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23화 (23/103)
  • 자객 김지용 - [4]

    1미터짜리 일본도를 당당하게 움켜쥔 강남제일검을 보며 이풍은 이렇게 걱정했더랬다. ‘무림맹이 미쳤나? 진짜 피를 보자는 건가?’

    강남제일검과 함께 온 다른 무림인들을 보니 그것은 아닌 듯했다.

    차에서 내린 무림인들이 든 무기는 대부분 목검이었다. 무겁고 단단해서 뼈를 부러뜨릴 수도 있고 머리통을 깨부술 수도 있는 무기다. 어쨌건 흉기까진 아니므로 경찰을 상대로도 변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림인들이 애용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몇몇 무림인들도 철봉이나 판관필 따위를 들었지 웬 날붙이를 챙겨오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상식적이다. 그들의 면면도 그렇다.

    차 안에서 이풍은 여기 모인 무림인들의 얼굴을 살피고는 안도했다.

    “다행히 몸값 비싼 애들은 안 보이네.”

    이도혁은 겨우 진정한 마당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숨을 헐떡이면서 물었다.

    “몸값 비싼 애들이라면······”

    “저번에 본 오은림 아가씨 있잖아? 그 정도 고수는 하나도 없네. 죄다 몸값 5억 이하 쭉정이야.”

    “쭉정이들로 절세고수를 잡으려 한다고요?”

    “고수고 뭐고 둘러싸이면 좆되는 거니까. 고수라고 손이 여러 개는 아니잖냐? 물론 절세고수쯤 되면 하수들이 둘러쌀 기회도 없이 먼저 죄다 쓰러뜨리겠지만, 하필 천억짜리가 있어가지고······”

    몸값 천억짜리 강남제일검이 절세고수를 이기리란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형편없이 밀리더라도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으리란 기대는 할 수 있다.

    그리고 강남제일검을 상대하느라 절세고수의 손이 묶인 틈에 나머지 하수들이 합세한다면? 확실히 절세고수의 입장에는 골치 아픈 일이다. 무림에서 절세고수를 상대할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술이다.

    그때 판관필을 든 무림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 무림인은 허풍개가 탄 차량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이렇게 외쳤다.

    “방금 기예 정말 잘 봤습니다! 절세 경지를 실제로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도혁은 황당해했지만 이풍은 그저 씩 웃었다. 어느 상황에서든 무림인들끼리 우호를 다지려는 한국 무림의 특성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아까 깜박이도 그렇고, 역시 절세고수 앞에서는 투지보단 경외의 감정이 앞서는 것일까.

    이제보니 저기서 살기가 넘치는 건 강남제일검 한 명뿐인 모양이다. 잘하면 좋게 좋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풍은 그리 기대했지만, 이번에도 그 기대를 깨뜨린 것은 강남제일검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강남제일검이 칼집을 휘둘렀다.

    콱,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방금 인사를 올린 무림인이 머리를 잡고 쓰러졌다.

    강남제일검은 칼집으로 쓰러진 무림인의 머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안 말려요?”

    이풍이 속삭이자 허풍개가 작게 대답했다.

    “내가 말렸다간 저 친구 돌아가서 뭔 짓을 당할 줄 알고.”

    무자비한 폭행은 쓰러진 무림인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서야 멈췄다.

    강남제일검은 다른 무림인들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친목 다지고 싶은 새끼 더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강남제일검이 계속 말했다.

    “없으면 가지.”

    강남제일검이 일본도를 치켜들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른 명의 무림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차 문이 열렸다.

    거기에서 내린 것은 한 명뿐이었다.

    허풍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서른한 명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 뒤의 차량과 거리를 벌리면서, 강남제일검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상당한 고수라는 것도.

    허풍개는 이 상황이 지루한 척 눈을 감는 척하며, 강남제일검의 기를 살폈다.

    확실히 강남제일검의 체내 기는 저 중에서 두드러졌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그 기의 양이 꽤나 놀랍다. 지난 육 년 동안 놀지 않은 걸까.

    적을 살핀 다음에는 이 장소를 살폈다.

    허풍개가 싸울 때 선호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야외이기 때문이다. 그 탄지공의 불가해한 도탄은 온갖 장애물이 많을 때 빛을 발한다. 실내, 그것도 좁아터진 장소일수록 더욱 좋다.

    그러나 이 주변에는 전봇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그로써 판단하건대, 이대로 근접전에 들어가는 건 좋지 않다. 이길지 질지는 차치하고 불리하다.

    애초에 근접전에는 비교적 자신이 없는 편이다. 한국에 넷밖에 없는 절세고수가 되었음에도 괜히 그중 4등이라 자부하는 것이 아니다.

    무림에 권사(拳士)는 많지만, 실전에서까지 맨손으로 칼을 상대하려는 별종은 오직 허풍개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맨정신으로 할 만한 짓이 못 되는 까닭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맨손으로 날붙이를 척척 막아내니 여유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름대로 상당히 정신을 집중해야 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지금은 천억짜리 고수가 상대 아닌가. 소위 ‘좆되기’ 싫으면 절대로 방심하지 말아야 하리라.

    그 생각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고수는 언제나 여유로워 보여야 하는 법, 기존의 표정과 자세를 유지했다.

    허풍개는 여전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은 채, 졸린 듯 눈을 반만 떴다.

    나른한 눈길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림인들을 바라보았다.

    거리를 좁힌 무림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허풍개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는 BB탄을 꺼냈다. 누구부터 쏘아야 하는가? 가장 위협적인 강남제일검?

    강남제일검이 달려오며 소리 질렀다.

    “장갑 빼!”

    장갑을 뺀 상태에서의 탄지공도 상대할 자신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저놈은 우선 내버려 두는 게 좋겠다.

    탁, 하고 첫 탄을 쏘았다.

    “억······”

    하수들의 반사신경은 평범한 사람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가뜩이나 어두운 와중이라, 달려오던 무림인은 그 BB탄을 막기는커녕 반응하지도 못했다.

    가슴을 적중당한 무림인이 무릎 꿇고 쓰러지는 가운데, 허풍개는 연달아서 탄을 쏘았다. ‘탁, 탁, 탁’.

    총 네 명을 점혈한 그때 적들과 허풍개의 거리는 오 미터에 불과했다.

    강남제일검이 지척에서 소리쳤다.

    “장갑, 벗으라고!”

    그 앞에서 강남제일검은 칼을 휘두르려다 멈칫했다.

    눈앞에서 표적이 사라져버린 탓이다.

    허풍개는 한 발로 탁, 하고 뛰었다. 그리고 솟구친 그 몸은 도로 내려오지 않았다.

    “어······”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고개를 들어 12m짜리 전신주 위에 우뚝 서있는 허풍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닭 쫓던 개들이 지붕만 바라보게 된 상황이다. 벼룩이 아닌 이상 십 미터 높이를 뛰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저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허풍개는 낚싯줄을 날려 전깃줄에 묶어서는 그 반동으로 높이 올랐다는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저들이 멋대로 상상하게 내버려 두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신비에 저들의 의지가 꺾이도록.

    그러나 역시, 강남제일검의 괴이하기까지 한 의욕에는 변함이 없었다.

    “저 새끼 못 잡으면, 나머지라도 잡아!”

    하기야 그들의 목표는 절세고수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김지용이 타고 있을 차량을 향해 돌격했다.

    그 앞을 막아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신주 위에서 허풍개가 무언가를 던졌다.

    촤르륵, 하고. 무언가가 잔뜩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정확히 뭐가 내린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림인들은 계속 달렸는데, 그러다 한 무림인은 자신의 팔이 무언가에 걸린 감촉을 느꼈다.

    마치 실과 같은······.

    팔에 닿은 무언가를 타고, 전류가 흘러내렸다.

    그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실에 닿은 무림인은 뻣뻣하게 굳더니 쓰러졌다. 비슷한 일이 연달아 세 번이나 벌어지자 무림인들은 돌격을 멈췄다.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가 주변에 펼쳐져 있는 걸 뒤늦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실?”

    정확히는 낚싯줄이었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도 않는 줄들이 저 12m 높이 전신주 위에서 내려와 곳곳에 거미줄을 드리우고 있었다.

    누군가가 항의하듯 외쳤다.

    “실에 독이라도 바른 겁니까?”

    허풍개는 대답 대신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 손가락 끝에서 번뜩이는 번개를 본 모두는 숨을 삼켰다. 절세고수의 마법이 저기 있었다.

    “내려와!”

    이 와중에 기가 죽지 않은 것은 강남제일검뿐이었다. 그가 소리 질렀다.

    “내려와서, 최선 다해 싸워, 새끼야!”

    허풍개는 강남제일검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게 내겐 최선인데,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최선 다할 거면 그 씨발 놈의 장갑부터 벗어!”

    허풍개로서는 그 바람대로 해주고 싶지 않다. 육 년이나 수련하면서 탄지공의 탄속 또한 전보다 대폭 오른 마당이다. 장갑을 벗고 그랬다간 정말 다칠 수 있다.

    그래서 허풍개는 장갑을 여전히 낀 채, 왼손에 연결된 열세 줄기 낚싯줄을 움직이는 데 신경 썼다.

    제 앞을 가로막은 줄을 끊어내기 위해 무림인들은 각기 든 무기를 휘둘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낚싯줄은 어딘가에 고정된 게 아니라 그냥 지상에 드리운 것이었다. 힘을 받아도 끊기거나 하는 일 없이 뒤로 밀려났다가 제 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이 와중에 허풍개의 오른손은 놀고 있지 않았다.

    허풍개는 전신주 위에서 계속 탄지공을 쏘아댔는데, 줄을 끊겠답시고 발이 묶였거나 우회하고자 멀리 돌아간 치들을 먼저 노렸다. 탁, 소리가 날 때마다 한 명씩 픽픽 쓰러지는 꼴이 이대로면 전부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이 상황을 강남제일검은 도저히 참지 못했다. 대체 이 무슨 숨 막히는 상황인가.

    무적비비탄보다도 강하다는 그 제자와 싸워보란 제안을 들었을 때, 강남제일검은 다가올 대결에서 정말 승리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잘 싸워보기를 원했다. 무기력하게 당했던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확신을 얻길 원했다.

    강남제일검은 필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날과 그 칼날보다 예리한 검술은 흐느적거리는 낚싯줄이라도 끊어낼 법했지만, 허풍개는 그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강남제일검이 낚싯줄을 향해 칼을 휘두르면, 칼날이 줄에 닦기 직전 허풍개는 그 줄을 당겼다.

    그것은 힘을 흘리는 묘리의 응용이라, 칼과 함께 밀려난 줄은 끝내 칼날에 닿더라도 뒤로 밀릴 뿐 잘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표정하던 강남제일검의 얼굴은 이미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내려와!”

    강남제일검은 포효하더니, 결국 실이고 전류고 뭐고 다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강남제일검이 칼을 잡지 않은 왼손을 뻗었다. 그 손에 낚싯줄이 잡혔다. 그것을 움켜쥐고는 세게 당겼다.

    “내려, 와!”

    허풍개는 그가 붙잡은 줄에 전류를 흘리느라, 그 잡아당기는 힘에 그대로 당겨졌다.

    허풍개가 지면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리고 그 순간, 강남제일검이 칼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천억짜리의 일격, 소리가 뒤따르는 일격이었다.

    허풍개는 그 일격을 눈으로 보고 피한 게 아니라 그 어깨가 움직인 순간 미리 움직였기에 피할 수 있었다.

    흘긋 보니 칼에 닿지도 않은 바닥이 조금 잘려있었다.

    허풍개는 약간의 섬뜩함마저 느끼며 상대를 보았다. 허공을 벤 강남제일검이 허망함에 젖어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그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전류를 참아내기 위해 입술을 깨문 것일까. 그러나 고통은 참아낼 수 있어도 신경이 마비되는 것까지 참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마저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전류에 마비된 그 몸은 풀썩 쓰러졌다.

    모두들 쓰러진 강남제일검과 그 앞에 선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허풍개가 내려왔으므로 더는 실이 가로막지 않게 된 상황이지만 그누구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목검을 든 무림인이 물었다.

    “강남제일검 대협,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요?”

    허풍개는 맥을 짚어보고는 대답했다.

    “괜찮은데. 정 걱정되면 병원 데려가든가.”

    무림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허풍개가 말한 대로 하기로 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두 명의 무림인이 허풍개에 꾸벅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강남제일검을 차에 태웠다.

    중요한 임무고 뭐고, 천억짜리 고수가 다친 상황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심지어 무림맹의 입장에도 그렇다. 만약 그 비싼 몸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무림맹에서 무슨 수로 배상해준단 말인가.

    두 명이 강남제일검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떠난 뒤에도 나머지 무림인들이 꽤 남아있었지만, 그들은 감히 덤벼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허풍개가 도로 차에 탔다. 운전석의 이풍이 창밖으로 외쳤다.

    “싸움 끝났으면 우리 간다? 따라오지 마요!”

    차량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핸들을 꺾으며 이풍이 투덜거렸다.

    “그 병신 새끼, 몸값이 아깝네······ 뒤에서 따라오냐?”

    이도혁이 사이드미러를 보고는 말했다.

    “예, 따라오는데요.”

    “하기야 나중에 욕먹지 않으려면 악착같이 따라붙긴 하겠지. 따라와도 뭘 어쩌진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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