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김지용 - [5]
「실패했다고?」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
「당연히 죄송해야지. 칼만 잘 휘두르는 깡패 새끼가 그것도 제대로 못해서 기업 회장을 움직이게 해?」
*******
김지용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쓰고 있었다.
방금 본 상황을 되새기고는 전율했다.
무적비비탄이 무림맹이 하는 일을 여러 번 방해하고도 어찌 무사했는가 했더니, 저런 무공이라면 확실히 그럴 수 있으리라. 무림의 단체조차 저 무적의 고수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김지용은 진작에 꺼두었던 휴대전화를 다시 켰다.
혹시 이번 승리로 협상의 여지가 생기지 않았을까. 숨어지내면 봐준다는 제안을 하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쌓여있는 문자 메시지들을 읽어내렸지만, 그 표정은 갈수록 구겨질 뿐이었다.
문자에 적힌 내용이라곤 온통 협박뿐이었다. 그것도 여자친구에 대한 협박.
‘그리고······ 이건 또 뭐야.’
여자친구에게서 문자 메시지 하나가 와 있었다.
무림인들에게 잡혀있을 그녀가 어떻게?
뭐 뻔한 일이다. 무림인들이 보내라고 시켰을 것이다. 살려달라느니, 구하러 와달라느니 애원하여 그 죄책감을 자극할 내용을 보내도록 윽박질렀을 것이다.
휴대전화를 닫아도 맘은 편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지워내는 데 성공했던 그녀의 존재가 머릿속을 도로 채우기 시작했다. 하기야 칠 년이나 같이 지낸 여자의 존재가 그리 쉽게 잊힐 리는 없다.
지금 느껴지는 죄책감이 심히 불쾌하다.
김지용은 심호흡하며 머릿속을 정리해나갔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싸움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익히는 마인드컨트롤이다.
김지용은 딱히 고수는 아니었지만 그 기술에 능했다.
김지용이 무림맹의 히트맨으로서 오래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히 증거를 잘 없애는 능력만이 아니었다. 살인을 저지르고서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능력이야말로 오랜 자객 활동을 유지케 한 원동력이었다.
김지용은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자신이 치른 온갖 데이트 비용과 그녀에게 준 비싼 선물들의 가격을 떠올렸다. 돈 많은 무림인답게 김지용은 여자친구의 대학 등록금까지 지원해주었더랬다.
이 정도로 해줬는데 목숨까지 달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그년에게는 분에 넘친다. 그러고도 희생을 요구하다니, 참으로 괘씸한 년 아닌가.
슬슬 그녀에 대한 분노까지 치솟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뭔 구구절절한 애원을 봐도 괜찮을 것이다.
김지용은 휴대전화를 들어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
대체 어떤 괘씸한 말이 적혀있는지 보니, 딱 두 글자였다.
도망
김지용은 잠시 눈을 껌벅였다. 그녀의 핸드폰 문자 입력하는 속도가 빨랐다는 것이 문득 기억났다. 무림인들에게서 휴대전화를 돌려받은 그녀가 했을 법한 행동도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폭음이 들려왔다.
“어?”
앞서 들어본 폭음이었다.
사이드미러에 나타난 바이크를 보며 이풍이 비명 질렀다.
“아, 씨발! 저 새끼 결국 병원 안 갔어!”
강남제일검이 질주해오고 있었다. 병원에 후송되다 말고 다시 바이크에 올라탄 모양이다. 심지어 그 손에 들린 일본도 또한 여전했다.
“야 이 미친 새꺄! 닛뽄도 안 내려놓냐!”
이풍은 창밖에 머리를 꺼내 소리 지르다가 황급히 머리를 차 안에 넣었다.
‘쿠와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다가온 강남제일검이 칼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허풍개가 나서서 막아내야 했다.
이풍이 말했다.
“저 새끼, 미쳤나 진짜? 이제 곧 사람 많은 곳으로 진입하는데, 저 지랄 계속하다간 경찰까지 따라붙을걸······ 다시 멈춰서 한 번 더 손봐주는 게 어때? 이번엔 쫓아오지 못하게 제대로 때려눕히는 거야.”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였다.
이풍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통화를 수신해보니 무림맹에서 온 것이었다.
무림맹의 누군가가 휴대전화 너머에서 외쳤다.
「빨리 멈춰요! 이번 일 다 넘어가고 사례까지 크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 새끼 넘겨주십쇼!」
이풍이 물었다.
“왜요. 뭐 그리 급해?”
「이러다간 다 좆돼!」
“그러니까, 왜?”
「박 회장!」
무표정하던 허풍개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 일에 박 회장이 끼어들었단 말입니다!」
허풍개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허풍개가 전화를 받아보니 방금 언급된 그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적 양반? 나 천서인이요」
허풍개는 기어이 한숨쉬었다.
“회장님, 뭡니까.”
「자객 새끼 갖고 있다지? 그놈 나 줘요」
“왜.”
「내가 가질라니까」
“안 된다면.”
휴대전화 너머 박 회장이 웃었다.
「콱 뺏어야지 뭘 어째」
끼기긱, 하는 소리가 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도혁이 흘긋 보니 강남제일검은 급히 핸들을 꺾어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어째서?
그보다 위협적인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그것은 차량이었다. 척 보기에도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할 법한 자동차. 그 속도는 강남제일검이 올라탄 바이크 못지않았다. 속도제한마저 풀어버린 슈퍼카였다.
그 차량은 순식간에 이풍의 차량 옆에 달라붙었다.
두 차량은 금방이라도 서로 부딪힐 듯 밀착했다.
근접한 차량의 뒷좌석 창문이 열리더니, 한 중년 남자가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풍 씨. 잘 지내나 봐?”
그 얼굴을 보고 이풍은 욕 한마디 내뱉어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한국 재계서열 2위의 기업인을 상대로 그러겠는가?
“예, 덕분에요. 정말 반갑습니다, 박 회장님······”
박 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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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이라 하면 당연히 박씨인 줄 알겠지만, 그 이름은 천서인이다. 원래는 박쥐 회장이라 불리던 것이 줄여서 그리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박쥐 회장이라 불리던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 행적이 박쥐를 모티브로 한 유명 히어로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손에 꼽히는 재벌이라는 점, 어릴 때의 일로 범죄단체와의 싸움을 시작했다는 점, 그 싸움을 무술을 익혀 직접 치러냈다는 점이 그렇다.
소년기 시절 천서인은 무림과 얽혀 썩 좋지 않은 경험을 했다는데, 정확히 무슨 경험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예의 유명 히어로처럼 무림인에게 부모가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한만은 부모라도 살해당한 수준에 못지않았다.
그날 재벌가 소년은 한국 무림에 대한 복수를 천명했으며 복수에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재벌가 자녀라면 으레 양생을 목적으로 무공을 익히는 법이다. 그리고 소년은 그 무공을 취미에 할애할 시간마저 아껴가며 단련하기 시작하더니, 청년기에 이르러 나름대로 만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청년은 얼굴을 가리고는 무림 문파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 습격으로 몰락한 문파가 스무 곳은 될 것이다.
거친 실전들을 거치는 동안 청년은 중년이 되었다.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고된 수련과 값진 영약들을 삼키길 그만두지 않았으며, 기어이 절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국 삼대 절세고수의 하나인 박 회장의 탄생이다.
그리고 아직 박 회장의 복수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결국 그 행적이 경찰에 걸린 탓에 문파를 습격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그는 정치권에도 연이 닿은 재벌이다. 온갖 영향력을 발휘하여 무림을 압박할 능력이 충분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한국 무림의 입장에는 최대의 적수인 셈이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는 이 회장을 무림공적으로 지정하기라도 했는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경제를 떠받드는 기업인에게 커터칼이라도 들이댔다간 경찰은 물론 국정원까지 분노할 것이요, 애초에 절세고수를 무슨 수로 제압한단 말인가.
무림맹은 박 회장을 무림공적으로 선언하기는커녕 아예 입에 언급하기도 두려워했다.
그리고 박 회장이 나타난 지금, 허풍개를 쫓던 무림인들은 그가 탄 슈퍼카가 전차인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감히 가까이 달라붙었다간 깔려죽을 할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오는 것이다.
덕분에 강남제일검조차 얌전해진 마당이었지만, 이 상황을 아무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대고 이풍은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박 회장이 여길 어떻게 와!”
무림맹의 누군가가 말을 흐렸다.
「그야 당연히 당신들이 데려간 김지용이 잡으려고······」
“그걸 어떻게 알고 오냐고! 니들은 내 차에 추적장치 붙여놔서 따라온 거라 쳐도 박 회장 저 인간이 쫓아오는 건 또 뭔데! 딱 봐도 니들 정보가 샌 거 아냐! 안에 첩자 새끼나 키우고 아주······”
박 회장이 탑승한 차량은 계속해서 옆에 밀착하여 따라오고 있었다.
이도혁이 물었다.
“박 회장이면 제가 아는······”
통화를 마친 이풍이 대답했다.
“그 박 회장 맞아.”
이풍은 한숨 쉬더니, 김지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여간 인기 좋아서 부럽소. 절세고수가 둘이나 관심 가져주고, 응?”
여기도 절세고수 하나가 있는 마당이지만, 심지어 그 절세고수가 무림인 서른한 명을 물리치는 초월적인 활약을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그래서 불안감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이도혁이 느끼건대, 방금 서른한 명을 상대로 본 절세고수의 존재감이란 너무나도 신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오래된 절세고수라니?
그 앞에서 범속한 무리는 그저 무력감에 젖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화기 너머 무림맹의 누군가가 애원했다.
「제발 협상합시다! 말하는 거 최대한 들어줄 테니까······」
허풍개가 그 말을 끊었다.
“무림맹에서 말 바꾸는 거 한두 번 봅니까. 위원이 직접 나와서 살려준다고 약속할 때까지 무시해요.”
김지용은 그 말을 듣고 놀랐다. 이 와중에도 기어이 자객 새끼 하나 살리겠다는 사명을 버리지 않은 것일까? 수익이 기대되지 않는 자원봉사임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풍이 물었다.
“박 회장 저 양반, 여기 자객 친구 뺏으려고 온 거 맞지?”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싸워야겠는데······ 이길 수 있나?”
“아뇨.”
“뭐?”
“잘 보니 혼자 온 것도 아니군요. 자기 무공 사부 네 명도 거느리고 왔습니다.”
옆 차량을 본 이풍은 눈을 크게 떴다.
확실히 웬 노인네 네 명이 박 회장의 양옆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박 회장은 절세고수가 된 이후로도 몸값 비싼 고수들을 초빙해서는 그 무공을 전수 받았는데, 그 고수들이 저 노인들이었다.
이때 박 회장을 가르치는 무공 사부들은 스승이라기보단 식객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평소에는 무공 교습이나 할 뿐이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직접 나서곤 했다.
그들이 절세고수인 박 회장과 비슷하거나 보다 강한 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감히 절세고수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을 만한 고수들이었다.
무적비비탄이라면 그중 한 명을 이길 수는 있어도 두 명을 상대로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세 명, 네 명이라면 패배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 예전보다 강해진 지금은 어떨지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승리를 장담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절세고수까지 한 명 껴있다면, 패배를 장담해야 할 것이다.
이풍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계속 튀어야 하는 거 아냐?”
“이 똥차로 저 차 따돌릴 수 없잖습니까.”
“그럼 어쩌려고, 정말 지려고?”
허풍개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김지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내가 저 인간이랑 싸운 다음 말이야.”
“예?”
“내가 이기면 괜찮아. 그런데 내가 지면, 순순히 저놈들한테 가.”
허풍개는 옆에 따라붙은 박 회장의 차량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지용은 눈을 크게 떴다.
“박 회장에게 보호를 요청하란 말입니까?”
“저 양반이 당신 갖고 뭘 하고 싶은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려두긴 할 거야. 최악은 면하는 셈이지.”
이풍이 끼어들었다.
“아니, 박 회장 저 양반! 딱 봐도 무림에 해로운 짓 하려고 이 자객 친구 뺏으려는 거 아냐?”
허풍개가 대답했다.
“그렇겠죠.”
“그럼 뺏겼다간 무림맹에서 뭔 지랄을 할 줄 알고?”
“안 뺏기려고 싸우긴 할 거니까 정상 참작해주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지금 저한테 강하게 나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이풍이 답답해하는 가운데, 김지용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왜 그렇게까지······”
허풍개가 대답했다.
“약속했잖아.”
“저 혐오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댁을 어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가. 추잡하든, 혐오스럽든······”
허풍개가 말했다.
“살아야지.”
“왜요?”
“살려달라고 했잖나. 살고 싶다고 했고.”
“예, 그런데 이건······”
“그럼 살아야지.”
허풍개는 지금 산수의 과정과 그 답을 설명하는 양 말하고 있었다. 수학적 계산의 답이 변하지 않듯 그 말 또한 변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상황에 김지용은 이제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어깨를 좁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한편 이도혁은 문득 허풍개를 떠올렸다. 교과서에도 이름이 실린 그는 일본에 잠입하여 고종 황제와 그 호위인 월녀를 구해낸 독립투사요, 광복 이후로는 온갖 암살 시도에서 기어이 여운형을 지켜내어 초대 수상에 오르게 한 한국의 전설이다.
그리고 그 제자, 스승처럼 교과서에 나올 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충분히 전설적인 무적비비탄 또한 이 순간 떠올렸다.
협객이 여기 있었다. 왜 굳이 싫은 놈까지 살리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도저히 그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협객이 분명했다.
한적한 장소, 그 누구도 밤중에 돌아다니지 않는 어두운 농촌에서, 차량이 멈추었다.
그 옆에 따라붙던 슈퍼카 또한 정지했다.
허풍개가 차에서 내렸다.
박 회장도 제 무공 사부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어우······”
박 회장을 본 이도혁은 숨을 삼켰다. 그 우락부락한 근육질 몸은 아무리 봐도 2미터 10센티는 돼 보였다.
그리고 몸 위에 달린 얼굴은 고작 삼십 대에 불과해보였다. 분명 그 나이가 일흔은 될 것을 생각하면 나이를 절반은 덜 먹은 셈이다.
그리고 그 무공 사부들은 제자와 달리 충분히 늙어보였지만, 그럼에도 그 세월만큼의 강함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킬킬 웃고 있었다. 절세고수 앞에서도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들 앞에서 허풍개는 장갑을 벗었다. 그것을 박 회장의 발치에 던지면서 말했다.
“덤비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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