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26화 (26/103)
  • 자객 김지용 - [7]

    달리는 차량에서 김지용은 무림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차량이 멈춘 곳에서 김지용은 죽게 될 것이다.

    끔찍한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마인드컨트롤을 시작했다. 그나마 잔뜩 두들겨 맞거나 온갖 굴욕을 당하는 일은 없이 곱게 갈 수 있는 건 다행이라고.

    마지막에나마 자진하여 몸을 맡긴 것이 좋게 보인 걸까? 양옆에 앉은 무림인들은 친근한 척 말을 걸어댔다.

    “너랑 좆도 상관없는 무적무적자 그 양반, 너 살린다고 아등바등하는 거 보니 맘이 좀 변하든?”

    “예.”

    “그래, 잘 생각했다.”

    옆좌석의 무림인은 곧 죽을 김지용에게 인생의 훈수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김지용은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걸 참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제 여자친구는 살아있는지······”

    남자는 누군가와 문자를 주고받더니 대답했다.

    “그렇다는데?”

    김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웃으려다 말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인지 체념의 한숨인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지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차가 멈췄다. .

    눈이 가려진 김지용은 저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제 몇 명만 남고 나머진 다 돌아가. 사람 많아봤자 CCTV에 찍히기나······”

    칼집에서 칼 뽑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 들린 것은 강남제일검의 목소리였다.

    “이러긴 나도 미안하니까, 편하게 죽여주지.”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날, 이도혁은 하루를 꼬박 쉰 다음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그리고······ 사숙님도 안녕.”

    이도혁을 본 이풍이 반색했다.

    “도혁이, 그저께 밤새 운전하느라 수고했다! 성철이 안 온 김에 분배나 하자. 우리 이번 일로 육억오천을 벌었거든?”

    “어, 김지용 그 아저씨가 준 돈은 육억 아니었습니까?”

    “무림맹에서 오천 줬어! 사례비라더라.”

    자기네를 상대로 개겼는데 왜 사례비를 주는지 이도혁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런가보다 해야 했다.

    이풍이 계속 말했다.

    “여기서 육억은 당연히 좆빠지게 싸우신 절세고수님 몫이지. 이건 불만 없지? 그러니까 우리 몫은 여기서 오천이야. 이걸 둘이서 갈라 먹어야 하는데······”

    이도혁은 눈을 껌벅였다.

    “운전만 했는데 그 정도로 준다고요?”

    “미친놈이 닛뽄도 들고 차에 들이박으려는데 손 안 떨고 운전했으면 그 정도 받아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그래서······ 네 몫 어떻게 줄까?”

    “예?”

    “돈으로 줄까? 아니면 영약으로 줘? 영약으로 받겠다면 통크게 삼천짜리 줄 수 있다. 돈으로 받겠다면야 그 정도는 못 주고. 역시 돈이 좋나?”

    이도혁은 웬일인지 사무소에 나와있는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 본 저 협객의 활약을 떠올렸다. 자신도 그리되기를 원했다.

    “아뇨, 영약으로 받겠습니다.”

    이풍이 웃었다.

    “좋아, 그럼······ 영약은 오랜만에 먹나?”

    “중1 이후로는 처음 먹겠네요.”

    “그럼 약효 더 잘 받겠네?”

    이풍이 씩 웃더니 웬 목함 하나를 가져왔다.

    이도혁은 비장한 얼굴로 뚜껑을 열어서는 그 안에 든 단약을 삼켰다. 그리고 영약을 소화시키기 위해 따로 마련된 방에 들어갔다.

    한편 이풍은 허풍개에게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덕분에 큰 돈 벌었습니다! 이야, 박 회장이랑 삼 대 일로 붙으면서 따까리 둘을 발라버린 젊은 절세고수, 무적무적자! 무림맹의 모두가 신진고수의 무용에 경탄하나니!”

    허풍개는 이풍을 노려보았다.

    “칼잽이들이 칼 내려놓고 싸워줬는데 뭐가 자랑스럽나. 애초에 화산에서 온 그 영감이 칼 들었으면 옆구리 내줬을 때 바로 끝장난 거야.”

    “그래도! 사람들 보기엔 다를걸요. 이번 일 무림맹에 소문 쫙 퍼졌습니다.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말이요.”

    “비밀 임무였을 텐데 그걸 딴 놈들이 어떻게 알아.”

    “다들 임무 끝나고 본래 조직에 돌아가서 본 것들 나불거렸나 보죠 뭐. 이거 보면 무림맹에 깔린 스파이들이 안 들키는 게 당연하다니까? 다들 그리 입이 싸니 원······.

    아무튼 이번 일 맡을 땐 속으로 엄청 투덜거렸는데, 막상 하고 보니 상당히 수지가 맞습니다그려. 절세고수랑 그 따까리들 상대로 선전해서 형님 평판도 확 뛰었겠다, 무림맹에선 이번 일 트집 잡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고. 돈도 육억 넘게 벌었고요······”

    “떡값은? 위원들한테 돈 안 돌리나?”

    “주려고 해도 거절합디다. 그래서 좀 불안해지긴 하네요. 대체 왜 안 받지? 설마 진짜 우리 조지려고? 이 시국에 그러진 못할 건데. 애초에 그놈들은 떡값은 떡값대로 받고 뒤통수에 칼 꽂을 놈들이고······”

    허풍개가 말했다.

    “뇌물 안 받은 건 그냥 쫄려서 그래.”

    “쫄려서요? 왜요?”

    “그 자객 새끼 튀었어.”

    “튀어요? 어떻게?”

    “방법은 몰라도 지금쯤 박 회장이 갖고 있을걸. 무림맹에선 그 사실 숨기는 모양이고.”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놈 무림 깡패들한테 가 있을 때 있잖나. 내가 그거 보고 가슴이 철렁해서 그 양반 바라보니까······”

    “박 회장이 왜요?”

    “그놈들이 자객 데리고 튀는 걸 그냥 보고만 있더라고. 안 쫓아가더라.”

    “재벌 총수씩이나 되는 양반이 길에서 깡패들이랑 드잡이질하긴 좀 뭐했던 거 아닙니까?”

    “그리 몸 사릴 양반이 아냐. 직접 출동까지 했는데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게 말이 되나? 확실하게 빼돌릴 방법이 있으니까 얌전히 돌아간 거지.”

    이풍은 뭐라 반박하려다 그만두었다. 무림맹에 스파이가 들끓는다는 건 유명한 사실 아닌가.

    무림맹에 외국계 조직의 첩자는 당연히 있는 것이요, 경찰이 심어둔 스파이들은 존재를 알면서도 내버려 두는 마당이다. 그 와중에 박 회장의 스파이가 여럿이라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그리고 너, 이번처럼 그딴 짓 또 하면 안 된다.”

    허풍개의 말에 이풍이 물었다.

    “그딴 짓이요? 뭐요?”

    “김지용이, 무림 깡패들한테 가버리는 거 보고서도 모른 척했잖아.”

    “그거 진짜 몰랐다니까. 내가 형님 싸우는 거 구경하느라 바쁜데 그놈 뭐 하는지 어떻게 신경 씁니까? 뭔 수를 쓴 건지 차 문 열리는 소리도 안 들리더라.”

    허풍개는 그 변명을 믿지 않았다.

    이풍은 평소 허풍개의 협행에 잘 협조하는 편이었지만 이득 없이 그러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저 제 형님 겸 양아버지가 하는 일이니까 순순히 따를 뿐이다.

    그러니까 이풍이라면 자객을 보호하겠답시고 무림맹과 척을 지게 되어 손해가 생길 것 같았던 그때, 달려있던 혹이 알아서 떨어져 나간 그 상황을 내심 기뻐했으리라.

    허풍개는 그날 죽음을 선택한 자객에 대해 떠올렸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기에 그랬는지 우울한 마음으로 생각해보았다.

    *******

    자객 김지용은 자신이 죽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살아남은 상황, 그리고 웬 기업 회장의 앞에 불려온 이 상황이 그저 혼란스러웠다.

    옆에는 강남제일검이 서 있었다. 그날 자신의 졸개였던 무림인 하나를 죽여버리더니, 김지용을 여기에 데려온 작자였다.

    강남제일검이 박 회장에게 허리를 굽혔다.

    박 회장은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물었다.

    “그래, 어디 카메라에 찍히거나 그러진 않았고?”

    “예, 아마.”

    “아마가 뭐야, 아마가. 똑 부러지게 대답 못하나?”

    “죄송합니다, 회장님. 안 찍혔습니다.”

    강남제일검이 고개를 숙인 가운데, 박 회장은 불만스러운 듯 그 검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너, 화산 검술 익혔댔나?”

    “예, 다만 화산파가 의병 활동할 때 개발한 검술을 주로 익혔습니다. 화산 매화검법(梅花劍法)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그럼 안 배운 거 배울 수 있어서 더 좋네. 이제부턴 너도 내 무공 사부다.”

    놀라운 제안이었다. 대기업 회장의 무공 사부라면 누구나 탐내는 직책 아닌가.

    게다가 무공 쪽에 돈을 아끼지 않기로 유명한 박 회장의 무공 사부라면, 그저 하루하루 출근하기만 해도 막대한 돈과 영약이 주어질 것이다.

    “회장님껜 이미 화산 출신 사범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 영감 폐관수련할 거래.”

    “폐관수련이라면······”

    “사람 만나기 싫으니 방문 걸어 잠그겠다 이거지. 쓰러지고도 건강엔 아무 이상 없다는데, 그냥 사람들 앞에서 쓰러진 게 망신스러웠나 봐. 하여간 무적비비탄 그 친구, 뭔 이상한 재주를 익혀 가지고······”

    강남제일검은 지금 무적비비탄과 무적무적자를 혼동하는 게 아니냐고 감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날 겪은 일을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방송국에서 겪은 무기력함은 조금도 씻어낼 수 없었다.

    자신보다도 한참 어려 보이는 무적비비탄의 제자는, 천억 몸값의 강남제일검을 상대로 전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으리란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 다음 벌어진 절세고수 간의 싸움을 보았지 않은가. 그들은 다른 무림인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살고 있음을 보았다.

    이대로 수련만 죽어라 해서는 부족하단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완전히 소속까지 바꾸었다. 단순히 박 회장의 스파이 노릇을 하는 걸 넘어 그 휘하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그럼 들어가.”

    “예, 회장님. 좋은 기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남제일검이 물러갔다.

    박 회장과 둘이서만 남겨진 김지용은 몸을 떨었다.

    “그래서 우리 인간 백정님, 누구누구 죽이셨나?”

    박 회장의 물음에 김지용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무림맹의 지시를 받고 죽인 스물아홉 명의 신상명세를 전부, 세세하게 밝혔다.

    다 듣고 난 박 회장은 실망한 눈치였다.

    “서른 가까이 죽였다더니, 의외로 별 대단한 놈은 안 죽였군? 이래서야 원, 신문 1면에 실리기나 할까 싶은 수준인데······.”

    무슨 소리인지 김지용은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박 회장은 무림을 혐오했고, 해체하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 김지용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 범죄행각을 언론에 밝혀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기 위해서.

    김지용이 말했다.

    “저, 이미 말씀드렸지만, 그 형사도 제가 죽였는데 말입니다. 수사 중에 죽어서 뉴스에도 나온 그 양반이요.”

    그리고 박 회장이 한숨 쉬었다.

    “국민은 말이야, 바빠. 워낙 바빠서 모범 형사 하나 죽은 건 이미 다 잊었어.”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야, 국민들은 형사 하나보단 무림을 더 좋아해.”

    “예?”

    “형사 하나 목숨보단 무협 영화, 무협 만화, 무협 게임을 더 사랑한다고. 너, 무림맹에서 일했댔지. 한국 무림맹에서 어느 범죄조직을 본받으려 했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야쿠자야.”

    박 회장이 말했다.

    “세상에 그만큼 성공한 범죄조직이 드물어. 그거 아나? 일본 정부에서 맘만 먹으면 아쿠자를 척결하긴 참 쉬웠을 거라네.

    야쿠자들은 몸에 문신을 새기지. 몇 년도에 누굴 죽였다, 누굴 칼로 찔렀다, 이런 범죄행각을 죄다 몸에 기록하는 거야. 그러니까 문신 새긴 놈만 찾아내도 누가 야쿠자 조직원인지 다 잡아낼 수 있는 셈인데······ 안 그러지.

    폭처법을 만들어다 야쿠자들 활동 단속은 하는데, 정작 그놈들 바로 잡아가둘 야쿠자 단속법은 안 만들어. 왜 그럴까?”

    “저는 잘······.”

    “일본 국민들이 야쿠자를 좋아해서 그래. 일본 땅에서 그 범죄자 새끼들을 쫓아내라고 시위 따윌 하지 않아서.

    왜, 일본에선 툭하면 만화나 영화로 야쿠자들 미화하고 그러잖나? 야쿠자들이 음지에서 일본을 수호하니 어쩌니.

    그놈들이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친구들이라 여겨지도록 언론도 도와주지. 경찰이 효과적으로 아쿠자 조직원들을 체포했네, 젊은이들이 야쿠자 들어가길 싫어해서 야쿠자들 세력이 날이 갈수록 줄어드네 하면서 엄살떨도록 도와줘.

    그놈들이 벌어들이는 검은돈은 여전히 천문학적인데······ 쪽바리들은 야쿠자들이 지들 친구라도 되는 줄 알아.”

    다음 순간, 김지용은 이를 악물었다.

    박 회장의 눈빛을 보았다. 그 안광과 목소리에서 뿜어져나오는 살기를 느꼈다.

    “그걸 한국 무림 깡패들도 훌륭하게 본받고 있어. 아주 롤모델이야. 무협 영화를 후원하고, 누군가가 무림을 안 좋게 묘사하면 깡패들 보내서 손봐주고. 민간인은 건드리지 않는 척하면서 이미지 관리하고.

    그놈들 선조는 일제 강점기에 왜놈들이랑 싸우기도 했는데, 제 선조들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는 셈이야. 그래서······ 쪽바리들이나 본받는 이 좆같은 새끼들을 한국 땅에서 꺼지게 하려면 어째야겠는가?”

    김지용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국민들이 놈들을 싫어하게 해야겠군요······”

    “그래, 무림 깡패들의 실체가 어떤지 몸에 와닿게 해줘야 해. 상부가 뭐라 하든 좆까고 열심히 수사하던 모범적인 형사가 살해당했다? 제 일 아니니까 사람들은 좆도 신경 쓰지 않아. 그러니까 자네 하나 검찰에 출두시키는 걸로는 부족해.”

    박 회장이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족한 만큼 벌충할 수 있게, 도와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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