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35화 (35/103)
  • 녹림총채주(綠林總寨主) 구자성 - [3]

    영약의 기운을 흡수하며 허풍개는 만력제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뛰어난 고수인 월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국가의 자금이 영약으로 바뀌어 그들의 몸에 들어갔다.

    허풍개가 그들만큼 영약을 복용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옛날보다 지금 영약이 훨씬 비싸졌음을 생각하면, 가뜩이나 자신은 가리는 일도 많음을 생각하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국 무림이 그 어느 때보다 자신과 같은 고수를 필요하게 된 상황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그동안 입에 넣지 못한 귀한 영약들을 담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 약효가 생각보다 뛰어나다면······ 그 마음속에는 자칭 천마의 제안이 어른거릴지도 모른다.

    그녀와 한바탕 싸우기까지 한 지금도, 그녀가 남긴 번뇌는 아직 떠나가지 않았다.

    그녀가 구자성에게 뭘 약속했다고? 수명 연장?

    혹시 백삼십 살을 넘어 살 방법일 수도 있을까······.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허풍개는 영약에 깃든 기를 천천히 온몸에 퍼뜨렸다.

    우선 세 곳의 단전에 영약의 기를 불어넣는데, 과연 값진 영약이 아닐 수 없었다. 순식간에 삼단전이 기로 가득 찼다.

    그러고도 분배할 기가 많이 남았다.

    허풍개는 내면에 깃든 번개에 의념을 집중했다.

    거기에도 기를 넣어 자신만의 신(神)인 번개를 키워나갔다······.

    더욱 많은 기를 흡수한 번개는 그 크기가 눈에 띄게 커졌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강렬한 힘이 되어 번뜩였다.

    번개가 마음속 공간에서 내리쳤다. ‘콰르릉!’

    번개가 꽂힌 마음속 자리에 뭔가가 생겨났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 저것은 대체 뭔가.

    정신을 집중하여 보았더니, 그것은 칼이었다.

    칼?

    그 사실을 깨달은 허풍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명상이 깨졌다. 한동안 숨을 헐떡이다가, 다시 눈을 감고 내면에 침잠했다. 다시 자신의 심상 공간을 보았다.

    방금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칼 한 자루가 내면에 꽂혀 있었다. 번개를 형상화한 듯한 그 칼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은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왠지 몰라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어디선가 본 칼 같았다.

    조금 더 생각에 잠겨있던 허풍개는 이내 방금보다 더욱 기겁했다. 두 눈을 부릅떴다.

    딱 저 정도의 길이, 딱 저런 모양의 칼을 두 자루 알고 있었다.

    아내이자 스승이었던 그녀의 칼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남겨준 칼이기도 했다.

    *******

    차가운 수건을 얹어도 그녀의 열은 내리지 않았다.

    허풍개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끔찍하게 뜨거웠다. 그 열기에 자신마저 불탈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편해질 것 같았으므로 손을 놓지 않았다.

    죽어가던 그녀가 말했다.

    “시체는 태워서 없애고. 내 무덤엔, 내 칼만 묻어줘.”

    허풍개는 알겠노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울지 말고, 죽는 거, 아니야.”

    “그럼······”

    “시해를, 하는 거야. 내 제자, 시해가 뭔지 배웠지?”

    “배웠······, 지.”

    시해(尸解)란 선도 수행자가 신선이 되는 방법의 하나다. 죽음을 가장하여 지상을 떠나 그 영혼만이 선계(仙界)로 향하는 것이다.

    당시에도 허풍개는 그 개념을 거의 믿지 않았다. 도사들이 자기네 죽음을 신비화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알지? 육체가 쓰러지는 건 그냥······ 허물. 허물을 벗는 거야.”

    뭔 놈의 허물을 애새끼 낳아놓고 벗느냐. 정 떠나고 싶음 애새끼 좀 키워놓고 떠나면 안 되나.

    “시해 후에 시체는 사라져야 해. 그러니까 태워서 없애고······”

    허풍개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입에서는 끅끅거리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녀만 혼자 계속 말했다.

    “무덤엔 칼만 넣어줘. 무슨 칼 말하는지 알겠지?”

    물론 알고 있었다. 혼인할 때 산을 내려가서 비싼 돈을 주고 맞춘 암수검. 반지와 함께 서로 한 자루씩 나눠 가졌다.

    “나머지 한 자루는······”

    허풍개는 그제야 말다운 말을 꺼냈다.

    “간직할게, 영원히.”

    “영원히 간직할 필요까진 없고, 그냥 너 죽을 때에······”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

    허풍개는 그녀가 바란 대로 그녀의 시체를 뼈까지 태워 바람에 날렸다. 그녀의 칼만 관에 담아 묻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오래 슬퍼하기에는 시간과 여유가 부족했다. 자식까지 떠나보낸 뒤에야 그녀의 죽음을 오래 곱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남았다. 그녀가 준 검 한 자루는 그와 함께 남겨졌다.

    *******

    허풍개는 금고에서 검을 꺼냈다.

    아내가 남긴 태극검이었다. 이 물건을 자주 꺼내지는 않았다. 검을 만지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허풍개에게 검이란 죽음을 상징했다.

    상대방 혹은 나 자신의 죽음. 검은 남을 죽일 수 있는 흉기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쓰일 물건이기도 했다.

    그녀를 묻을 때 그랬듯 선인(仙人)의 무덤에 유해 대신 칼을 남겨놓는 것을 검해(劍解)라고 한다. 시해의 한 종류인데, 선도 수행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그것은 도교에서 검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한 까닭이지만 허풍개에게는 그저 불길한 의미가 되었다. 살인 도구로 쓰이는 검은 당연히 끔찍한 물건이요, 장례가 벌어지는 일이 끔찍했으므로 장례용 도구 또한 끔찍했다.

    칼 한 자루가 적을 죽이건 자신의 장례에 사용되건 그저 끔찍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가르쳐준 태극검법(太極劒法)도, 그녀가 남기고 간 태극검도 쓰지 않았다.

    기껏 배운 검법은 예전에 한 번 교육목적으로나 선보였을 뿐 싸울 때는 직접 써먹질 않았다. 그것으로 누군가를 쿡 하고 찌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태극검과 함께 배운 태극권이나 줄곧 사용해왔다. 그러다 맨손으로는 제대로 된 흉기를 든 적들을 상대하기 어려우니 뜬금없이 탄지공이나 새로 익혔을 뿐이다.

    그 와중에 예의 칼과 비슷한 형태의 상(想)이 맘에 생겨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내면에 생겨난 칼과 눈앞의 칼이 정말 같은 물건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같은 칼이 맞았다.

    눈을 반쯤 감은 채, 맘속에 생겨난 검과 지금 현실의 검을 비교해보니 그대로 겹쳐지는 게 아닌가. 현실의 태극검과 내면에 생겨난 검의 상(想)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95cm의 길이도, 칼자루 끝에 달린 장식도.

    허풍개는 이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칼이 대체 왜 맘에 자리 잡은 것인가? 무공 수양의 결과물이라 보기에는 검을 휘두른 지 한 백 년쯤 된 지금 아닌가. 그렇다면 이건 수해의 결과물이 아니라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생겨난 심마(心魔)일까?

    그러나 빛나는 저 칼은 분명히 꺼림직했지만, 특별히 사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뭔지 몰라도 일단 치워보기로 했다.

    내면의 칼을 살짝 움직였더니, 그와 겹쳐져있던 현실의 검이 함께 움직였다.

    허풍개는 너무 놀라 잠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만 껌벅이며 생각했다.

    이 비슷한 조화를 어디서 보았던가?

    *******

    녹림의 탈퇴 선언은 무림맹 전체에 충격을 주었지만, 무림맹은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멍하니 있지는 않았다.

    녹림이 이탈한 것만 해도 물론 큰일이다. 하지만 녹림을 본받아 다른 방파들까지 이탈하면? 그땐 정말 무림맹은 끝이다.

    그리고 무림맹 위원들은 무림맹의 존속을 곧 한국 무림의 존속이라 믿었으므로, 한국 무림을 위한 성전을 개시했다.

    모름지기 전쟁을 일으키려거든 선공이 최고인 법이다. 무림맹은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산적 새끼들 죽여!”

    각지의 무림 방파가 병력을 모아 근처 지역의 녹림 산채를 공격했다.

    기습이었지만 그다지 예상하기 어려운 공격은 아니었다. 녹림도들도 미리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각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이 아니라 치열하고 팽팽한 싸움이 되었다.

    이제 무림인들은 목검 따윈 들지 않았다. 날 선 칼과 손도끼가 부딪히며 불똥을 튀겼다.

    그리고 어느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년 동안 부술(斧術)을 연마해온 한 산적이 쓰러졌다.

    물론 산적들도 방아쇠 당길 손가락이 있었다. ‘투두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반대편의 다섯 명이 연달아 쓰러졌다.

    그날 밤 각지의 산에서 울린 총성을 듣고 근처 주민들은 불안감에 떨었다.

    그러나 아직 관(官)은 움직이지 않았다. 각 지역 경찰청장들의 통장에 0이 한두 개씩 많아졌을 뿐이다.

    *******

    허풍개는 아내가 준 검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자니 우울한 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차마 아내의 유품을 버리거나 썩어가게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그저 녹슬지 않을 정도로만 가끔 꺼내 관리했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이풍에게 맡겨 대신 관리하게 했다.

    이풍이 성심껏 잘 관리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검신에 새겨진 글귀에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고 동백기름을 먹인 칼날은 반질반질했다.

    새하얀 칼을 한 번 휘두르자 허공에는 휘황한 빛이 번뜩였다.

    직접 칼자루를 잡고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허풍개가 마음속 칼에 의념을 집중해 옆으로 움직이면, 현실의 칼도 옆으로 움직였다.

    내면의 칼을 위로 잡아당기면 현실의 칼은 두둥실 떠올랐다.

    아무리 칼이 꺼려지고 불길하게 여겨지더라도 이런 조화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백 년 가까이 칼을 휘두른 적 없었으므로 검술 비슷한 것을 흉내 내는 것은 어려웠지만, 또한 이 칼을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 또한 끔찍하게 어렵긴 했지만 연습을 하면 어찌어찌 될지도 몰랐다.

    한창 집중하여 칼을 움직이던 와중이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어찌나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는지 허풍개는 그것을 한 박자 늦게 눈치챘다.

    이윽고 이풍이 방에 들어왔다. 혹시 제 형님이 아직도 명상 중이라면 그 집중을 깨지 않도록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슬슬 영약 다 소화할 시간이 되었는데 왜 안 나오십니까. 무슨 일 있······”

    이풍의 눈에 허공을 휘젓고 있는 칼이 눈에 들어왔다.

    “어, 어어? 그거!”

    허풍개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

    “이기어검(以氣馭劍)? 월녀님이 쓰시기로 유명한······ 혹시 칼에 실 묶은 겁니까?”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아니.”

    “그럼 그냥 저절로? 그럼 이기어검이 맞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걸 왜 형님이 써요?”

    “몰라, 마.”

    “주먹질이랑 탄지공만 쓰는 분이 대체 왜······”

    “모른다니까.”

    저 혼자 질문하고 저 홀로 궁리하던 이풍은 저 홀로 뭔가 깨달은 눈치였다. 눈을 크게 뜨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허풍개 조사님께서 월녀님 가르쳤댔죠! 같은 문파니까 같은 조화 부릴 수 있나? 그럼 형님 혹시 월녀님 검술도 쓸 줄 압니까?”

    허풍개는 그녀와의 관계를 부정하려다 그만두었다. 이미 들킨 마당 아닌가.

    “그래.”

    이풍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소리 질렀다.

    “와, 씨발.”

    “조용히 해, 인마.”

    “와, 씨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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