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32화 (32/103)

천마(天魔) 라나 - [3]

허풍개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라나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기관단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비켜요. 쏠 거야.”

허풍개는 움찔하려는 몸을 겨우 진정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에게 겨누어진 총을 볼 때마다 이러곤 했다.

하여간, 저놈의 역겨운 물건 같으니.

일제 강점기에는 기관총을 가진 야쿠자들과도 싸워본 적이 있다. 건국 초에 따발총을 갈겨대는 정치깡패들을 때려눕힌 적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면에서 맞서려 한 적은 없다.

총이 어떤 물건인가. 사천당문(四川唐門)이 개발해낸 그 어떤 암기보다 흉악한 물건이다. 사천당문의 고수가 던지는 암기라도 일곱 살 어린애가 쏘는 총알을 능가할 순 없는 것이다.

그런 물건을 가진 놈과 싸우기 위한 무림인들의 전술은 이쪽도 총을 들고는 상대가 쏘기 전에 먼저 쏴버리는 것이요, 총은커녕 칼도 손에 잡지 않는 허풍개의 전술은 총알이 다가오지 못할 공간에서 도탄을 이용해 일방적으로 공격해버리는 것이었다.

총 앞에 서서 뭔가를 하는 것은 결코 고려할 만한 전술이 아니었다. 하물며 총을 든 누군가가 이쪽만큼 반사신경이 좋을 절세고수라면야.

그리고 허풍개는 비키지 않았다.

라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물었다.

“오래 살고 싶어서 양생술 익히신 거 아니에요?”

“물론 그렇지. 가능하면 영원히 살고 싶어.”

“그런데 이래도 돼요?”

허풍개가 자세를 잡았다.

“그러려면 이래야 하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목도 꼿꼿이 세웠다.

태극권의 기본인 입신중정(立身中正)이었다. 기혈(氣血)의 순환이 최대한 원활하게 하기 위한 자세, 총 앞에서 하라고는 권할 수 없게도 피격면적을 대놓고 키워버리는 자세였다.

양쪽 다리는 힘주어 구부렸다. 지면에 닿은 양발로 대지의 기를 받아들면서, 허풍개는 자기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 순간이 지나가고서 공과격에 기록할 숫자는 크리라고.

영원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이 순간을 버려야 한다고. 설령 찰나의 죽음이 닥칠지라도 천천히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느니보다는 나으리라고 속삭였다.

누구보다 오래 살기를 원하는 주제에 겪어온 목숨의 위기는 대체 몇백 번이던가? 그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지금처럼 속삭이면서, 무엇보다 소중한 목숨을 기꺼이 도박판에 올려놓았다.

라나가 중얼거렸다.

“미쳤네.”

그녀로서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눈치였지만, 봐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라나의 가느다란 검지가 방아쇠에 닿았다.

허풍개는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긴장감을 억누르고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호흡이었다. 자신의 기뿐만 아니라 주변의 기까지 모조리 받아들이면서 온몸의 기를 활성화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날선 신경이 주변의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는 국뽕대협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헛짓 말고 비켜요······ 절세고수가 고기방패 해줬다간 나 나중에 뭔 욕을 처먹으라고······”

나름 사나이다운 말을 하고 있지만, 그 호흡은 가팔랐다.

들어보니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는 겁먹은 모양이다.

이쪽 심장도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호흡을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는 가운데, 허풍개의 양쪽 눈은 눈앞에 선 상대방을 똑바로 향했다.

라나가 한숨 쉬었다.

그녀의 검지가 당겨진 순간, 총구에서 뱉어낸 납덩이는 소리를 뛰어넘어 날아왔다. 그것도 세 발이나.

그 순간 라나의 손가락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었던 허풍개의 양팔은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별로 숙련된 몸짓은 아니었다. 아까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세 번의 천둥이 울렸다. ‘탕탕탕!’ 실제 천둥과는 다른 소리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의 귀에는 정말 그렇게 들렸다.

천둥이 울린 후로는, 정적이 흘렀다.

모두 말없이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서 있었다. 어떻게?

총알이 빗나간 것인가 싶어 보았더니, 빗나가도 너무 말이 안 되게 빗나가 있었다.

라나도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어?”

그녀는 멍하니 자신의 총을 보았다.

그 쇳덩이는 부서져 있었다. 자신이 쏘아낸 총알을 돌려받아서.

다른 두 발의 총알은 라나의 양옆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닥에는 두 개의 선명한 총알 자국이 남은 채였다.

또 한 번, 살아남았다.

허풍개는 피가 줄줄 흐르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나? 건곤대나이······.”

라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와······, 어떻게?”

“댁이 한 거 보고.”

“나도 가끔 권총 상대로나 써먹지 연사 되는 거 앞에선 안 하는데?”

“못 하나?”

“안 해봐서 몰라! 집에 가서 해볼까? 하지만 위험할 거 같은데······.”

라나가 시선을 돌렸다. 휴대전화로 몰래 촬영 중이던 무림맹 집행원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찍었어요? 스고이했는데!”

그러더니 다시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에게 총을 쏜 괘씸한 누군가는 이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라나가 물었다.

“좋은 구경시켜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말인데, 호법 장로 안 할래요?”

“마교 수괴는 안 한다니까.”

“밥 대신 영약 먹을 수 있어요! 공과 관리하셔야 하는 거면 우리 교에서 자선활동 많이 하니까 큰 거 맡아서 하게 해줄게요.”

“달콤한 제안이기는 한데, 그걸 왜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합니까.”

“몸값 올려주려고 이러는 거예요! 스카우트 좋은 조건으로 받은 거 널리 알려지면 더욱 귀한 대우 받잖아요. 배려해줘서 고맙죠?”

그리 말하더니 라나는 양복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허풍개가 받아보니 명함이었다. 웬 유투브 주소가 적혀있는.

“나중에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그녀의 시선이 또 돌아갔다. 아직도 휴대전화를 잡고 있던 무림맹 집행원을 향해서였다.

“지금 찍는 거, 소리도 담아요?”

“예? 예······.”

“그럼 짧게 몇 마디만. 음, 음······ 한국 무림 여러분?”

무림공적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가는 나중에 무슨 욕을 들어먹을지 모를 무림맹 집행원도, 당장 손이 망가진지라 싸울 상태가 아닌 허풍개도 그녀의 선언을 막을 수 없었다.

“천마는 무적이에요. 아무도 못 이겨요. 왜냐하면 천마니까······ 여러분은 끝났어요.”

지금 촬영된 것을 보여주면, 다들 정말 그리 생각할지도 몰랐다.

“해외로 뜨든가 금분세수하든가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라나는 창고를 떠나 사라졌다. 이 역시, 그 누구도 막을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무림맹 집행원이 신음했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걸까. 한동안 멀거니 서 있다가 뒤늦게나마 퍼뜩 깨달은 듯 물었다.

“무적무적자 대협? 괜찮으십니까? 빨리 병원 가셔야······”

허풍개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고, 근육이 보이고 있었지만 뼈는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야 목숨값치고는 뭐.

“손가락은 멀쩡하니까 됐습니다. 그보다 다른 분들 먼저 챙겨야겠는데. 국봉대협은 손 씹창 났으니까 그것부터 챙겨야겠고.”

무림맹 집행원은 몸값 비싼 고수들부터 챙기기로 했다.

아까 배를 얻어맞고 기절한 오은림, 손 상태가 좋지 않은 허풍개와 국뽕대협을 차에 태우고는 무림맹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운전수를 제외한 모두가 부상자였으므로 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문득 허풍개가 중얼거렸다.

“옛날 무협 소설 보는 줄 알았네. 직접 보면서도 뭔, 말도 안 되는 일만 잔뜩 해가지고······”

무림맹 집행원은 당신이 벌인 일들도 만만찮았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확실히 모두 판타지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오늘 상대한 그 여자가 더 노골적인 판타지기는 했지 않은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또 상대하시면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혼자서는 영 어렵겠고, 전력 더 모아야 할지 말지 가늠할 것 같은데요. 다음엔 강남제일검도 부르시죠.”

무림맹 집행원의 눈이 흔들렸다.

“그분은 좀······”

“저번에 나랑 충돌했으니 같이 일하긴 뭐하다던가?”

“예, 그렇습니다. 아쉽게도······”

그리 대답하면서 시선을 딴 곳에 돌리는 걸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허풍개로서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은 있었다.

굳이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산적 두목은. 그 양반은 못 부릅니까.”

“산적 두목? 아, 구자성 채주님이요. 아무래도 그분을 움직이긴 어렵지 않을지······”

“움직이게 해야죠. 쉽든 어렵든 그년 잡을 맘 있으면 반드시.”

허풍개의 말에 무림맹 집행원은 반박하려다 말았다.

확실히 그 남자를 부르는 것은 그 어떤 고수를 부르는 것보다 더욱 도움 될 것이다. 그 또한 절세고수 아닌가.

여기 있는 무적무적자를 포함해 무림맹의 유이한 절세고수 둘이 한꺼번에 덤빈다면, 그 아무리 말이 안 되는 마법사일지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

무림맹 집행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노력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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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에서 올린 영상 봤어요?”

“봤어요. 내 눈이 다 의심스럽던데.”

“개쩔었죠!”

“그렇더군요. 여기 계신 천마님의······ 도술? 기공? 아무튼 그것들은 말도 안 되게 놀라웠고. 무적무적자인가 하는 그 친구도 아주 놀랍습디다. 허풍개 어르신이랑 무적비비탄 그 친구, 둘 다 나한테 진 양반들인데······ 이번 대에는 아주 잘 키웠구먼. 영상에서 보기로는 젊은 친구던데 참 놀라워요.”

“무적무적자 그 오빠, 실은 별로 안 젊을걸요?”

“그럴지도. 그래서, 여기 계신 아가씨는 몇 살이요?”

라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열일곱 살이에요!”

“나는 곧 구십이요. 오늘내일해요.”

“안됐네!”

“월녀 그 아지매는 아예 처음부터 늙지를 않았다는데, 난 이미 늙어놓고 그걸 바랄 순 없고. 그게 정말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로환동을 하면 좀 안심이 될 것도 같습니다.”

“노력하면 될 거예요!”

“하여간 젊을 때 좀 좋은 걸 익혀서 내공 갈고닦을 걸 그랬어요. 젊을 적에야 산적 주제에 뭔 내공의 정순함 같은 걸 따지겠냐, 하면서 그냥 가성비 좋은 무공만 갈고닦았는데. 나이 먹고 보니까 도가랑 불가 무공 익힌 친구들이 그리 부러울 수가 없어. 하여간 사파 새끼는 나이 먹고 고생이지, 이 상태론 내일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원······.”

“그만 말씀하셔도 돼요! 그리 눈치 안 주셔도 약속한 거 최대한 빨리 드릴게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럼 이제 우린 친구인 거죠?”

“예.”

구자성의 대답에 라나가 웃었다.

“좋아요. 이제 한국에 있는 절세고수 다섯 명 중에 세 명이 한 편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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