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29화 (29/103)
  • 월녀(越女) - [3]

    홍나연은 시위대 부령(副領)이다. 지휘관이지만 명예직일 뿐이다.

    그녀가 실제 하는 일은 노인을 위한 도우미에 가까웠다. 월녀의 곁에서 그녀를 돌보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홍나연은 월녀의 앞에 서서 물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월녀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더니 대답했다.

    “응, 좋네. 오랜만에 사부도 보고.”

    “사부님? 혹시 주안산에서 만난 진인 말씀하세요?”

    월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홍나연은 홍나연은 애써 웃어야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백 년 전 인물과 재회했다고?

    오늘 만난 그 청년을 말하는 건가?

    홍나연은 정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과거와 현실의 인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상태가 심각한 것 같지만, 새삼 놀랄 필요는 없었다. 월녀의 상태가 악화된 것은 몇 달 전부터 아닌가.

    요새 월녀는 과거에 잠겨 사는 것 같았다. 툭하면 대화의 흐름과 상관없이 과거 일을 이야기했으며, 눈앞의 인물이 추억 속 누군가인 것처럼 굴곤 했다.

    ‘평소에는 축 늘어져 지내더니 오늘은 어째 표정에 생기가 돌아서 상태가 좋은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지······.’

    홍나연이 고민하는 가운데, 하아린은 오늘 만난 사부를 떠올렸다.

    그 청년은 확실히 그녀가 기억하는 사부가 맞았다. 그러니까 방금 그 말은 딱히 과거와 현실을 혼동한 것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평소라면 비밀로 간직했을 내용을 떠벌린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분별력이 상당 부분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월녀는 방금 한 말을 반복했다.

    “좋네. 오랜만에 사부도 보고.”

    홍나연은 웃으려다 말고 흠칫했다.

    칼 한 자루가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고종 황제가 자신의 호위무사에게 하사한 사인검(四寅劍). 누군가가 던진 것이 아니요, 따로 실을 묶어 조종하는 것도 아닌 그 검은 저절로 허공을 날아 자신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사인검을 쥔 월녀가 검무(劍舞)를 추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저 검술 수련을 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춤으로 보일 뿐일지도 몰랐다.

    감탄과 불안감이 반씩 교차하는 가운데, 홍나연은 조심스럽게 벽으로 물러났다. 경외 어린 시선으로 한국 최고 무인의 몸짓을 지켜보았다.

    *******

    무림맹이 절세고수와 천억짜리 고수에게 급히 연락한 것은 그럴 만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무림공적, 그것도 마교의 수괴를 붙잡기 위한 부름이었다.

    불러 모은 무림인들 앞에서 무림맹 집행원이 말했다.

    “오늘 드디어······ 마교 수괴의 위치가 드러났습니다.”

    국뽕대협이 물었다.

    “마교 수괴라면, 자칭 천마?”

    “예. 무림맹에서는 오가장 소가주께서 넘겨주신 마약상들을 심문했습니다. 놈들의 진술대로 움직인 덕에 다른 마약상들도 추가로 포박할 수 있었는데요.

    그 자칭 천마는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서 온갖 물건들을 판다고 합니다. 마약과 총기 및 탄약들 말입니다. 마약상들의 진술을 교차검증한 끝에 그것들을 판매하는 장소를 알아냈지요.”

    “천마씩이나 돼서 직접 물건을 판다고? 딴 마교도들은 뭐하고? 한국에도 마교도들 이미 있잖아. 걔네 시키는 게 정상 아닌가?”

    “그 폴란드 아가씨는, 웬만해서는 조직 단위로 움직이거나 조직원들을 부리는 게 아니라 혼자서 움직이는 모양입니다.”

    “왜?”

    “뭔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우리들에겐 좋은 거죠. 홀로 있는 그녀를 습격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무림맹에서는 단순히 수적 우위만 믿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자칭 천마는 절세고수로 추정되는 고수 아닌가. 확실히 압도하려거든 그만한 전력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무림맹에서는 몸값이 백억을 넘는 고수를 셋이나 불러 모았다.

    “이번 일은 거의 다 오가장 소가주께서 준비하신 겁니다. 이 모든 노력이 작고하신 부친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지요. 모두 엄숙히 경의를······”

    집행원이 자신을 소개하는 가운데 오은림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녀와 허풍개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은림이 먼저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했다. 허풍개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몸값이 천억에 달하기로 이름 높은 국봉대협께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시러 온······”

    국뽕대협의 주머니에는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권총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그 권총을 뽑아들며 자신감 넘치게 웃었다.

    이번 일로 얻을 보수며 절세고수를 상대로 승리할 경우 올라 갈 몸값이 기대되는 것일까? 그 표정은 정말로 즐거워보였다.

    “······마지막으로, 절세고수임이 입증된 무적무적자께서 와주셨습니다. 모두 열렬한 환영의 박수로······”

    자신을 향해 열렬한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허풍개는 여기 모인 무림인들을 보았다.

    방금 소개된 세 명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엄청난 고수는 없었다. 거의 다 쭉정이들이었다.

    하기야 이런 공적인 임무에 몸값 비싼 고수들을 내보내어 그 몸을 상하게 하고 싶은 문파는 많지 않을 것이었다.

    박수는 한참 뒤에야 끝났다. 그러고도 무림인들의 시선은 허풍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만하다. 절세고수쯤 되면 웬만해서는 얼굴을 마주칠 일도 없다. 절세고수란 으레 어딘가의 수장이기 마련이다. 그 엉덩이가 가벼울 수 없다.

    그 점을 생각하면, 마교의 수장씩이나 되는 자칭 천마가 혼자 움직인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요즘 세상에 절세고수라고 해서 혼자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대체 왜?

    집행원은 그 불가해한 절세고수, 자칭 천마를 잡을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작전을 듣고 난 무림인들이 중얼거렸다.

    “괜찮은데······”

    허풍개가 듣기에도 썩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

    설명을 마친 집행원이 허풍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 작전에 조언해주실 게 있으신지요?”

    허풍개는 조금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작전대로 하려면, 여기 몸값 비싼 고수 세 명은 나중에 투입돼야 합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그녀는 아마 사람의 체내 기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체내 기가 많은 고수들은 딱 보기에도 무림맹에서 왔다는 걸 눈치챌지 모르죠.”

    집행관이 눈을 껌벅이다 물었다.

    “체내 기를 보다니, 그런 게 가능합니까?”

    “일단 나는 됩니다. 아마 그녀도 될 것 같은데.”

    오, 하는 감탄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과연 절세고수, 하는 감탄도.

    허풍개가 계속 말했다.

    “애초에 그녀는 나와 이미 안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 얼굴은 무조건 숨겨야 합니다.”

    “이미 만나본 적이 있단 말씀입니까?”

    “예. 말도 안 되는 삼매진화를 보여주더군요.”

    “아······ 삼매진화······ 확실히 절세고수인가보군요. 특별히 조심할 점이 있겠습니까?”

    “삼매진화라면, 그걸로 뭘 할 수 있는진 모르죠. 나도 못 쓰는 건데. 아무튼 다른 고수는 더 없습니까? 절세고수를 상대하는 일인 만큼 전력은 많을수록 좋을 텐데요.”

    집행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약속 시간을 알아낸 게 불과 수 시간 전이라서요. 이 인원도 급히 모은 거라······”

    허풍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론적으로는 지금 전력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절세고수와 천억짜리 고수, 백오십억짜리 고수가 있는 마당 아닌가. 거기에 하수들이라지만 수십 명을 모아놓았다. 이 정도라면 그 어느 절세고수가 상대라도 능히 쓰러뜨릴 만하다.

    “그래서 작전에 이의 있는 분 없습니까? 그럼, 출발하죠!”

    무림인들은 각자의 차량에 올라타 인천항으로 이동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허풍개가 물었다.

    “정말 복수를 하시려고?”

    오은림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해야죠. 아비 복수도 못한 년을 누가 대빵으로 모시겠어요.”

    그녀는 긴장되는지 말하면서 칼을 만지작거렸다.

    그 칼은 전에 봤던 죽검이 아니었다. 무림인들이 정말 심각한 상황에서나 쓰는 진검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잘 갈린 칼날만 봐도 그녀의 살의가 충만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허풍개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죄송스럽지만, 작전대로라면 우리는 그녀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죽이면 안 된단 건 알아요. 폴란드 마피아 두목 겸 마교 지부장이라던데. 그 정도 되는 인물을 함부로 죽이면 큰일 난다는 것도 알고요.”

    허풍개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하지만 만약의 경우, 급박한 상황에 칼이 꽂히는 건 어쩔 수 없겠죠.”

    그마저 말릴 수는 없었다.

    허풍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차량은 인천항에 멈췄다.

    “작전대로 여기 세 고수께서는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저희가 먼저 간 다음 연락드리겠습니다······”

    무림맹 집행원은 다른 인원들을 거느리고 떠나갔다.

    그로부터 불과 십 분 뒤였다.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와주십쇼. 빨리」

    그것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제발 빨리!」

    ********

    라나 레반도프스카는 마약상들이 말한 그 장소에 있었다. 인천항의 폐창고 안이었다.

    무림인들은 마치 물건을 사러 온 손님처럼,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 와중에 무림맹 집행원은 그녀 옆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고 의아했다.

    저 많은 총기와 탄약을 옮기는 것만 해도 꽤 중노동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짐을 날라줄 부하조차 그녀 옆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

    의아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 라나에게 접근한 집행원이 물었다.

    “총 파는 분 맞죠?”

    라나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총 사시려구?”

    “예. 추천할 거라도······”

    “거버먼트 사요! 거저나 다름없는 구십만 원에 드릴게요! 탄약까지 합쳐선 딱 백만 원, 정말 싸다!”

    무림맹 집행원은 준비해온 현금을 내밀었다. 그러자 라나는 정말 총기와 탄약을 내주었는데, 이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싸구려 마약상도 경찰이 위장한 채 접근해올 것을 염려하여 온갖 안전조치를 마련해두는 법 아닌가. 그러나 이 소녀에게는 최소한의 조심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생각이 없어보이는 저 소녀가 과연 마교의 수괴일까. 흘긋 보니 저번에 무림맹 대회에서 본 사진의 소녀와는 얼굴이 다른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 자칭 천마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절세고수가 아닐지도 모르고.

    그래도 일단 사로잡기는 해야 했다.

    무림인들은 각자 총기 한 자루씩을 구매하고는, 탄약까지 구매했다.

    그리고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탄약 넣는 법도 좀 가르쳐주실 수······”

    “아니, 남자들이 이렇게 모였는데 군 경험 있는 분이 하나도 없어요? 어쩔 수 없네! 친절한 와따시가 가르쳐줄게요!”

    정말 총에 탄약 넣는 법을 몰라서 그리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자리에서 바로 총에 실탄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무림인들의 각자 구입한 총기에 탄약을 채워넣은 뒤, 바로 작전의 마지막 단계에 나섰다.

    다들 구입한 총을 천천히 들어, 소녀를 향해 겨누었다.

    집행원이 말했다.

    “손 들어.”

    자기에게 겨눠진 십수 개 총구를 보고서 라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러기예요? 하기야 일단 구입한 물건을 어찌 쓰든 손님 맘이긴 한데······.”

    “손들라고, 아가씨. 총맞기 싫으면 닥치고 얼른.”

    총구에 둘러싸인 마당임에도 라나는 태연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에게 총구를 겨눈 채, 무림맹 집행원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것은 또 무슨 배짱인가?

    지금 이건 절세고수라도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전설 속 어검술(馭劍術)을 쓸 수 있기로 유명한 월녀라도 이 상황에서는 기꺼이 두 손을 들어올릴지 모른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는 속도는 검이 비행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를 테니까.

    그러나 이 상황에 어떤 위기감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라나의 입가에 걸린 은은한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라나는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실 천마가 아니라 진마(眞魔)예요.”

    “뭔 소리야?”

    “보면 알아요.”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는 것일지는 모르지만, 만약의 경우엔 정말 쏴야할지도 모른다.

    불안감을 느낀 무림맹 집행원은 저도 모르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총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열에 놀라 총을 놓칠 틈도 없었다. 총기가 폭발했다.

    그가 든 총기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무림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억!” “악!” “억·····”

    모든 총기의 내부에 불꽃이 생겨나 화약을 폭발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들고 있던 총기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 내부의 부품들은 수류탄 파편처럼 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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