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34화 (34/103)

녹림총채주(綠林總寨主) 구자성 - [2]

고진철이 설명하길, 무적무적자의 제안은 무림맹에 확실하게 전해졌다고 했다.

“그놈의 천마를 혼자 쓰러뜨리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또 다른 절세고수를 동원해야 한다는 말씀 말입니다. 위원들도 그 말씀이 옳다고 동의했지요······”

확실히 당연한 제안이었다. 절세고수 둘은 확실히 절세고수 하나보다 강할 것 아닌가.

고심 끝에 무림맹에서는 무림맹에 소속된 절세고수, 구자성에게 연락했다. 그 절세고수에게 몸소 나서서 같이 싸워달라는 요구를 전했다.

그리고 거절당했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 총채주께서는 이미 아흔이신데 뭘 싸워달라는 거냐? 노인을 학대하려는 거냐?’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절이었지만 무림맹은 집요했다.

정말 늙어 거동하기 어려운 것이라면 솜씨 좋은 명의를 보내주겠노라 제안했다. 치료해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늙어서 거동이 어려운지 아닌지 확인해보기 위함이었는데 바로 거절당했다.

이후로도 한국 무림의 미래가 걸렸다느니, 이럴 때야말로 무림 원로가 나서야줘야 한다느니 하면서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래도 끝내 구자성이 참전하겠노라 의사를 밝히지 않자, 무림맹에서는 이런 도발까지 했다.

‘설마 졌다간 체면이 상할까 봐 그러는 겁니까? 하기야 총채주께서 절세고수 중에 강한 편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지요.’

예의 도발은 기대한 것과 전혀 반대의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구자성과 그가 총채주로 있는 조선 녹림이 무림맹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이런 모욕을 듣고서도 남아있을 이유가 무엇이냐는 이유였다.

무림맹이 뒤집힐 만한 일이었다.

무림맹을 UN으로 치면 조선 녹림은 미국이다. 조선 녹림은 무림맹에 소속된 방파 중 최대 규모의 단체다. 그 홀로 다른 모든 문파와 맞설 수 있을 수준이다.

그러니까 이건 미국이 UN에서 탈퇴하는 것과 같은 사태였다.

무림맹에서는 발언을 철회하고 사죄도 할 테니 제발 맘을 돌려주십사 애원했지만, 구자성은 그래 주지 않았다.

무림맹에 대한 선전포고를 통해 대답을 대신했다.

“녹림에서 무림맹과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이풍의 물음에 고진철이 대답했다. 이제 그는 나이를 이유로 하대하지 않았다.

“예. 선전포고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녹림도들이 쳐들어오더군요. 저희 관악파의 사업장에요······”

“아니, 당신 관악파면 서울에서 쫓겨난 후론 영세하게 된 문파잖아. 거길 점령해서 뭐가 이득이라고 거기부터 친대?”

“그게, 그 도발을 제가 한 거라서······.”

이풍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애써 웃음기를 지우고는 말했다.

“이쯤 되면 댁이 문제 아닌가? 삼고초려를 해도 모자랄 마당에 왜 도발을 했대?”

시비를 걸어도 고진철은 욱하지 않았다. 그저 더듬더듬 애원할 뿐이었다.

“아무튼 제발, 무적무적자 대협께서 가서 뭐라 말씀 좀 해주십시오.”

“잘나신 무림맹 위원들은 뭐하길래 우리 형님이 나서야 돼?”

“이미 다른 위원들이 여러 번 연락해보았지만 전부 무시당했습니다!”

“우리 형님이 연락하면 뭐 다른가?”

“같은 절세고수의 말까지 무시하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무적무적자 대협의 스승과 사조께서는 구자성 그자와 인연도 있었다지 않습니까? 제발······”

이풍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연이 있긴 있었지만 썩 좋은 인연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제발······. 그 어느 때보다 무림인들이 단결해야 할 상황에 녹림이 빠져버리는 게 말이 됩니까? 한국 무림의 존망이 걸린 일이요!”

허풍개는 한국 무림의 존망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쏘아붙이지는 않았다.

좋든 싫든 자신의 일터 아닌가. 애초에 이번 일의 보수도 미리 받아둔 마당이었다.

허풍개가 입을 열었다.

“일단 가서 말은 해보지요. 잘 될지 안 될진 모르겠지만.”

그로부터 두 시간 뒤, 허풍개는 그저께만 해도 관악파의 사업장이었던 룸살롱에 도착했다.

이제 그 사업장을 점령한 것은 녹림도들이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산적질에서 마약 밀매와 인신매매, 도박업과 건축업 따위로 업종을 전환한 산적들.

무림맹의 차량들이 그 앞에 멈춰 섰다. 그 안에서 수십 명의 무림인이 내렸다.

잠시 후, 사업장에서 녹림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 시간에 뭐냐?” “뭐야, 씨······”

녹림도들의 기세는 방금 산적질을 하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흉흉했다.

이제 녹림도들은 무림인들이 흔히 드는 목검 따윌 들지 않았다.

녹림도들은 지금 사람을 제대로 해칠 수 있는 흉기인 손도끼와 정글도 따위로 무장하고 있었다.

어제 관악파 문도들을 습격할 때 그들은 저 흉기를 휘둘렀을 것이다. 저 흉기들은 분명히 불운한 무림인들의 피를 취했을 것이다. 한국 무림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무림맹에서 온 거 맞지?”

녹림도들은 당장이라도 싸울 듯이 다가왔다. 그들이 든 흉기들이 가로등 불빛을 반사해 번뜩였다.

반면 무림맹에서 나온 이들은 고작 목검을 들고 여기 왔다. 그것은 병기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의 차이이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녹림도들의 기세에 밀렸다.

무림인들이 애절한 시선을 보내오는 가운데, 허풍개가 앞으로 나섰다.

그 옆에서 이풍이 외쳤다.

“꺼져, 따까리 새끼들아! 무적무적자 대협께서 너희 총채주를 뵙자 하신다!”

녹림도들도 이 새로운 절세고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그들도 영상을 받아봤기 때문이다.

“무적무적자?”

녹림도들이 흠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비로소 무림인들이 안심한 가운데, 녹림도들 사이에서 한 근육질 남자가 걸어 나왔다.

“김용성입니다. 만월산채 채주입니다. 왕림해주셔서 봬서 영광입니다, 무적무적자 대협. 여긴 어쩐 일로?”

자기네 총채주와 동급의 고수를 상대로 예를 지키려는 것일까.

허풍개가 물었다.

“총채주님을 뵐 수 있나?”

“아, 그게. 총채주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셔서요. 사람 만나길 꺼리고 계십니다.”

“전화 통화는? 그마저 어렵나?”

김용성은 조금 고민하고는 말했다.

“그 정도는 될 것 같군요.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잠시 후, 허풍개는 바라던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남들이 보거나 듣지 않는 구석진 룸살롱 방에서 통화를 개시했다. 허풍개는 휴대전화에 귀를 가져갔다.

조선 녹림의 총채주, 구자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무적비비탄 대협의 제자 분이신가?」

처음 듣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구자성과는 이미 안면이 있다. 심지어 두 번이나 싸워본 적도 있다.

“예. 반갑습니다. 총채주님.”

「영상 잘 봤어요. 내 그걸 보고 어찌나 감탄했는지······」

예전에 싸웠을 때도 느꼈듯 구자성의 말투는 점잖기 그지없었다. 좆같은 산적 새끼 주제에.

허풍개는 구역질을 참으며 말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칭찬을 주고받기에 앞서 질문 먼저 하고 싶군요.”

「질문? 해봐요.」

“무림맹 탈퇴를 번복할 맘이 없으십니까?”

「없어요」

“전혀?”

「전혀. 내가 왜? 요즘 무림맹 하는 짓 보면 죄다 헛짓만 하던데, 녹림이 거기 남아있어서 득 될 게 없어 보입니다. 강남제일검 그 친구는 배신하지 않나, 검찰에 넘어가면 좆될지 모를 히트맨은 뺏기지 않나. 이거 알고 있었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하여간 병신들이라니까! 그 새끼들 심장에 지방이 껴서 그런가? 예전 무림맹은 안 그랬는데, 지금 무림맹은 무능할 뿐만 아니라 마음가짐도 글러 먹었어요. 무림의 명예를 위해 의거를 일으키신 무적비비탄 대협을 무림공적으로 삼으려 하지 않나. 내 무적비비탄 대협을 어찌나 존경하는지 말했던가요?」

글쎄, 때려눕히곤 흠씬 두들겨 패는 게 존경의 표시라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었다.

굴욕적인 패배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허풍개는 또다시 머리를 잠식하려는 수치심을 억눌러야 했다. 애써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지금은 빵에 계신 제 스승도 총채주님을 존경한다고 하셨지요.”

「그것참 기쁜 일입니다그려. 그래서 질문 끝인가요?」

“하나만 더. 자칭 천마랑 손잡았습니까? 그 금발 기지배랑 말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구자성은 말을 흐렸다.

「글쎄······」

“나한테도 동맹을 제안하더군요. 한국의 절세고수 중에 저한테만 이런 제안을 한 건 아니라고도 말했습니다.”

그제야 구자성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요, 저한테도 그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셨고?”

「예.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까?」

“글쎄요. 그래서 그 자칭 천마가 동맹의 대가로 뭘 주겠답니까? 무림맹에서 줄 수 있는 것보다 그녀가 더 값진 것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수명 연장을 도와주겠다더군요」

허풍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수명 연장?”

「그래요, 이 아흔 살 노인이 더 살 방법을 마련해줄 거랍디다. 정확한 방법은 아직 안 알려줘서 모르겠는데 지푸라기도 잡고 싶더라고. 게다가 이번에 올라온 영상 보니 충분히 능력이 있어 보이더군요. 그래서 그 제안 받아들였습니다」

“마교 수괴와 손잡는 게 녹림에는 좋은 일이 아닐 텐데요.”

「흠, 왜?」

“마교가 지금 하려는 게 아무리 봐도 한국 무림의 붕괴로 보이지 않습니까. 녹림 또한 그 여파에 휘말릴 수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뭐, 그래도 어떻게든 더 살고 싶어서 말입니다. 우리 애들한테도 솔직히 말해보니 다 동의해주더군요. 너무 고맙습디다. 내가 아직 삶에 미련이 많아. 구십 년이나 살았으니 삶이 지겨울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아요.

여전히 입맛도 돌고 여자랑 자는 것도 좋아죽겠습니다. 더 즐기고 싶으니 한 십 년만 더 살면 좋겠는데······ 아마 이해가 안 되겠지요?」

“이해가 안 될 거라니, 어째섭니까.”

「무적비비탄 제자 분이면 식도락도 안 즐기고 여자랑도 안 즐길 거잖습니까. 그러니 지상에 남아 뭔가 하는 것에 집착하지도 않을 테고······ 심지어 젊기까지 하시니까. 조금이라도 더 살겠단 이 노인네의 심정을 짐작도 못 하실 겁니다」

물론, 허풍개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설득을 포기했다. 자신이라도 저런 제안을 받았다면 결코 맘을 돌릴 것 같지 않았다.

“아뇨. 이해가 됩니다. 그럼 그만 귀찮게 하지요.”

「그래 주시면 고맙지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끝났다.

룸살롱을 나와보니 고진철과 무림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애타는 눈빛을 보내왔다.

“이야기는 잘 됐습니까? 맘 돌릴 생각이 있는지······”

고진철의 물음에 허풍개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번복 안 할 것 같더군요.”

“아······”

고진철은 눈에 띄게 좌절했다.

그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이제 그는 자기 문파의 사업장을 잃게 됐을 뿐만 아니라 무림맹에 돌아가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고진철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불쌍해 보이는지. 고진철을 좋아하지 않는 허풍개조차 아주 약간의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허풍개가 말했다.

“애초에 당신 망언은 이번 사태의 원인이 아니요.”

“예?”

“구자성 그 인간, 처음부터 무림맹 나갈 생각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 발언은 그냥 핑계일 뿐이었고.”

“정말 그럴 것 같습니까?”

“예. 그러니까 무림맹에 돌아가서 항쟁의 준비나 하라고 해요.”

고진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을 무림맹에 돌아가서 전할 때······ 대협의 권위를 빌려도 되겠습니까?”

“대협의 권위라니?”

“제 추측이 아니라 무적무적자 대협께서 하신 말이라고 직접 말하고 싶어서······.”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신다면.”

고진철은 조금이나마 기력을 되찾은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고풍스러운 목함. 당연히도 영약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이건 약소하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주신다면야 감사히.”

허풍개가 영약을 받아서 챙겼더니, 고진철은 그 귀물을 주어 아까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물을 받아줘서 안심한 것 같았다.

무림인들이 허리 숙여 배웅하는 가운데, 허풍개는 이풍과 함께 돌아갔다.

차 안에서 이풍이 물었다.

“협상이 안 됐다면서요. 그럼 이제 녹림이랑 무림맹이 전쟁하는 겁니까?”

“아마.”

“와, 그럼 무림인들 사이에 진짜 항쟁이 벌어지겠네? 수십 년 만인가······”

이 상황이 이풍은 기꺼운 눈치였는데, 무림이 평화롭지 않을수록 돈 벌 기회가 많아진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었다.

문득 허풍개가 물었다.

“그래서, 바람이는?”

“예?”

“딸애가 무림 데뷔할 때 말리지 않을 거라며. 한국 무림은 평화롭고 무림인은 다칠 일도 별로 없으니까 그래도 괜찮을 거라 했던가. 그래서······ 이젠 좀 말릴 맘 드냐?”

“어, 그게요······.”

“무공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계속 익히게 해도 된다. 그런데 무림 깡패는 못 하게 말리면 안 되는 거냐?”

이풍은 우물쭈물 뜸 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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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소에 돌아와 보니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적무적자 대협이시지요? 주문하신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남자는 목함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역시나 영약이요, 오늘 고진철에게서 받은 그것보다 훨씬 귀한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 번 돈을 모조리 털어 주문한 영약이었다.

이백십억짜리 영약, 태어나서 몇 번 구경해본 적도 없는 귀한 영약이었다.

박 회장이 주었던 그 영약만큼의 귀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만한 영약을 직접 돈 주고 산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백억이나 되는 거금을 만져본 적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소화하실 거면 호법 서요?”

이풍의 말에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줘.”

허풍개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이풍이 문 앞을 지키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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