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28화 (28/103)

월녀(越女) - [2]

“내력전수?”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하아린이 말했다.

“몰라? 지금껏 쌓아온 내공을 딴 사람에게 물려주는······.”

“뜻 물어본 거 아니다. 그걸 네가 나한테 해줄 거라고?”

“그럼 해달라고 불렀게.”

허풍개가 쏘아붙였다.

“미쳤니?”

하아린이 눈매를 좁혔다.

“미치긴.”

“안 미쳤음 그걸 네가 나한테 왜 해주냐.”

“사부가 내게 무공을 가르쳐줬잖아? 웬 년이 아무것도 안 들고 찾아와서 대뜸 귀한 가르침 달라는 걸 정말 아무것도 안 받고 가르쳐줬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그때 고마웠으니까 이제라도 값 치르려는 거야.”

“지랄. 스승이 돼 갖고 제자한테 내력전수 받았다간 천 년은 욕먹겠다. 게다가 너, 몸에도 썩 이상 없어 보이는데. 내력전수 그건 움직이기도 힘든 늙은 고수나 하는 거 아니냐?”

“나도 나이가 들었어. 사부보다 두 살인가 많잖아?”

허풍개는 조심스레 말했다.

“백삼십까진 멀쩡할 거다. 지금까지 늙지도 않은 몸인데······.”

“안 멀쩡해.”

“그래, 편찮긴 하다더라. 어디가 문제니? 옷 벗어야 할 부위는 안 되겠지만 다리관절 같은 곳이 문제라면 침놔줄 수 있는데.”

하아린은 장난스레 말했다.

“머리에도 침 놔줄 수 있나?”

“머리라니.”

“나, 치매야.”

허풍개의 마음속 평정이 깨졌다.

“의사가 그러든?”

“병원은 안 가봤어. 나가기 싫어서.”

“자가 진단하지 말고, 이년아.”

“치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머리에 먼지가 낀 건 맞아.”

“의사 면허도 없는 년이 스스로 판단하지 말라니까.”

하아린이 말했다.

“어제 뭐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 궁에서 걷다가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전혀 모르겠고. 사부랑 달리 궁에서 축 늘어져만 있으니 뇌를 안 쓰니까 이런가.”

허풍개가 입을 다물었다.

잔뜩 뜸 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정 걱정되면 왕진이라도 불러라.”

하아린이 웃었다.

“기자들 기삿거리 주라고? 치매 고수, 벽에 똥칠하다······ 하기야 상태 더 나빠졌을 때 벽에 똥칠이나 하면 다행이지. 머릿속 기억은 지워져도 무공은 몸이 기억할 텐데, 치매 걸린 절세고수가 뭔 짓을 할 줄 어떻게 알겠어? 정말 누구 다치거나 죽는 꼴 보기 전에 차라리 내공을 딴 사람한테 줘버리는 게 나아. 이왕 줄 거면 사부한테 주는 게 낫고.”

“얘,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비관적으로 볼 게 뭐 있어? 슬슬 신선이 될 때가 됐을 뿐인데.”

허풍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등선할 자신이 있니?”

“만력제처럼 계단 걷듯 하늘 위로 걸어갈 자신은 없고······ 시해(屍解)해야지 뭐.”

시해라면 죽겠다는 소리다.

허풍개는 우울하게 말했다.

“시해 같은 건 없다고 가르친 거 같은데.”

“그랬나? 치매라서 원, 기억이 잘······”

“후한 초에 왕충(王充)이 시해를 제대로 비판했지. 육체가 죽고 넋만 하늘로 떠나는 게 평범한 죽음과 대체 뭐가 다른 거냐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 절대 입에 담지 않던 단어도 지금은 언급하고 있었다.

하아린이 말을 받았다.

“그 양반은 애초에 도교를 다 비판한 작자 아니던가? 사람은 사물에 불과하니 승선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던 사람인데. 만력제가 그게 헛소리인 걸 증명했으니 시해 비판도 헛소리인 셈이고.”

“기억 멀쩡하구만.”

“오랜만에 사부 보니 머리가 맑아져서 그런가 봐.”

“아무튼 너도 만력제처럼 등선을 노려야지.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공덕도 많이 쌓았겠다, 체내 기도 누구보다 정순하니까. 그러니까 포기하지 말고······”

하아린이 고개를 저었다.

“백삼십이나 살아놓고 그런 거창한 거 하겠다고 더 노력하고 싶진 않아.”

“대체 왜?”

“나이를 먹으니까 말이야. 자꾸 옛날 생각이 나. 옛날이 좋았지, 하는 생각들. 심지어 이젠 왜놈들이랑 피 튀기며 싸운 기억이 웬 드라마 속 장면쯤으로 느껴져.”

“드라마 속 장면? 뭔 소리냐.”

“구질구질한 현실보다 훨씬 보기 좋게 미화된 장면 말이야. 내가 주인공인 사극 많은 거 알지?”

“안다.”

“옛날에 싸운 왜놈들이 그런 사극에 출연한 적쯤으로 여겨져. 극 속의 악역. 싸울 때는 미웠어도 다 끝나고 나면 그리 정겨울 수가 없는······”

하아린이 창밖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밖에 싸돌아다니는 것들보다 그 잔인했던 왜놈들이 훨씬 친근하게 여겨진단 말이야, 사부. 이해가 돼?”

“아니. 그때 왜 그리 망언했는지는 알겠다.”

“그 망언했다가 사부가 감옥 갔지. 면회도 안 가고 편지도 쓰지 않아서 미안해.”

“내가 그러지 말랬잖나.”

“그래도.”

“어차피 네 망언에 열 받은 건 핑계였고, 사실 보수 받고 쳐들어간 거니까 정말 미안할 거 없다.”

“그 나이 먹고 헛소리는.”

“헛소리 아니다.”

하아린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히히 웃었다.

“그래, 그렇다 치고. 아무튼 사부 젊어진 거 보니 정말 좋다. 이선희? 그 이름으로 신분 세탁한다면서 얼굴 골격 뒤틀었을 땐 속으로 화가 났는데. 반로환동하고 보니 그때 그 얼굴로 돌아왔네? 아이고, 잘생겼다 우리 사부. 얼굴 뜯어먹을까······.”

그리 말하다 말고 갑자기 천장을 바라보더니 축 늘어졌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있었다. 허풍개가 말했다.

“정 걱정되면 병원이나 가라니까, 기지배야.”

“됐고. 사부 정말 내력전수 안 받을래? 이러다 내력전수하는 법도 까먹어버리면 지금까지 쌓은 내공이 날아가버리는 게 아까운데.”

“백삼십까진 꽤 남았잖니. 그때 가서 내력전수 해주든 말든 해.”

“그때 가면 늦는다니까. 그때까지 살고 싶지도 않고······.”

허풍개는 저런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서서 말했다.

“나 간다.”

그러면서 정말 걷기 시작했더니 등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허풍개가 건물을 나왔을 때 하아린도 따라나왔다.

“선녀님?”

이렇게 궁전 밖으로 나오는 것도 오랜만인 모양이다. 황군 병사들은 모습을 드러낸 그녀를 보고 놀랐다.

한편 이풍이 허풍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풍은 허풍개에게 다가가려다 말고, 하아린를 알아보고서 몸이 굳었다.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 만나 뵈어 영광······”

그리고 하아린이 자신에게 말을 걸자, 이풍은 기겁했다.

“자네가 이풍인가?”

“예? 예. 제가 이풍입니다. 예.”

“이선희 제자라는?”

“예, 비공식적이긴 한데, 뭐······”

하아린이 웃었다.

“사고(師姑)라 불러보렴.”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

월녀가 궁에 도로 들어간 뒤, 경희궁의 수련장에서 이풍이 외쳤다.

“세상에, 허풍개 의사님이 월녀님 스승이란 게 사실이었어! 소문이야 들었는데, 그냥 루머인 줄 알았더니······.”

허풍개는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그런가 보지.”

“안 놀라요?”

“놀랄 게 뭐 있나.”

이풍은 눈을 껌벅거리다 물었다.

“혹시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왜 안 말해줬는데! 우리 사조께서 그분 스승이라니 좆나게 자랑스러운 일 아니야?”

자랑스러운 것은 맞다. 이토록 대단한 위인을 내가 가르쳤다니, 하는 생각에 자신마저 대단한 사람인 양 느끼고는 가끔 우쭐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마다 허풍개는 거울을 보곤 했다. 그리고 늙어버린 깡패 새끼가 보이면 들뜬 가슴은 도로 식어버렸다.

허풍개 의사라고 불리며 잘 나가다가 갑자기 신분을 세탁하여 무적비비탄이라 불리게 된 이유가 뭔가. 다 이유가 있어서 벌인 일이다.

허풍개라 불릴 때도 깡패였긴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깡패 짓을 더 해야 할 테니 아예 딴 사람인 척하기로 맘먹은 것이다.

이 와중에 사실 허풍개로 활동하던 자신도 썩 자랑스러운 건 아니다. 사람들에게 월녀의 스승이라 소개하면 그녀의 명예에 먹칠을 할 것 같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 사실을 극구 숨겼다.

“딴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마라.”

“아니, 왜?”

“스승 유언이야.”

“아니, 아니······”

이풍은 너무나도 억울한 눈치였지만 허풍개는 딴 곳을 쳐다보았다.

황군을 위한 이 경희궁에는 무공 수련장뿐만 아니라 사격 연습장도 마련되어 있었다.

사격 연습장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쪽도 이쪽을 알아보았다.

“어······ 무적무적자 대협?”

국뽕대협을 향해 허풍개는 공손히 예를 표했다.

“저번에 무림맹 대회에선 감사했습니다.”

“예? 뭐가요?”

“고진철이 비난하는 데 거들어주셨지 않습니까.”

“아, 그거야 뭐. 고진철이 고씨 망신시키는 거 꼴 보기 싫어서 그랫지요! 도움됐다니 참 다행입니다!”

새로운 절세고수가 대접해주는 게 기쁜 걸까? 국뽕대협이 호탕하게 껄껄 웃어댔다.

허풍개가 물었다.

“그런데 황군 출신이었습니까.”

“황군 출신이냐니? 아, 연습장에서 나와서 그래요? 그냥 돈 내고 시설 빌려 쓴 거지요 뭐. 나도 오랜만에 총 쏴봐야 하니까······”

무림인이 왜 사격 연습을 하는가, 그리 물어보진 않았다.

무림인들 사이에는 이런 농담이 있다.

문 : 총 든 사람과 무림인 중 어느 쪽이 강한가?

답 : 총 든 무림인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다. 총은 삼척동자가 항우를 쓰러뜨릴 수 있게 하는 무기요, 누가 써도 무서운 무기지만 그것도 다 훈련받은 사람이 써야 더욱 유용한 법 아닌가.

그리고 무림인은 세상 그 어느 군인보다 총을 잘 쓰는 인종이다.

화살을 쳐낼 수도 있는 무림인들의 초인적인 반사신경은, 총격전에서도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쏘는 일련의 행위를, 무림인은 그 놀라운 반사신경 덕에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정확하게 할 수 있다. 마주친 상대방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무림인이 먼저 발사한 총알은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나아가 그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풍이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외국에서 총으로 활약하셔서 그 별호 얻으셨던가요?”

국뽕대협이 웃었다.

“그렇죠! 아시다시피 외국 무림에서는 무림인들이 총을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도 외국 나가서 총 실컷 쐈더니 국뽕이라면서 높여줍디다!”

그 별호가 붙은 배경은 이렇다.

외국 무림인들은 총을 쓴다. 경지를 높이려고 수련을 할 때야 검을 휘두르고 주먹을 내지르지만 실전에서는 총으로 반사신경이 느린 일반 조직원들을 마구 학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기가 만연한 해외일수록 오히려 경지 높은 무림인들의 몸값은 높아지는데, 경지가 높을수록 반사신경이 좋은 경향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한국 무림인들은 그놈의 규제 탓에 총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총기에 능숙하지 않을 한국 무림인들의 몸값은 과하게 책정된 게 아닌가 하는 말이 있었다.

이 와중에 국뽕대협은 해외에 나가 거침없이 총을 쏴대며 활약함으로써 한국 무림인들 또한 그 능력이 총에 능숙한 타국 무림인들 못지  않음을 증명했다. 이로써 국격을 드높였다 하여 영광스러운 별호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의 활약에서,국뽕대협이 죽여버린 숫자는 가히 수백에 달할 것이다.천억짜리 고수의 반사신경이라면 마주친 총잡이들을 모조리 쏴죽일 능력이 있었을 테니까.

무림맹 최고의 히트맨 김지용조차 그 앞에서는 빛이 바래는 셈이다.

그리 생각하니 새삼 섬뜩해졌다.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국뽕대협은 그저 절세고수가 자신과 말을 섞어준다는 게 매우 영광스러운 것 같았다.

즐겁게도 계속 말했다.

“제가 보기엔 이제 한국 무림도 슬슬 총 쓸 준비를 해야 돼요. 요새 마교 기지배가 한국에 총기 들여놓고 있다잖아? 거기 대응하겠다고 보디가드 데리고 다니던데, 헛짓이에요. 총에 맞서려면 이쪽도 총 쏘는 게 최고지요. 이제 한국 무림도 해외 무림처럼 총기 빵야빵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왜, 일제시대 한국 무림도 그래서 살벌했다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랬다. 그래서 당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국뽕대협이 계속 말했다.

“그 시대에 허풍개 의사님은 대충 돌멩이 몇 개로 싹 다 때려잡고 다녔다던데, 지금 생각해도 참 존경스럽지요 정말! 하지만 딴 놈들은 그러지 못하니까 다들 지금부터 미리 사격 연습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안 그러더군요? 무림인이 무공을 써야지 어찌 총을 쓰겠느냐 이딴 소리나 하던데, 순 병신들도 아니고······”

듣다 못한 허풍개가 말했다.

“제 보기에도 총을 쓰면 안 됩니다.”

“어, 왜요?”

“해외야 이미 총기가 만연해서 그렇다 쳐도, 한국에서 무림 깡패들이 총질하면 경찰들이 봐주겠습니까. 이 기회에 죄다 때려잡으려고 하겠지. 그러다 한국 무림이 망하면 어쩝니까.”

“그럼 뭐 어때요? 한국 무림 망하든 말든.”

허풍개가 뻔히 바라보았더니 국뽕대협은 그저 씩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한국 무림이 망하든 말든, 그런 건 고진철처럼 실력 없어서 국내 사업장 잃어버리는 순간 수입이 싹 사라질 쭉정이나 신경 쓰면 되는 거고······ 우리처럼 오라는 곳 많은 비싼 몸값들은 해외 무림 가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허풍개는 어이가 없어서 뭐라 반박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래, 한국 무림이 망하면 뭐 어떤가? 그래서 치안이 좋아질지 나빠질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한국인들에게는 썩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무림 깡패들이 쪽박을 차든 말든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휴대전화가 울렸다. 허풍개와 국뽕대협 둘 모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를 마친 국뽕대협이 말했다.

“일이네요? 무림맹에서 급히 와달랍니다.”

허풍개가 대답했다.

“저도 그렇군요.”

“오, 우리 같은 일 맡았나 본데요? 같이 가요! 차 태워줄게.”

허풍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깡패끼리 친분을 다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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