    “그래 보여요?”

    “예. 많이.”

    “글쎄요, 중고딩들 죽이네 탄광 보내네 하는 얘기 나눠서 그런가? 정신적으로 좀 지치는 것도 같네요······.”

    마교 수괴를 습격하러 갈 당시의 흉흉함은 지금 그녀의 얼굴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우울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이풍도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채고는 말했다.

    “왜, 애새끼들한테 이러자니 죄책감이라도 느껴요?”

    “죄책감까진 아니고, 그냥 좀 꺼림직한······”

    “꺼림직할 필요가 없어! 원래 십대들이라고 어른보다 덜 사악한 게 아니에요. 보도방 알죠?”

    “업소에 아가씨들 공급하는 일이던가요?”

    “그래요, 그거. 삼십대 이상 건달이 보도방 운영하면 나잇값 못한다고 욕먹거든? 그래서 조폭계에서는 십대랑 이십대 젊은 건달들 전용 일자리로 통하는데, 그래서인지 고딩들도 보도방 엄청 많이 운영해.”

    “고딩들이?”

    “그래요. 가출한 여자애들이나 자기 학교 여자애들 꼬시거나 협박해서 업소에 보내는 거지. 면허도 없는 새끼가 렌트카 빌려서 여자애들 업소에 배달해주는 거 보면 기가 찬다니까?

    그러면서 한 달에 천만 원씩 우습게 버는데, 이쯤 되면 사회에서 평범한 일은 이후로도 평생 안 하게 되는 겁니다. 나이 먹음 그대로 건달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새끼들은 가오 잡고 싶었는지 살인까지 하고 다녔잖아? 사회에 풀어주면 나중엔 아주······”

    “지금 위로해주는 거죠? 고마워요.”

    “감히 소가주님한테 훈수두는 것 같아 미안한데,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앞으로도 더러운 꼴 한두 번 볼 게 아니야.”

    “그렇겠죠. 생각해보니 벌써 끔찍하네······.”

    여전히 오은림의 반응에 힘이 없자 이풍은 혀를 쳤다.

    “아니, 이 아가씨가? 영상에서 천마한테 찌르기할 땐 그리 멋지더니. 이렇게 맘이 여려서야······ 맘 굳게 먹어요. 앞으로도 무림에서 일할 거 아니야?”

    “글쎄요.”

    “글쎄라니?”

    오은림은 한숨 쉬었다.

    “이건 아무래도 제 천직이 아닌가 봐요.”

    잠시 후 오가장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거대한 차량이 사고를 가장하여 골목 입구를 틀어막은 가운데, 시커먼 봉고차가 여덟 소년을 삼켰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요. 어떤 식으로든 복수가 끝나야 맘이 편해질 텐데······.”

    오은림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떠나갔다.

    이풍과 허풍개는 침술원에 남았다.

    허풍개가 물었다.

    “바람이는 괜찮나?”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바람이는 왜요?”

    “지금 중딩들이 이렇게 사나운데, 바람이도 딱 중딩 아니냐. 네 딸이니까 혹시 노려질지도 모르고.”

    “뭐, 별일 없어요.”

    “외국에 유학 보내면 안 되나?”

    “예?”

    “내가 알아봤는데 저기 미국 상류층 동네에선 통학로에 경호원들 배치돼있다더라. 돈은 내가 대줄 테니까 그런 데 보내는 게 어떠니.”

    이런 제안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이풍은 큰 목소리로 주절주절 대답했다.

    “아,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좋은 데 보내고 있어요. 스쿨버스 타고 다니니까 통학 중에 습격당할 일도 없고.”

    “스쿨버스는 뭐 방탄이래냐.”

    “무슨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스쿨버스에 총질을 하겠어요?”

    “넌 새끼야, 딸내미 일인데 뭐 그리 낙천적이야.”

    “형님이 너무 걱정이 많은 거요. 아직은 누구 총격에 죽었다고 뉴스에도 안 나왔잖아? 지금 총질하고 다니는 놈들, 막 나가는 거 같아도 다 몸 사린다는 증겁니다. 대낮에 학생들 다니는데 총질할 정도로 막 나가진 않을 거니까 걱정마시고······”

    이풍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제 형님 겸 양아버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을 쉬이 해석할 수 있었다. 이 꼴통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얼굴.

    이풍은 변명하듯 부연했다.

    “뭐, 저도 나름 생각해둔 방책은 있어요.”

    “그놈의 방책이 뭔데?”

    “바람이도 본격적으로 무공 익히게 하는 겁니다.”

    이게 대체 뭔 개소리인지 허풍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뭐?”

    “영약도 먹이고 무공도 익히게 하면 반사신경 좋아질 거잖아요? 그럼 설령 습격을 당해도 훨씬 잘 대응할 거요.”

    “머리에 총 맞았나. 뭐 그딴······”

    “안 배우게 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총알을 잡진 못하더라도 어찌어찌 피할 순 있게 될지 모르고. 마침 지금 저 십오억 어치나 영약 주문해놨거든요? 오자마자 바로 먹일 겁니다.”

    허풍개는 눈앞의 털북숭이를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영약 십오억 어치 먹인다고 바로 고수가 되겠냐.”

    “더 먹여야겠죠? 맘 같아선 수십억 치 한 번에 먹이고 싶은데······.”

    “돈 빌려주고 싶어도 못 빌려준다. 나도 당장엔 가진 돈 죄다 영약이랑 바꿔먹어서 없어.”

    “알아요. 그러니까 더 벌어야죠.”

    그리 말하더니 이풍이 웃었다. 은근한 목소리로 꼬드겼다.

    “그래서 말인데, 녹림에 시비 걸 생각 없소?”

    “시비를 왜?”

    “잘하면 녹림이랑 무림맹 싸움에 끼어서 한몫 벌 수 있을 거잖아요.”

    “그럴 생각 없다.”

    즉시 거절하자 이풍은 당황했다.

    “아니, 형님도 저놈들 안 좋아하잖아요. 왜, 만월산에 산적들이 자리 잡은 것 자체가 맘에 안 든다던가?”

    “그렇지.”

    “게다가 월녀님이 거기서 허풍개 의사님한테 무공 배우셨다지 않습니까? 그 말은 곧 허풍개 의사님의 옛날 거처가 만월산이었단 셈인데요. 그 산적 놈들이 감히 우리 사조님의 옛 수련장을 더럽히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다 쫓아내야 하지 않나?”

    허풍개는 만월산이 주안산이라 불리던 시절을 떠올렸다.

    확실히 허풍개는 그곳에서 수십 년이나 머물렀다. 모산파 출신의 아내와 산속에서 만나 무공을 배우고, 수련하다가 첫 제자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산적 놈들 자리 잡은 곳은 만월산 아래쪽이야. 우리 사조가 수련하던 곳은 더 깊숙한 곳이고.”

    이풍이 툴툴댔지만 허풍개는 무시했다.

    이풍마저 내보낸 뒤, 침술원에 영업 종료를 알리는 팻말을 걸었다.

    홀로 남아 멍하니 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칼을 보았다.

    오늘 이 칼이 보여준 조화를 생각했다. 따로 조종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움직여 주인을 도운 조화 말이다.

    귀신 들린 듯한 그 조화를 생각하니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칼에 그녀의 영혼이 깃든 걸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애초에 칼에 영혼이 깃드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요, 정말 깃들 것이라면 이 칼이 아니라 이 칼과 똑같은 다른 칼에 깃들어야 옳은 일 아닌가.

    허풍개는 만월산을 생각했다.

    그 산 깊은 곳에는 지금도 자식과 아내의 무덤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아내의 무덤에는 그녀의 것이었던 칼이 함께 묻혔다.

    이 칼과 똑같은 칼이었다.

    *******

    월녀는 자신이 들어온 산속 풍경을 둘러보았다.

    만월산, 그녀의 진정한 인생은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이 산에서 그녀는 스승과 만나 가르침을 청했다. 그에게서 무공을 배우고 익히기 시작했다.

    심지어 스승에게서 영약도 몇 개 얻어먹을 수 있었는데, 당시 영약 값이 지금보다 훨씬 쌌음을 고려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아무것도 받지 않고 그리해준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알 수 없었다.

    내 얼굴이 예뻐서? 설마. 당시에도 동자공 익혔던 양반이 여자 외모에 혹했음 얼마나 혹했으려고······.

    그때 일을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은 모두 끔찍하게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지막 장소로 이 산을 정했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시작했으니 끝내는 것도 이곳이어야 하리라.

    이 깊은 산속이라면 아무도 발 디디지 않으리라.

    너무 오래 살아 뇌에 녹이 슬어버린 무인도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 일이 없으리라.

    이 지상을 곱게 떠날 수 있으리라.

    그녀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겼다. 수련을 위한 명상이 아니었으므로 존사도, 복기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에는 지나간 추억만이 화질 나쁜 오래된 비디오처럼 천천히 흘러갈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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