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36화 (36/103)

하수 정진영 - [1]

장생을 추구하려거든 공덕을 쌓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며, 자신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관대함을 베풀어야 하고 (······) 그래야만 덕이 생겨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 포박자 미지편(微旨篇)

한 영단을 복용하자 내 수명이 하늘에 달렸지 않음을 깨우쳤다.

- 오진편(悟眞篇)

단순한 무술을 넘어 마법적인 무언가를 해내는 것은 절세고수의 증거요, 무림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일이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허풍개 또한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던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조화가 또 하나 늘었다.

어검술. 전설 속 신선의 도술이요, 한국 최고의 절세고수가 쓸 수 있기로 유명한 기술이다. 어찌나 유명한지 소설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이른 고수들만의 전유물로 나올 정도 아닌가.

이 기술을 쓸 수 있다고 광고하기만 해도 무인으로서의 격이 몇 단계 높은 것으로 대우받을 것이다.

이 와중에 단순히 칼이 싫다는 이유로 기껏 생긴 기술을 숨기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풍개는 아침 수련을 마치기 무섭게 새로 얻은 기술을 시험해보았다. 단지 의지만으로 칼을 날리거나 휘두르거나 해보았다.

이풍과 직원들이 그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풍은 더없이 흡족한 표정으로 제 양아버지의 수련을 보았다.

그는 자신이 무공에 재능이 전혀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무공을 익히고 싶은 욕망을 남을 통해 대리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딸에게 무공을 익히게 하려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한편 박성철은 어안이 벙벙해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잘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지금도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 칼에 뭔가 달아둔 게 아닌가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도혁은, 이 상황에 놀라긴 했지만 그동안 본 게 있었으므로 굳이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저 눈을 크게 뜬 채 보는 내내 감탄하면서도 의문을 품었다.

허풍개와 무적비비탄은 왜 저것을 하지 못했는가. 재능의 차이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생각하다 말고 모두 흠칫했다. 그 눈앞에서 낡은 환도 한 자루가 천천히 떠오르더니 휙 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러고는 땅에 떨어졌다가 돌아와 허풍개의 손에 다시 잡히는 게 아닌가.

다시 봐도 동양식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흉내만 낼 수 있어도 초능력자랍시고 TV에 나와 동네방네 떠들 만하다.

그러나 이 일을 해낸 장본인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실전에 써먹을 정도는 아닌데.”

이풍이 물었다.

“뭔가 문제 있어?”

“뜻대로 조종하기 너무 어렵습니다. 정신을 완전히 집중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데요. 그러느니 차라리 BB탄 한 발 더 쏘는 게······”

이미 허풍개는 이런저런 시험을 해보았다.

예를 들어, 모든 종류의 칼을 다 의지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식칼이나 커터칼은 가벼운데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들이 제대로 된 검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한국 환도나 일본도와 같은 검은 그나마 의지에 반응하여 움직이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이기가 끔찍하게 어려웠다.

단순히 띄우거나 날리는 데에도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마당이다. 이 와중에 칼을 조종하여 제대로 된 검술을 펼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요, 검을 움직이기 위해 집중하는 중에 다른 행동을 하기도 불가능하다.

내면의 상과 일치하는 태극검은 놀라울 만치 잘 움직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칼을 누군가와 싸우는 데 부딪칠 맘은 들지 않았다. 아내의 유품인 건 물론 백 년 된 쇠붙이 아닌가. 잘못하다 부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 점을 대충이나마 설명했더니 이풍은 이렇게 제안했다.

“그럼 그 검이랑 똑같은 물건 여러 자루 주문해둘까? 무게랑 모양이 똑같으면 조종하기 수월할지 모르잖아.”

“그럼 그래줘요.”

“그리고 말이야, 애초에 할 수 있는 게 중요한 거 아냐? 그게 쓸모 있든 없든 뭐가 중요해? 할 수 있는 데 의의를 두는 거지! 내가 그거 할 수 있으면 쓸모가 있든 없든 아주······”

그 대화를 끝으로 일과가 시작되었다.

허풍개는 사무소를 내려와 침술원에서 영업을 개시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일인 만큼 맘 편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요즘은 더욱 힘든 일이 되었는데, 우선 허풍개의 솜씨가 유명해져 더 많은 사람이 오게 된 것은 첫 번째 이유였다.

요즘 허풍개는 자신이 명의가 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뇌법을 담은 침술에 정말 신묘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환자들이 상태가 호전되는 일은 예전보다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다.

이 와중에 가격은 크게 비싸지 않으므로 환자들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그리고 전체 환자가 늘었으므로 진상도 늘었다.

오늘도 진상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양복을 쫙 빼입은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침술원이 허름하며 침구사가 젊은 애송이로 보인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진 눈치였다. 허풍개의 젊은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하대하는 게 아닌가.

“여기가 유명하단 의원 맞아? 면허증은 있고?”

늙어 보일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허풍개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면허야 있는데, 불만 있음 나가세요.”

“지금 진료 거부하나? 그거 불법인 거 몰라?”

“그런 건 모르겠고, 나갈 겁니까 안 나갈 겁니까?”

중년 남자는 욕설을 지껄이더니 손목을 내밀어 진맥을 요구했다. 그리고 허풍개는 생각했다.

이 짓거리, 슬슬 그만둘까?

별로 돈은 되지 않는 주제에 시간만 엄청나게 잡아먹는 일 아닌가. 이럴 시간에 차라리 수련을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한 다른 일을 하는 게 훨씬 이득일 것 같은데······.

허풍개는 생각을 이어나가다 말고 흠칫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허풍개는 그놈의 공덕을 쌓기 위해 열아홉 살부터 한반도 이곳저곳을 떠돌며 사람들을 치료하곤 했다.

백 년 넘게 해온 일을 이제 와서 그만두자니?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만했다. 수백억짜리 영약 하나 먹었다고 갑자기 어검술까지 쓰게 된 마당 아닌가. 그 약효가 비현실적으로 탁월한 나머지 지난 세월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 지경이다.

이놈의 번뇌. 이놈의 허무감······.

그 때문인지 몰라도 새 재주를 익힌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허풍개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침을 들었다.

그리고 중년 남자는 또다시 시비를 걸어댔다.

“표정 왜 그따구야. 환자 많이 찾아온다고 이렇게 막 대하나······”

콱 손목 꺾어버릴까.

정말 그러기로 맘먹던 차였다.

저 바깥에서 부르르릉,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급히 고개를 돌렸더니 바깥에 웬 놈들이 바이크를 타고 급정지했다.

“처먹어!”

바이크 뒤에 탄 놈이 웬 돌덩이를 집어던졌다. 무슨 포탄처럼 크고 무거울 돌덩이였다.

유리로 된 문은 단번에 부서져 파편을 흩날렸다. 그중 몇 개는 허풍개와 중년 남자가 있던 자리에도 날아왔다.

허풍개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움직였다.

양손을 파도치는 물처럼 움직였다.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파편 하나하나를 살피며, 단 하나의 파편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 그 손이 휘적이자 날아왔던 파편들은 모두 그 손가락에 잡혔다.

허풍개는 유리 조각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중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기 좋든 싫든 환자의 상태가 우선이다.

“다친 데 있나?”

중년 남자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없네요.”

어찌나 놀랐는지 무의식적으로 존대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둘 모두 지금 그 사실에 신경 쓰지 못했다.

허풍개는 환자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침술원 밖을 나섰다.

당연히도 돌을 던진 양아치들은 이미 바이크를 타고 떠난 지 오래였다. 허풍개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새끼야.”

한편 쨍그랑하는 소리가 맞은편 건물에서도 들린 모양이었다.

이도혁이 급히 오더니 박살 난 침술원을 보고 몸이 굳었다.

“무슨 일 있어?”

“보면 모릅니까.”

화풀이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지만 이도혁은 그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왔다.

그리고 말없이 뒷정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

“이거 저번에도 그랬지 아마? 똑같은 놈들이 이런 거 같은데······”

이풍은 혀를 차더니, 자기가 아는 여러 건달들에게 연락하여 범인을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이도혁도 비슷한 약속을 했다.

“오늘 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걔가 조직에 몸담았다고 좆나게 으스대는 놈이거든? 동네에 이럴 만한 양아치들 없는지 걔한테 물어볼게요.”

허풍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직에 있는 친구라고?”

“아, 조직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한 무림 문파는 아니고. 그냥 동네 건달이지 뭐.”

허풍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이도혁은 예의 친구와 만났다.

중학교 2학년 시절부터 어울린 친구였는데, 그때부터 일진을 동경하는 기질이 있어서 몸에 문신을 새기는 등 온갖 허세를 떨어대던 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기어이 어느 조직에 들어갔다며 자랑했지 아마.

그 소식을 듣고 이도혁은 어찌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 친구는 일진과 조폭을 동경할 뿐 덩치가 큰 것도 아니요 싸움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정말 폭력조직에 들어갔다간 매일 얻어맞고 지내지나 않으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

조직에 들어간 이후로는 허세를 떨어대는 전화가 확 줄어들었던가? 그걸 보면 확실히 조직생활이 순탄치 않은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먼저 연락해온 것은 오랜만이었다.

예의 친구는 만나자마자 이렇게 선언했다.

“나 이제 무림인이다.”

이도혁은 눈을 껌벅이다 물었다.

“무림인?”

“그래.”

그리 말하면서 이 허세 넘치는 친구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놀라거나 경외하는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로선 실망스럽게도 이도혁은 그래주지 않았다.

“어디 방파에 들어갔는데?”

“꼭 방파에 들어가야 무림인이냐? 무공 익혀서 건달들 줘패고 다니면 무림인이지.”

이도혁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살짝 웃었다.

“내가 아는 무림인이랑 비슷하긴 하네.”

“오, 무림인 아는 놈 있냐? 뭐 하는 놈인데?”

“절세고수 하나 있어. 오늘 아침에 보니까 이기어검술 쓰더라.”

친구가 눈을 부라렸다.

“지랄하지 말고. 나 진지하거든?”

“진짠데. 못 믿겠음 말고. 그래서, 왜 불렀냐?”

“너 어릴 적에 영약도 먹고 무공 교습도 받았던 거 기억나서. 혹시 요즘도 무공 단련하냐?”

“그런데, 왜?”

친구, 정진영이 웃었다.

“나랑 일 같이 안 할래?”

“뭔 일?”

“동네 정복.”

정진영은 마치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알렉산더 대왕이라도 된 것처럼 이렇게 선언했다.

“이 동네 내가 먹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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