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22화 (22/103)
  • 자객 김지용 - [3]

    “성철이? 우리 돌아올 때까지 사무소 일 잘 보고. 도혁이 너는 미리 껌이랑 커피 많이 사놨지? 그래, 그거면 됐다. 빨리 가자.”

    은밀하게 길을 나선 네 명은 사무소에서 멀리 주차된 차량에 탑승했다.

    이도혁이 운전대를 잡았다. 조수석의 이풍이 말했다.

    “이대로 평북까지 가자. 너 운전하다 졸려지면 내가 운전하고. 나 운전하다 졸리면 네가 운전해.”

    국경까지 올라갈 작정이었다. 그대로 명국에 넘어가 버리면 이번 일은 끝나는 것이다.

    이도혁이 국경까지 다다른 뒤 압록강은 어찌 건널 것이냐 물었더니 이풍 왈, 다 방법이 있다던가? 잠시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는 것이 이런 일을 여러 번 해본 것이 분명했다.

    차량이 달리기 시작했다. 허풍개와 김지용은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김지용은 옆에 앉은 허풍개를 흘긋 보았다. 놀랍게도 이 상황에마저 수련하려는 모양이다. 허풍개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에 신경 쓰지는 않을 것 같다.

    김지용은 조심스레 휴대전화를 켰다.

    읽지 않은 메신저 채팅이 수십 통 와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전 상관이 보낸 것이었다. 거기 첨부된 사진을 본 김지용은 무의식적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여자친구의 집이 찍혀 있었다.

    익숙한 그 장소에서 김지용의 전 상관은 불안한 표정의 여친과 함께 V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 사진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김지용은 잠시 표정이 굳었지만, 빠르게 휴대전화를 끄고 태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협박을 차량 안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은 결코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죽게 될지도 모를 그녀를 구하러 가자는 소리가 나올까 봐 겁났기 때문이다.

    옆에 앉은 저 절세고수라면 정말 그 정도로 정신 나간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협행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선 눈치 아닌가.

    그런 협객이라면 서른 가까이 죽인 히트맨의 목숨보다는 그 무고한 여친의 목숨이 훨씬 귀중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지용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김지용은 빠르게, 여친이고 뭐고 다 없던 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화장빨인 주제에 자기가 정말 이쁜 줄 아는 년이었다. 일 년 전까지는 결혼 얘기도 진지하게 나눴지만 요새는 그럴 맘도 없이 계속 사귀었다. 그마저도 정이 들어서가 아니라 새 여자를 사귀기가 번거로워 기존 관계를 관성으로 지속해왔을 뿐이다.

    7년이나 사귀어온 그녀가 자신 탓에 죽으면 조금 맘이 괴롭겠지만, 뭐 어떨 것인가. 어차피 술 마시고 펑펑 울며 잠들고 일어나면 맘이 깨끗해져 있으리란 것을 김지용은 알고 있다.

    지난 스물아홉 번의 일을 처리하고서 여러 차례 겪어본 일이다.

    차량이 계속 달렸다. 날이 저물었고 검은 차량은 그 어둠에 묻혔다.

    *******

    “이 새끼, 읽고 씹는데요. 지 여친 잡혔다는데 좆도 신경 안 쓰네.”

    “하기야 스물아홉 담근 인간 백정한테 순정이 뭐 있겠나.”

    “그럼 이년 어쩔까요?”

    “그야 뭐······.”

    *******

    해서에 들어선 차량은 더욱 속도를 내어 달렸다. 주변은 평야요 농촌이어서 얼마든지 과속하여 달릴 수 있었다.

    이대로 쭉 달린다면 혹시라도 따라붙을지 모를 추격자들과의 거리를 충분히 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믿었지만, 예상은 틀렸다. 추격자들은 참 일찍도 달라붙었다.

    사이드미러에 보이는 차들을 보며 이풍은 욕설을 지껄였다.

    “씨발, 어떻게 알고?”

    이도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혹시 GPS 장치 붙인 거 아닙니까?”

    “아니, 이거 대포차인데 어떻게 내 거인 거 알고······”

    지금은 이풍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한적한 농촌답게 지나가는 사람도 없겠다, 이풍은 마구 액셀을 밟았다.

    물론 추격자들이라고 느긋하게 굴지는 않았다. 별로 어둡지도 않은 저녁 무렵에 때아닌 추격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계속 달리고 또 달렸다. 쭉 명상 중이던 허풍개마저 눈을 뜨고 상황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여기로 다가오는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순식간에 추격전이 펼쳐지는 위치까지 다다른 그것은, 바이크였다.

    차량의 모두는 바이크의 탑승자가 손에 든 물건을 보았다. 이도혁은 기겁하여 눈을 크게 떴다.

    “저 칼, 저거······”

    그것만으로도 이풍은 저 바이크의 탑승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닛뽄대협이다!”

    닛뽄대협(泥魂大俠). 예전에는 서울 제2의 고수로 통하던 강남제일검의 새로운 별호였다.

    육 년 전 소속된 문파가 서울에서 쫓겨나 강남제일도 아니게 됐겠다, 이후로는 갑자기 일본도를 휘두르기 시작하여 그런 별호가 새로 붙었다.

    본인 앞에서는 절대 쓰지 않는 별호이기도 했다. 너무 노골적으로 모욕적인 데다, 감히 그 앞에서 그따위로 부르자니 강남제일검은 그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가 아닌가. 육 년 전에 수백억대였던 그 몸값은 지금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로 치솟아있었다.

    이풍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이딴 일에 천억짜리가 어떻게 튀어나와? 위원들이 집 팔아서 의뢰금 줬나?”

    그 눈동자가 불안감에 흔들렸다. 여러모로 그 예상이 빗나가고 있었다.

    이번 건은 무림맹의 입장에는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일이다. 은밀한 일이니까 별 힘을 쏟지도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 예상은 전부 틀린 모양이다. 심지어 무림맹 측에서 이번 일을 은밀하게 처리할 생각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다.

    저 천억짜리가 든 무기는 대체 뭔가.

    “닛뽄도를 왜 들고 와, 한국 놈 새끼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조폭들이 풀 플레이트 아머로 무장한 채 할버드를 휘두르지 않는 이유가 뭔가. 그러지 않고 배에 잡지나 넣어두고선 사시미 따위를 휘두르는 이유는 당연히도 경찰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 이치는 무림인에게도 적용되는 법이다.

    무림인들이 갑옷의 이로움을 몰라서 입지 않는 게 아니요, 길쭉한 창이나 월도(月刀)보다 연검(軟劍)과 판관필(判官筆) 따위가 강하다고 믿어서 그걸 쓰는 게 아니지 않은가.

    중무장을 하고 다녔다간 시선을 끄는 것도 문제거니와 경찰에게 불심검문이라도 당했다간 그대로 잡혀갈 위험이 있다. 그러느니 호신이나 겨우 할 법한 물건을 쓰는 게 낫다.

    그래서 무림인들의 무기 중에서 가장 흉악한 물건은 고작해야 휴대하기 좋게 길이를 줄인 검이 고작인 법이다.

    그런데 일본도라니? 심지어 40cm짜리 와키자시도 아니라 1m짜리 카타나였다. 차 트렁크에서 발견되기라도 했다가는 경찰이 바로 권총을 뽑아 들 만한 물건이다.

    그런 걸 휘두르고 싶으면 어디 밀폐된 건물에서나 휘두를 것이지 왜 야외에서 휘두르려 한단 말인가. 천억짜리 몸값이 감옥에서 썩어버릴 수 있음을 고려하면 미친 짓이다.

    그리고 지금, 누구보다 몸을 사려야 할 저 고수는 기꺼이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다.

    “씨······ 발······.”

    차량은 거의 최고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보이는 속도는 상대적이므로 그 뒤를 따라오는 무언가는 그 원래 속도보다 덜 빨라 보여야 정상이다.

    그러나 저 바이크는 그렇지 않았다. 달리는 차량에서 보아도 끔찍하게 빨랐다.

    그리고 이미 빠르게 달리던 그 바이크는, 거기서 더욱 가속했다.

    시속 300km? 그 정도가 아니다. 고작 십 초 만에, 시속 500km가 넘는 속도로 바이크는 가속했다.

    그 힘과 속도를 바이크 위의 무림인은 고작 한 손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핸들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는, 예의 길쭉한 일본도를 들고 있었다. 어두운 와중에도 그 칼날은 번뜩였다.

    강남제일검과 차량의 거리는 금방이라도 서로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이제는 차 안에서 강남제일검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에 이발과 면도를 하지 않는 것일까. 봉두난발에 수염이 듬성듬성 난 폐인의 얼굴이었다.

    아까부터 울리던 폭음은 더욱 커졌다.

    창문이 닫힌 차안에서도 폭음이 들려왔다. 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찢어질 것 같다. 이도혁은 고통마저 느끼며 귀를 막았다.

    바이크가 차량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바이크 위의 강남제일검은, 칼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핸들을 잡고 있던 손마저 떼어서는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등자가 없던 시절의 고대 기마 무사들처럼, 다리 힘만으로 달리는 바이크에 몸을 밀착했다.

    “저 미친놈이!”

    기어이 바이크가 차의 옆에 붙었다. 그 위의 강남제일검이 칼을 잡은 양손에 힘을 주었다.

    차량의 창문이 열렸다.

    창밖으로 두 손이 튀어나왔다. 강남제일검은 그 두 손의 면장갑을 보았다.

    무적비비탄의 제자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강남제일검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열기가 깃들었다. 저 두 손으로 칼을 막으려는 것일까.

    미친 짓이지만 비웃거나 의심할 필요는 없다. 상대는 절세고수 아닌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부리는 족속이다. 그러니 힘 조절 따윈 필요 없다.

    강남제일검은 허리와 어깨의 모든 힘을 실어 칼을 휘둘렀다.

    전신의 힘이 동원된 그 동작을 눈썰미 있는 무림인들이라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원말명초에 화산파 검객들이 사용했던 기마(騎馬) 무공이다. 칼에 검객의 힘뿐만 아니라 말의 속도와 무게까지 더하므로 더욱 가공할 위력의 무공이다.

    그리고 지금 그 칼에 더해진 것은 철로 달리는 말의 무게와 속도였다. 그로써 휘둘러진 칼날이 차량의 철판을 찢어도 그 누구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에 맞서 창밖으로 나온 손의 움직임은 느릿했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공기를 찢으며 다가온 칼날과 얽혔다.

    그 충돌의 순간, 최대한의 속도로 가속했던 바이크는 그대로 차량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굉음 따윈 없었다. 피와 불꽃이 튀는 일도 없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 이 순간의 시간은 그저 시냇물의 물처럼 평온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잠시 모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운전석의 이풍은 순식간에 저 멀리 추월해버린 바이크를 멍하니 보다가, 뒤늦게 뒷좌석의 허풍개를 보았다.

    “괜찮······  아니다. 장갑도 안 찢어졌네.”

    오히려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조수석의 이도혁이었다. 지금 그는 숨을 마구 몰아쉬었다.

    맨손과 칼이 충돌하는 걸 본 순간, 그 심장이 터질 듯 박동했다. 그 박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이도혁의 상태에 신경 쓰지 못했다. 그럴 때가 아니었다.

    “뭘 어떻게 한 겁니까?”

    김지용의 물음에 허풍개가 짧게 말했다.

    “태극권 수류식(水流式).”

    알고 있는 기술이기는 하다. 아무 태극권 도장에 가도 바로 알려주는 흔한 기술 중 하나다. 그 기술을 가르칠 태극권 강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라고만 가르칠 뿐 그 기술에 상대의 힘을 물처럼 흘릴 수 있는 마법적인 능력이 있다곤 절대 설명하지 않을 테지만.

    차라리 폭발이라도 일어났다면, 반격에 당한 강남제일검이 바이크에서 떨어져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면 이보다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 무식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강남제일검조차 아무 일 없이 무사하다는 점은 정말로 그 모든 충돌의 여파가 흘러가 버렸음을 의미했다.

    스물아홉 명이나 죽여 벌어들인 돈을 죄다 영약으로 바꾸어 배 속에 넣었음에도 넘볼 수 없는 경지를 보며, 이 순간 김지용은 애인의 운명에 관한 생각마저 잊었다.

    정말이지, 방금 그 장면은 비현실적인 일에 익숙한 무림인이 보기에도 조화의 극치였다. 그것은 임무를 수행하러 온 무림인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저 새끼들 뭐야?”

    방금 전부터 뒤따르던 차량들이 일제히 깜박이를 켰다 껐다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김지용이 대답했다.

    “방금 그 기예에 경탄을 표시하는 것 같군요. 뭐가 벌어졌는지 멀리서도 대충이나마 알아본 모양입니다.”

    “그래? 난 가까이서 보면서도 하나도 못 알아보겠던데. 부럽네······”

    이 와중에 살기가 넘치는 것은 한 명뿐이었다.

    저 멀리 나아가버린 강남제일검은 방향을 급히 바꾸더니, 다시금 이쪽으로 돌격해왔다.

    아까 그 짓거리를 똑같이 벌이지는 못했다. 아까 그 동작을 펼치기 위해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렸을 것이다. 또 그러기는 어려울 테고.

    물론 바이크 위에서 칼을 휘둘러오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매서웠다. 이번에는 역방향에서 달려오는 것이므로 바이크의 속도 또한 훨씬 빨라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허풍개가 창 밖으로 내민 손은 가공할 힘과 속도로 휘둘러진 칼날을 쉽게도 흘려보냈다.

    이풍은 이번에야말로 사고가 나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이를 악물며 물었다.

    “저 새끼 어쩔 거야? 콱 BB탄 쏴서 떨궈버리면 안 돼?”

    허풍개는 살인하는 법이 없었다. 적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콘크리트에 머리 갈리는 꼴 보고 싶습니까.”

    “그래도 저딴 짓 계속하게 두면 좆돼! 차 기스 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 카메라에도 찍히기라도 하면······”

    “이거 대포차 아닙니까.”

    “그래도!”

    허풍개는 강남제일검을 보았다. 아무래도 뿌리치기는 어려워보였다.

    “그럼 슬슬 멈춥시다.”

    “싸워서 쫓아내게?”

    “예.”

    “싸우기 유리한 쪽으로? 아니면······”

    “그냥 사람 눈에 잘 안 띌 곳으로.”

    이풍은 그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얼마쯤 달린 차량이 멈추었다. 시속 수백 킬로로 달려대던 바이크도, 그 뒤를 따르던 검은 차량들도 모두 멈추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무림인들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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