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25화 (25/103)
  • 자객 김지용 - [6]

    아버지가 죽었다. 폐병으로 죽은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당시 증상도 잘 기억나지 않거니와 진료 한번 받아보지 못했다.

    사흘 뒤에 어머니도 죽었는데, 목매달아 죽었다. 애새끼 허풍개와 갓난아기를 내버려 두고 저 홀로 떠나버렸다. 남편이 죽었으니 따라가겠다는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라 돈 벌어올 사람이 없어졌으니 막막해져 죽은 것 같았다.

    혼자 남겨진 허풍개는 동생에게 젖 한번 물려주려고 애썼지만 동정심을 유발하는 수완이 영 별로였다.

    동생을 내밀며 젖 한번 주십쇼, 하는 처량한 꼴이 사람들이 보기엔 동생 팔아 구걸하려는 야비한 거지새끼로만 보인 모양이다. 이틀 동안 젖동냥을 해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동생도 죽었다.

    이즈음에 나라가 왜놈들에게 삼켜질 위기라며 사람들이 떠들어댔지만 허풍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피붙이들이 죽었는데 나라가 망하건 말건 그게 중요한 일인가.

    훔치고, 온갖 잔심부름을 하며 떠돌아다니다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나물 캐러 산에 들어갔다가 웬 젊은 여자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가 죽어가는 소리로 물을 달라길래 물을 주었다. 먹을 걸 달라길래 떡도 하나 주었다.

    좋은 의도로 그러지는 않았다. 매일 두세 번씩 수음할 만큼 성욕이 왕성한 나이였다. 살려준 보답으로 한번 대주지 않을까, 이따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기운을 차린 그녀가 바란 것을 내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도교와 무공을 가르쳐주겠노라고 했다.

    그녀는 명(明)의 모산파에서 왔다고 했다. 조선 출신으로 무공을 배우겠다며 명국에 갔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한 걸 보고 돌아왔더니 산에서 굴러떨어져 이 꼴이 되었다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난 다리가 부러져서 이젠 보법도 제대로 못 밟게 되었으니 네가 나 대신 민족을 위해 힘써달라.

    허풍개는 도교고 민족이고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무공에는 관심이 있었다. 열심히 무공을 배우면서 도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 와중에 젊은 여자와 어린 남자 하나가 서로 몸을 맞대가며 수련을 하다 보니 절로 정이 들었다.

    그녀가 방중술을 수련시켜주겠다 꼬드기고, 허풍개는 속아 넘어가는 척하면서 정이 깊어졌다.

    전통적인 방중술에서는 접하되 흘리지 말라고 하여 사정을 금하는데, 그 가르침은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그녀가 임신했다. 한동안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혼인하기로 약조했다.

    어찌어찌 금반지까지 구해 바치면서 백년해로를 기원했지만 백 년은커녕 십 년도 가지 못했다.

    아이를 낳은 그녀가 죽었다. 마을에서 불러온 산파가 손을 씻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허망함에 잠겨있을 여유가 없었다.

    하나 남은 내 새끼. 뭘 해주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동생이 생각나 겁에 질렸다.

    젖을 먹이랴 분유를 먹이랴 분투했지만, 반년을 넘기지 못했다. 뭘 먹여도 자꾸 토하기만 했다.

    용하다는 양의사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결국엔 죽었다.

    스승이자 아내인 그녀의 무덤 옆에 조그만 무덤을 파자니, 당시에 경황이 없어 미처 느끼지 못한 그녀 몫의 슬픔까지 함께 밀려왔다.

    끔찍한 우울감 속에서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 식욕도 없겠다, 그대로 굶어 죽을 작정이었다.

    굶주린 가운데 종일 생각하는 것이라곤 어떻게 죽어야 빠르고 편히 죽을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요, 그다음에 하는 생각은 그리 죽은 뒤의 일 뿐이었다.

    그녀가 살아있을 적에 가르치길, 제대로 도를 닦은 도사는 시해(屍解)하여 사후에 신선이 된다고 했던가?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모산파 도사였던 그녀는 숨이 꺼진 후 괄약근에 힘이 풀려 지저분한 대변을 흘렸다. 그것은 아무리 봐도 등선(登仙)이 아니었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마지막을 보며 느꼈건대, 죽음이란 어찌 그리 추한 것인가?

    이런 생각 또한 했다. 나 역시 죽으면 그리될 것인가? 그녀와 달리 이쪽은 묻어줄 사람조차 없으니 훨씬 추할지도 모른다.

    종일 죽음에 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아직 닥쳐오지도 않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생겨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 못해 애써 잊으려 해도 머리를 도로 채워버리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죽음이 두려워 미음을 쑤어 먹었다. 입에서 하얀 물을 줄줄 흘리면서, 자기 자신을 추잡하고 역겨운 놈이라 생각했다.

    어떻게든 덜 역겨워질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남겨준 것에는 온갖 도가 서적 및 무공 서적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거들떠도 볼 생각도 없던 동자공이 있었다. 그것을 익혔다.

    열일곱 살의 일이었다.

    그 시절에 생겨난 죽음에 대한 공포증은 백이십 살이 된 지금도 전혀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를 먹어 필연적인 죽음이 다가올수록 그에 대한 공포는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쯤 되니 도가적 가르침이 아닌 이유에서도 죽음이란 단어마저 꺼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허풍개는 매사에 죽음을 의식하고 두려워했다.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죽음 또한 크게 의식했다.

    허풍개가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려 하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막으려 하는 것은 단순히 공과를 관리하기 위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죽음 그 자체를 언제나 신경 쓰는 나머지, 다른 누군가의 죽음에도 지나치게 몰입하는 이유가 더욱 강할 것이었다.

    *******

    허풍개가 자세를 취했다. 한 손은 주머니에 넣어 그 안에 든 BB탄을 쥐면서, 다른 손으로는 태극권을 펼칠 준비를 했다.

    이때 겉으로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긴장을 억누르기 위해 애썼다.

    박 회장······.

    눈앞의 절세고수와는 이전에도 여러 번 싸워보았다. 두 번은 어찌어찌 비겼지만 나머지 다섯 번은 모두 졌다.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셈이다.

    같은 절세고수가 되었다 한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저놈이 절세고수가 된 것은 마흔쯤이던가? 지금은 일흔이니 절세고수가 된 후로도 삼십 년은 수련을 쌓았다.

    게다가 그 뱃속에 들어간 영약은 또 어떤가. 한낱 잘나가는 깡패에 불과한 허풍개가 먹어치운 그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같은 절세고수일지라도 격이 다른 셈이다.

    과연 자신을 보는 박 회장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박 회장이 작게 물었다.

    “당신 나한테 약점 잡혀있지 않나? 이렇게 대들어도 돼?”

    허풍개는 그 말에 동요했지만 기색을 숨겼다.

    “그래서 그 약점 지금 쓸 거요?”

    “아니.”

    “그럼······”

    박 회장이 웃었다.

    “실력 얼마나 늘었나 한번 보자.”

    박 회장이 자세를 취했다. 박 회장은 화산파 매화검수 출신 사부에게서 검술을 배우고 익혔다.

    그러나 지금 칼은 뽑지 않았다. 소림 금강권(金剛拳)의 자세를 취하는 걸 보니 주먹으로만 싸울 모양이다.

    그걸 보고 허풍개는 내심 안심했다. 전력으로 싸우진 않으려는 모양이다. 그럼 이쪽도 전력으로 싸울 필요는 없겠군.

    이 또한 다행한 일이다. 감히 기업 회장을 다치게라도 했다간 그 후환이 두려운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됐으니.

    이 모든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칼 안 뽑을 거면 나도 금속 말고 플라스틱 쓰지요, BB탄.”

    “뭐, 그러든가.”

    박 회장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는 맨손 격투에도 능한 것이, 소림 나한승 출신의 사부와 무당 출신 사부에게서 각각 금강권과 삼봉 태극권을 전수받았다. 허풍개는 그마저 이기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수에도 밀리는 상황 아닌가.

    박 회장이 자신의 무공 사부들에게 지시했다.

    “두 분은 나 도와서 같이 싸우고, 두 분은 저 깡패 새끼들 지켜보면서 헛짓못하게 막아줘요. 그럼······”

    소림 출신 사부와 무당 출신 사부가 무림인들을 감시하러 거리를 벌렸다. 화산 출신 사부와 남궁세가 출신 사부는 박 회장을 돕기 위해 그 옆에 섰다.

    싸움이 시작된 그 순간, 허풍개는 수부터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남궁세가 출신 사부에게 말했다.

    “머리 막아.”

    박 회장의 무공 사부들은 무적비비탄과 얼굴을 꽤나 본 사이였다. 그 말 한마디에 뭘 하려는지 눈바로 치챘다.

    “어, 나부터?”

    허풍개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수십 개 BB탄이 그 다섯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있었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튕긴 그 순간, 그 장면을 저 멀리서 무림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만천화우(滿天花雨)······”

    산탄처럼 쏘아진 수십 개 BB탄을 상대로 남궁의 검객은 그 무공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넓게 발사된 저 모든 탄환을 피할 수는 없거니와 죄다 쳐낼 수도 없지 않은가.

    가까스로 얼굴만 방어했고, 그 몸에 수십 개 BB탄이 가 닿았다.

    남궁세가 사부의 몸이 굳었다.

    기습에 가까운 선공으로 한 명 줄였지만,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허풍개는 또 한 번 같은 짓을 하고자 했다. 빠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꺼냈다.

    그리고 BB탄들을 튕긴 그때, 박 회장이 고함질렀다.

    “‘어―쭈―!’”

    멀리서 지켜보던 무림인들이 소스라치며 귀를 막았다. 예민한 몇몇은 그대로 몸에서 힘이 풀려 무릎 꿇기까지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림 사자후(獅子吼)였다. 인간 성대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거대한 소리가 울리더니, BB탄 안에 실린 기(氣)를 모조리 흩어버렸다.

    기가 실리지 않은 플라스틱 BB탄은 아무리 빠르게 발사된들 그저 장난감 플라스틱에 불과하다.

    만천화우를 온몸으로 맞고도 끄떡없이, 박 회장이 달려들었다. 달려오던 힘을 실어 손바닥을 뻗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림 항마장(降魔掌)이 매서웠다.

    허풍개는 다가오는 팔을 잡아당기면서 마주 팔을 뻗었다. 상대방의 가슴을 강타하려던 허풍개의 주먹과 마주뻗은 박 회장의 왼손이 맞닿았다.

    주먹이었던 둘의 손은 서로 닿은 순간 서로를 옭아매려는 금나수(擒拏手)가 되었다.

    그리고 서로 얽혀가며 복잡한 교환을 펼쳤는데, 이것만으로도 허풍개의 손해였다.

    허풍개의 양손이 묶인 동안 또 한 명의 적은 놀고 있지 않았다. 그 옆으로 화산 출신 사부가 달라붙었다. 그대로 허풍개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로써 허풍개가 패배한 줄 알았지만, 잠시 후 타격 순간 그 허리가 절묘하게 움직이며 충격을 흘리는 신기(神技)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정작 허풍개는 타격을 흘리고도 통증이 느껴지자 이를 악물어야 했지만 어쨌건.

    또 한 번 공격해오려는 화산 출신 사부를 향해 허풍개가 낚싯줄을 뻗었다.

    그는 무림맹의 정보와 새로운 절세고수의 재주를 전해듣지 못한 모양이다. 멋모르고 낚싯줄을 붙잡은 화산 출신 사부는 그대로 감전되었다. 몸을 떨고는 쓰러졌다.

    그리고 박 회장이 동시에 두 주먹을 뻗어왔다.

    허풍개는 허리를 뒤로 굽혀 피하면서 그 허릿심으로 몸 전체를 튕겼다. 뒤로 펄쩍 튀면서 거리를 벌렸다.

    박 회장은 급하게 공격해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한가로이, 전력을 보충하려 할 뿐이었다.

    박 회장은 망을 보고 있던 무공 사부들에게 말했다.

    “두 분 쓰러졌으니 두 분 더 붙어요.”

    허풍개는 입술을 깨물며, 무공 사부 둘이 다가오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미 만천화우를 하니 번개를 쏘니 하면서 내공도 잔뜩 소모했겠다, 패배는 확실했다.

    이제 모두의 앞에서 패배할 일만 남았다.

    이대로 자객 김지용은 저 박 회장이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은 분노할 것이다.

    지금 자신은 그저 필사적으로 분투해서, 무림맹에게 최선을 다했음을 어필하여 그 보복을 줄이려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패배를 각오하던 허풍개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들을 감시하던 무공 사부들이 사라진 지금, 무림맹의 무리는 무얼 하는가?

    그쪽에 흘긋 시선을 보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무림맹의 무리가 뭔가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쪽에서 누군가가 움직였다.

    일류 자객답게, 김지용의 움직임에는 그 어떤 발소리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김지용의 움직임을 시선을 보낸 지금에야 눈치챌 수 있었다.

    김지용은 무림맹의 무림인들 사이에 서있었다.

    저 무림인들은 박 회장이 두려워 감히 다가올 생각을 하지 못한 마당이다. 그러니 잡혀간 게 아니라 그 스스로 다가갔을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무림인들 사이에서, 김지용은 허풍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풍개는 김지용의 입 모양을 보았다.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김지용은 깊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더니, 무림맹의 차량 중 한 대에 탑승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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