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31화 (31/103)

천마(天魔) 라나 - [2]

오은림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 넓은 창고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일찍이 탄지신공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았다. ‘탁, 탁’ 소리를 냈던가?

방금까지도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었다.

‘텅, 쿵, 텅’하는 소리가 연신 울리고 있었다.

묵직한 소리. 금속으로 된 BB탄이 컨테이너 벽이며 바닥 따위를 튕기며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사방에서 쉼 없이 울려대고 있었다. 오은림의 시선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지금 무언가가 날아다닌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것은 금속으로 된 BB탄이 조명을 받아 생기는 번쩍임으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까도 잘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아예 볼 수가 없다. 아까보다 지금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날려대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까는 힘을 아끼며 탄을 날려댄 것이요, 지금 비로소 전력으로 날리는 것일까.

아까 일부러 힘을 아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제 반격당할 염려가 사라졌기에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까닭일 것이다.

천장에 닿을 만치 높은 곳에서, 무적무적자는 자신이 연결한 줄을 밟고 섰다.

일류 곡예사라도 되는 것처럼, 그 얇은 줄에서 그 몸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은림은 그 자세 그대로 BB탄을 날리는 그 모습을 보았다.

아무런 과장 없이 무적으로 보였다. 오은림으로서는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저러는 상대에게 반격할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칼 한 자루 들고 저 높은 곳의 적에게 어찌 해를 끼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정확히 몇 개의 BB탄이 날아다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명을 반사한 반짝임들은 보였는데, 언뜻 보기에도 지금 날아다니는 탄환이 여섯 개는 넘어 보였다.

그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소녀 하나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조그맣고 재빠른 사냥꾼들 사이에서 멀쩡하게 살아남고 있었다.

그녀가 춤추듯이 보법을 밟으며 탄환들을 피했다. 그러면서 손목을 살짝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BB탄 한두 개가 잘려 떨어졌다.

오은림은 그 순간을 노리고 기습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탄환들 사이에 휘말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절세고수들의 싸움인 만큼 자신이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긴 했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로 무력할 줄은 몰랐다.

오은림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더 뒤로 물러나서 칼을 움켜쥐었다.

차라리 방해라도 되지 않겠다는 그 결정이 지금 허풍개로서는 기껍기 그지없다.

허풍개는 계속해서 맹렬하게, 양손으로 탄지공을 구사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공격을 피하고 또 막아내는 라나를 내려다보았다.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면서도 라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 상황이 즐겁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늘 그러듯 허세를 부리는 걸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던 일을 계속했다. BB탄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또 튕겼다.

열 개에 가까운 탄환의 도탄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허풍개 그 자신조차 저 한 가운데에서 오래 버틸 자신은 없었다.

이렇듯 높은 위치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은 무적비비탄의 장기였다. 절세고수와 싸울 때조차 번번이 무승부를 낼 수 있게 한 전법 중 하나였다.

높은 곳에서 혼자만 공격하는 마당에 적의 경지가 어쨌건 질 이유는 없는 것이다. 불리한 공간에서 원치 않은 근접전을 해야 할 때면 결국 지긴 했지만, 또한 이 방법으로 절세고수를 이긴 적은 딱 한 번밖에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은 무적의 전법이기는 했다······.

라나의 시선이 멈췄다.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 소드스틱을 움직이면서도 그 시선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길함을 느낀 허풍개는 라나의 시선을 따라 발밑을 보았다.

밟고 선 줄에 불이 붙어있었다.

허풍개는 흠칫하며 생각했다. 삼매진화의 조화인가? 하지만 불은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나 만들어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멀리에도 불을 붙일 수 있다고?

속이야 어쨌건 허풍개의 표정은 태연했고 대응 또한 신속했다.

허풍개는 가뿐히 뛰어 다른 줄로 몸을 옮겼다. 그 아래의 줄이 불타서 끊어졌다.

잠시 후에는 지금 밟은 줄에도 불이 붙기 시작했지만 허풍개는 태연하게 줄을 옮겨 다니며 일방적인 공격을 거듭할 뿐이었다.

계속해서 ‘텅, 텅’하는 소리가 울렸다. 컨테이너 벽에는 수많은 둥그런 자국들이 생겨났다.

여기저기에서 불꽃이 줄을 따라 타올랐다. 불붙은 낚싯줄 옆을 날아다니던 BB탄은 그 빛을 반사해 붉게 번뜩였다.

이 와중에 무림맹 집행원은 다리가 꺾인 나머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소리가 날 때마다 계속 몸을 움찔하면서, 그러나 눈은 홀린 듯이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림맹에 보고하기 위해 이 장면을 열심히 휴대폰 카메라에 담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아연함을 느꼈다.

이 장면을 기록한들 참고 자료가 되기는 할까? 자신은 직접 보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절세고수들이 마법사 비슷한 존재들이란 말은 들었지만 이건 너무······.

그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까지 본 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허풍개는 갑자기 몸마저 멈춰선 라나를 보고 흠칫했다.

그녀의 머리를 향해 BB탄 하나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그에 맞서, 라나는 소드스틱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그 칼끝을 위로 행했다.

칼끝에서 비눗방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비눗방울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쏟아져나온 그것들은 빛으로 된 구슬 같기도, 실체를 가진 투명한 구슬 같기도 했다.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별빛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분 비눗방울이나 별빛이 그렇듯 더없이 해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별빛에 닿은 BB탄이 사라졌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없어졌다.

라나가 소드스틱을 내렸다. 그 칼끝을 허풍개에게로 돌렸다.

허풍개의 시선에는, 라나가 그 얇은 소드스틱을 빨대 삼아 비눗방울을 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허풍개의 시야에는 반짝이는 별빛이 가득 찼다. 개수로 치면 고작 다섯 개였지만 반짝거리는 빛 때문에 그리 보였다.

다섯 개의 구슬들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들이 날아오는 방향을 알아보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별빛 비눗방울들은 천장의 조명과 주변의 불꽃을 머금어 오색의 빛깔로 반짝였다. 그 선명한 빛의 궤적을 포착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허풍개가 날려대는 BB탄들에 비해서는 별로 빠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피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허풍개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방금 그 해가 없어 보이는 비눗방울이 자신이 있던 자리의 벽을 뚫어버렸기 때문이다.

경악 속에서 생각했다. 저건 대체 뭔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그 경악은 더욱 커졌다.

방금 보았건대, 그것은 기(氣)였다. 눈에 선명하게 보일뿐더러, 현실에 영향을 끼칠 만치 강력하게 뭉친 기의 다발.

강기(罡氣) 다발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강기들은 이곳저곳으로 날아갔다. 사방에 걸려있던 줄을 잘라내고, 창고 벽을 지워버리면서 여기저기로 사라졌다.

밟을 줄을 더 만들어내야 했다.

허풍개는 주머니에 넣어둔 줄 몇 개를 더 던졌다. 그리하여 줄 몇 개를 더 연결해냈지만, 주머니에 든 줄이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저 짓거리를 하기 위해 소모하는 기 또한 무한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쪽이 먼저 소모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 라나의 표정을 보니 태평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허풍개는 도저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경악한 나머지 사고를 멈추거나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심호흡하여 맘을 가다듬었다.

그래, 상황이 아무리 비현실적인들 뭐 어떤가. 왕년에는 칼이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썰어대던 것도 보았던 몸이다. 무림에 오래 머물며 비현실적인 일은 이미 충분히 보았다. 지금 이건 지금까지 본 것중에 제일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건······.

허풍개는 마지막 반격에 나섰다.

주머니 깊이 손을 쑤셔 넣었다. 손에 잡힌 BB탄들을 모조리 쏟아냈다.

장기전을 생각하면 사용할 맘이 없었던 만천화우였다.

공중에서 폭격처럼 쏟아져 내리는 BB탄들을 보며 라나는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눈치였지만, 아주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라나는 씩 하고 웃더니, 지금까지는 네다섯 개씩만 쏟아내던 강기 다발을 산탄처럼 한꺼번에 퍼뜨렸다.

머리 위의 폭격을 지워버리기 충분한 양이었다.

별빛과 탄환들이 맞부딪치던 그 순간, 허풍개는 저 뒤에 선 오은림에게 눈짓했다.

‘지금.’

오은림은 이미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짓을 보자마자 땅을 박찼다.

세차게, 그러나 소리 없이 달려 나가며 백사출동을 펼쳤다.

이번에도 완벽하기 그지없는 찌르기가 펼쳐졌다. 그녀의 칼은 만천화우를 방어하는 데 집중하던 라나의 등을 노리고 뻗어 나갔다.

라나는 그 기척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라나는 몸을 뒤틀며 오은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드스틱을 움직였는데, 오은림은 굳이 서로의 칼을 부딪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시선 분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 오은림은 달려 나가다 말고 뒤로 껑충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라나가 다가왔다. 계속 뒤로 걸어 거리를 벌리려다 말고, 오은림의 몸이 휘청거렸다.

난데없이 창고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라나는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과 지금 일어난 진동은 동일한 박자였다. 설마 정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이 지진을 그녀의 가벼운 발걸음이 일으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오은림으로서는 진동 탓에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뒷걸음질을 쳤으니 멀쩡할 수 없다.

오은림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와 동시에 지진이 멈췄다.

오은림이 고개를 들어보니, 라나가 그 앞에서 소드스틱을 겨눈 채 웃고 있었다.

“읍······”

오은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소드스틱의 칼날이 그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라나가 소드스틱을 90도로 비틀던 그때였다.

탕, 하고 총성이 울렸다. 그와 함께 라나의 머리칼 몇 올이 잘려 나갔다.

허풍개는 소리가 난 쪽을 급히 바라보았다.

국뽕대협이 주저앉은 자세로, 권총을 들고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뒤······ 져.”

무력화된 척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모양이다. 품 안에 총 한 자루를 숨기고 있다가 움직임이 멈춘 순간 쏜 것이다. 그러나 오른손을 쓸 수 없으니 왼손으로 쐈다가 빗나가버렸다.

라나도 국뽕대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라나는 국뽕대협을 멀거니 바라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재밌는 중에 뭔 짓이야, 진짜.”

라나는 그리 중얼거리더니 오은림의 가슴을 걷어찼다.

오은림이 저 멀리 나가떨어져 벽에 부딪쳤다. 라나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된 걸 확인하더니, 소드스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MP5 기관단총을 꺼냈다.

허풍개는 또 한 번 기겁했다. 그놈의 기관단총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가. 직접 지켜보면서도 알 수 없었다. 발도술처럼 순식간에 총기를 꺼내는 기술이라도 있는 걸까?

어느 쪽이건 그걸 어디에 쓰려는지는 분명했다. 싸울 때는 안 쓰다가 지금 쓰려는 걸 보니 분명 처형용이다. 흥을 깨버렸으니 괘씸한 난입자를 응징하기 위한 처형용 도구 말이다.

허풍개가 입을 열었다.

“신성한 무림에서 어디 감히 총질이냐고 안 따졌습니까.”

라나가 코웃음 쳤다.

“무공을 펼쳐야 무림인이죠? 총이나 쏘는 것들은 총잽이에요. 쏴 죽여도 돼요.”

“그쪽은 아예 총을 팔기까지 하면서 뭐 그리 억울해합니까.”

“그거야 무공 안 익힌 애들이 무림인들이랑 대등하게 싸우라고 파는 거죠? 그래야 공평하니까.”

라나가 기어이 기관단총을 국뽕대협에게 겨누었다.

최후를 각오한 국뽕대협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귀에 탁, 하는 소리가 났다.

뭔 소리인지는 몰라도 총성은 아니었다.

국뽕대협이 눈을 살짝 떠보니 허풍개가 그 앞에 등지고 서 있었다. 저 위에서 떨어져 내린 모양이다.

국뽕대협의 앞을 막고 선 허풍개가 말했다.

“우리가 졌습니다. 이대로면 사람도 몰려올 것 같은데 이만 물러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리고 라나가 대답했다.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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