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녀(越女) - [1]
무림인들은 영약을 섭취한 다음 혈액검사를 받곤 한다.
체내의 기(氣)가 얼마나 증가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혈액검사다. 내공을 통한 도핑을 걸러내기 위해 스포츠계에서 흔히 쓰는 방법인데, 무림에서도 똑같이 따라했다.
이도혁도 영약을 먹은 그날, 관련 시설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지를 받아든 이풍은 기꺼이 감탄사를 흘렸다.
“이야, 내공 엄청 늘었는데? 꼴랑 삼천짜리 먹었다고 이 정도로 늘었으면 거의 유망주급 아닌가?”
이도혁이 머리를 긁었다.
“글쎄요, 전 잘······”
“대단한 거 맞아, 인마! 난 삼천짜리 먹었을 때 아무 변화가 없었거든? 일억짜리랑 사억짜리 먹었을 때도 똑같았고.”
“영약 상당히 드셨나 봐요?”
“나? 꽤 먹었지. 거의 십구억어치는 먹었을걸?”
이도혁은 기겁했다.
“그렇게나?”
이풍이 씩 웃었다.
“내가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똥쟁이야. 심지어 그 십구억어치 영약, 내 돈으로 사 먹은 게 아니라 전부 형님이 사준 거다?”
이건 또 놀라운 일이었다.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그 정도나 사주셨다고요?”
“그래. 그리 처먹어놓고 효험이 없으니까, 그때 내가 돈 아끼려고 싸구려 준 거 아니냐며 개지랄했지 뭐냐? 울며불며, 반말 찍찍 쌍욕 하면서······ 생각해보니 나 진짜 후레자식이었네?”
이도혁은 조금 머뭇거린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은 공식 제자가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응. 비공식 제자야.”
“그 정도로 챙겨줬으면 정말 제자인 거 아닙니까?”
“확실히 무적비비탄 그 양반, 진짜 제자한테 해주는 것보다 더 해줬지! 근데 그리 해줘도 못 받아먹었는데 제자라고 감히 떠들 수가 있나? 이런 하수가 절세고수 제자랍시고 떠벌렸다간 날 인질로 삼아주세요, 하고 부탁하는 꼴이에요.”
이풍이 너무 쾌활하게 말했기에 이도혁은 난감함마저 느꼈다.
“아······.”
“그러면 서로한테 좋지 않으니까 그냥 비공식 제자 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그때는 왜 공식 제자 안 시켜주냐며 좆나게 지랄했네? 형님이 아끼는 물건 막 집어 던지면서 기어이 몇 개 깨부수고······ 나 왜 아직도 사지가 멀쩡한 거냐? 나 같으면 일곱 살 때부터 먹여 살린 새끼가 이랬음 진짜 사지를 분질렀을 건데.”
이쯤 되니 이 화제를 꺼낸 건 실수였다고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풍은 계속 웃으면서 말했지만, 이도혁은 연신 그 눈치를 살피면서 시선을 돌렸다.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이도혁은 몸을 움찔했다.
무적비비탄의 제자도 이 대화가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이도혁의 검사 결과를 살피다 말고 이쪽을 뻔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 무감정하기 그지없는 그 얼굴은 지금도 무표정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나름대로 표정 변화가 있었다.
심경이 복잡해보이는 얼굴, 하기야 무적비비탄의 공식 제자로서는 저 나이 든 사형의 한탄을 들으면서 떨떠름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도혁의 말에 이풍이 웃었다.
“왜 사과해? 이미 오래 전 일이니까 신경 안 써! 아무튼 도혁이, 너 이 새끼! 이대로 영약 몇 개 더 주워 먹고 이번이랑 비슷한 결과 나오면 진짜 무림 유망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럼 진짜 여러 문파에서 스카우터 보내서는 계약금 왕창 주고 모셔가는 거야.
내공 늘어나는 게 진짜 타고난 재질이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나같은 똥쟁이는 이십억 가까이 먹여도 똥만 싸지만 너처럼 재능 있는 애들은······”
허풍개는 둘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제자······.
사실 허풍개에게는 이풍 말고도 제자가 하나 또 있었다. 이풍과 마찬가지로 공식 제자는 아니었다.
이풍의 경우에는 너무나도 하찮아서 제자라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다가는 스승과 제자 모두에게 좋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첫 제자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는데, 스승인 이쪽이 너무 하찮았기에 감히 그녀의 스승이라 밝힐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제자임을 밝히고 싶어했지만 허풍개가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 스승인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불이익이 되리라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를 만난 지도 오래되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거든 TV라도 틀면 되었다.
월녀는 한국의 당당한 위인 아닌가. 그녀는 언제나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무림 깡패답게 음지에서 숨어지내는 자신과 달리······.
그날 오후였다.
허풍개가 침술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중, 갑작스럽게 사무소에서 불렀다.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얼른 가보니 이풍이 말했다.
“형님? 황군(皇軍)에서 연락왔어요.”
허풍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황군에서?”
“예. 월녀님이 뵙자는데요? 어떻게 대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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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도 유명한 고수는 꽤 있었지만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수준의 고수는 많지 않다.
월녀(越女)는 그 몇 안 되는 고수 중의 하나다.
그녀의 본명은 하아린이다. 구한말 시골 출생이다.
그 시대 농민들이 으레 그렇듯, 그녀는 왕가에 별다른 이유 없는 충성심을 지닌 소녀였다. 시골까지 전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매우 분하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무공을 익혀 국모의 복수를 이루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가르침을 청하기 위해, 진인(眞人)이 살기로 유명한 주안산에 올랐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면 다행이요, 대부분은 사기꾼을 만나 험한 꼴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로 원하던 진인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진인이 정말로 그녀에게 바라던 것을 가르쳐주었다는 점이었다. 진인은 그녀에게 모산파 검술과 도가 수련법을 전수해주었는데, 더욱 놀랍게도 정말 아무것도 받지 않고 가르침을 거저 베풀었다고 한다.
그녀는 수련 끝에 성취를 인정받아 일찍 하산했다. 지금까지 배운 무공을 근거로, 궁궐에 찾아가 왕실 호위무사가 되기를 소망했다.
고종 황제는 그녀를 기꺼이 거두었다. 아마도 어린 여자가 호위로 쓸 만하리라 여긴 게 아니라 그녀의 미모를 어여삐 여긴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상당한 고수였고, 그 나이를 고려하면 정말이지 놀라운 성취였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고종 황제는 그녀의 가능성을 깨달은 바, 월녀를 정말 제대로 된 호위무사로 삼기로 결심했다.
내탕금을 퍼부어가며 온갖 영험하다는 단약을 사들여서는 그녀에게 복용시켰다.
망국의 황실도 황실인 법이다. 내탕금을 죄다 털어 사들인 영약은 당시 국가 예산의 몇 배에 달하는 값어치였다.
가뜩이나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그 지원에 힘입어 불과 몇 년 만에 절세의 경지에 이르렀다.
월녀는 이후로도 고종 황제의 호위무사로서 충정을 다했다. 고종 황제의 망명을 도왔으며, 숱한 암살 시도를 막아내었다.
이후로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겐요샤를 척결하여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았다.
당시 그녀가 벌인 일본 우익단체들과의 싸움은 지금도 한일 양국에 회자되는 전설이다. 관련 영화와 드라마는 예나 지금이나 수두룩하게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토록 유명한 위인인 그녀는,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에 평생 헌신해왔음에도 광복 이후 썩 즐거워하지 않았다.
왕가에 충성하던 그녀가 보기에 외양만 대충 복구된 황실은 조금도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되었다.
이후로 그녀는 황군의 큰 어른이 되어 황실 시위대를 육성하는 데만 전념할 뿐, 대외활동은 하지 않은 채 궁에만 머물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국인들의 관심을 받기 충분한 인물이었다. 언제나 그녀에게는 기자며 정치인들이 달라붙었다.
육 년 전에는 한 기자가 별 생각없이 물었다.
‘요새 즐거우시냐?’
그리고 월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차라리 일제시대가 좋았다.”
이 대답은 그녀가 일제 강점기를 미화한다는 뉘앙스로 기사화되었다.
심지어 9시 뉴스에도 방송되었는데, 무림에서 존경하는 큰 어른이 망신당한 셈이었다.
온 무림이 분노하여 방송국에 항의 편지를 보냈다.
이때 분노한 무림인 중에는 무적비비탄도 있었다. 일찍이 허풍개 의사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그녀를 구출한 바 있었으니, 허풍개 의사의 제자 무적비비탄은 인연 있는 그녀가 욕보게 된 이 사건을 보아넘기려 하지 않았다.
무림 고수 방송국 습격 사건의 이유로 알려진 배경이다.
*******
황군에서 손님을 맞이하라고 보낸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기를 보아하니 고수였다.
황군 고수답게 권총을 차고 있었다. 스스로를 홍나연이라 소개한 그녀는 차 문을 직접 열어주며 말했다.
“안에 드시지요.”
이풍은 차에 탑승한 뒤 긴장하여 땀을 흘렸다.
황군 고수가 이렇게 대우해주다니. 황군의 큰 어른을 위해 방송국까지 습격해준 예우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방송국 테러범의 제자를 이렇게 모시는 걸 들켰다가는 큰일날 텐데.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이풍은 안절부절 못했지만, 허풍개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좌석에 앉아서는 질문을 던졌다.
“월녀님, 요샌 괜찮습니까?”
홍나연은 운전하며 대답했다.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은데······ 아니네요. 편찮으세요.”
“편찮다니? 그녀가?”
“그럴 만도 하죠. 백이십 년을 넘게 살아오셨잖아요?”
허풍개는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렇죠. 그녀도······.”
차량은 경희궁에서 멈췄다. 홍나연이 안내했다.
“이쪽으로.”
경희궁은 현재 황족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사실, 제대로 된 궁궐 같지도 않았다. 궁궐터를 사들여서 커다란 한옥 몇 개를 다시 지어놓고는 경희궁이라 부를 뿐이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건물에 그녀를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허풍개는 그 건물에 들어섰다. 조명도 켜지 않아 어두운 저 너머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한때 황제가 눈독을 들였을 만치 아름다운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의 젊을 적 아름다움은 백이십 세가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얼굴에서 풍기는 기운만은 변했다.
그 어느 여자보다 생기 넘치던 그녀의 표정은 거기에 없었다.
더없이 나른한 얼굴, 거의 피곤해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월녀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사부.”
허풍개는 자신의 첫 제자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제자 같지 않은 제자였다. 스승인 자신보다 몇 살이나마 나이가 많다는 점, 심지어 훨씬 고수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래도 일단 스승이긴 한지라, 허풍개는 편하게 말을 놓았다.
“왜 불렀니.”
“줄 거 있어서. 영약 욕심은 여전해요?”
“그렇지, 왜. 영약 선물해주려는 거냐.”
“영약은 못 주지. 그 비싼 걸 내가 뭔 돈이 있다고 줘. 그런데 따로 줄 건 있어요.”
“어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말에 허풍개는 눈을 부릅떴다.
“사부, 내력전수 안 받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