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김지용 - [2]
협상이 잘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풍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긴 통화를 마치고 온 이풍은 이렇게 투덜거렸다.
“하여간 무림맹 꼴통 새끼들, 말을 안 들어 처먹어요.”
김지용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어이 절 담가야 만족하겠답니까?”
“예, 뭐. 김지용이 이 친구 우리랑 잘 아는 사이다. 사실 나랑 사촌 사이다. 그러니까 좀 봐달라, 뭐 이렇게 사정해봤는데 지랄하지 말고 당장 내놓으랍니다.”
김지용은 씹어내뱉듯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까지 무림맹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데, 어떻게······.”
“그것도 말해봤지! 게다가 그 자객 양반 잘못으로 증거가 남은 것도 아니까 한 번만 봐줘도 되지 않냐 해봐도 소용이 없더군요. 아무튼 증거가 남았으니 그놈 잘못 아니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겁니까?”
“숨겨줄 수······”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돼. 이미 무림맹에선 댁이 여기 있는 거 알 거요.”
“예? 나 여기 있단 거 말했어요?”
“아니, 이 근처에 이미 무림맹에서 보낸 감시원이 있을 거라서 그래. 절세고수가 뭐 하는지 그놈들도 대충은 알고 싶으니까 상시로 사람 깔아두는 거지.”
“그럼, 대체······”
“내가 선수금 받은 것도 있으니까 은신처 정도는 마련해줄 수 있는데.”
김지용은 고개를 숙였다. 뜸 들이더니,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살려주십시오.”
“뭘 어떻게 살려줘요?”
“도주를 도와주십시오.”
이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림맹에서 하는 일에 대놓고 초를 치라고?”
“무적비비탄 대협께서는 일찍이 무림맹이 하는 일에 어깃장을 놓은 적이 많지 않습니까? 무림맹의 행사를 대놓고 방해한 적도 몇 번이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사람이랑 보수 봐가면서 그런 거지. 6억이 전 재산이랬나?”
“예.”
그것은 확실했다. 가진 돈이 더 있었다면 십억이건 백억이건 이풍이 죄다 뜯어냈겠지만 김지용이 가진 것은 그게 전부였다.
무림맹 최고 자객치고는 적은 재산이지만 젊은 무림인치고는 많이 가진 편이었다. 으레 젊은 무림인들이란 돈이 생기는 족족 영약을 사 먹는 법이다. 오히려 그 정도라도 가진 것이 용했다.
“꼴랑 5억 받고 무림맹에 밉보이라고? 미쳤나······.”
“거기서 6천 더 드리겠습니다. 6억, 6억 드릴게요.”
“도주한 다음 쓸 생활비까지 몽땅 주시게? 그래도 안 돼요.”
“제발, 전 재산입니다. 그리고 6억이면 절세고수께서 보시기엔 별거 아니겠지만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풍은 한숨쉬었다.
“이봐요, 6억이면 이득 아니겠냐 싶겠지만 절대 아니야. 우리가 앞으로 무림맹이랑 아예 척져야 하나? 아니지. 무림맹 일을 방해한 다음에는 위원 나리들 체면을 신경 써줘야 할 거 아니요.
그냥 중재만 하는 거면 그냥 용돈이나 하라고 오백씩만 꽂아줘도 돼. 그런데 아예 대놓고 깽판 친다? 두당 일억씩은 꽂아줘야 됩니다. 고진철이는 우리랑 척 졌으니까 안 준다 해도 나머지 여섯 명한테 주면 6억이요. 한 푼도 안 남는다고.”
“그러지 말고, 제발.”
“내가 협상 과정에서 구라를 자주 치긴 하는데 이번엔 아니야. 진짜 남는 게 없어.”
물론 김지용은 포기하지 않았다. 목숨이 달린 일 아닌가.
“그렇다면······ 협객으로서 도와주실 순 없겠습니까.”
이풍은 눈을 크게 떴다.
“협객으로서?”
“언제 무림맹에서 담가버리려고 했던 형사 양반,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돈 한 푼 안 받고 지켜준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놈 담그라고 부탁했던 경찰청장까지 노발대발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와줬다고요.”
“그랬지. 하지만 그건 무적비비탄이 그런 거잖아.”
“제자 분은 스승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동자공까지 따라 익혀낼 정도 아닙니까······”
이풍은 이제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그 형사 양반은 평생 관련 사건에 대해 입 다무는 조건으로 국외에 탈출시켜준 거요. 그래서 높으신 분들도 그냥 넘어간 거고.”
“저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명국으로 튀고 싶습니다. 평생 안 돌아올 겁니다. 끝까지 입 다물 거고요. 무림맹으로선 이번 일을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을 겁니다. 토사구팽하려다 방해 받은 걸 무림인 모두에게 알릴 수야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풍은 팔짱을 끼며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이풍으로서는 거의 무상으로 봉사해달라는 저 말이 영 불만스럽지만, 어쨌건 결정권자는 허풍개인 것이다.
그리고 허풍개 또한 이풍과 마찬가지로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늘 무표정한 그 얼굴에 미세한 분노가 드러나있었다.
과연, 지금 허풍개는 예를 차리려 하지도 않았다. 이도혁을 상대로도 하지 않는 하대를 했다.
“살려달라고 했지.”
“예, 제발······”
“당신을 살리는 건 과연 의로운 일일까.”
“예?”
“당신은 자객인데, 세상에 자객을 살려두면 일어날 일은 뻔한 것 아닌가. 목숨 하나 살렸다가 더 많은 목숨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건 내 업보로 돌아오는 게 아닐까.”
“외국으로 튀면 숨죽여 지낼 겁니다! 자객 일은 그만두고······”
“정말?”
“약속합니다! 목숨을 걸고 약속드려요!”
“소리칠 것 없어. 절실하게 말해도 안 믿으니까. 그냥 내 맘이 편해지려고 물은 건데, 역시 별로 안 편해지네. 거짓이라면 눈깔 뽑으러 가겠다고 협박이라도 해야하나.”
믿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김지용의 얼굴에는 희망이 깃들었다.
“그 말씀은, 도와주실 거라는?”
허풍개는 대답하기도 싫어했다.
이풍이 대신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떠날 준비나 하쇼. 혹시 꿍쳐둔 돈 있으면 챙겨오고.”
허풍개는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그 낯짝을 계속 보기도 싫은 눈치인데, 그런데도 도와주겠노라 말한 것일까.
근처에 머무르고 있던 이도혁은 그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직접 가서 물어보았다.
“이번에도 그거야? 협객이라면 도와달란 사람을 불쌍하지 않아도 도와야 한다?”
허풍개는 이도혁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그래요.”
“스승님의 가르침을 너무 기계적으로 따르는 거 아닌가?”
“뭔 소립니까.”
“무적비비탄 대협께서는 좀 더 불쌍한 사람들을 도운 걸로 아는데·····.·”
허풍개는 한숨 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무적비비탄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세상이 지금보다 미개했으니까 그럴 수 있었죠. 조폭들이 노점상에 삥뜯고 사채꾼이 채무자 집 앞에 쳐들어가서 돈 갚으라 동네방네 다 들리게 확성기 들고 소리치던 시절 아닙니까.”
“요즘은 아니고?”
“요즘엔 깡패들이 그 지랄해봤자 경찰 부르면 다 해결됩니다. 이젠 사람들도 똑똑해져서 그걸 다 알아요. 이런 시대에 경찰서 안 가고 무림 깡패한테 도와달라고 오는 사람이면 제대로 된 사람이겠습니까.
화류계 아가씨가 도와달라는 거면 상당히 나은 경우지, 대부분은 웬 좆같은 놈들이 살려달라고 옵니다. 문파 재산 횡령하고는 못 메꾼 거 걸렸으니 살려달란 놈이나, 두목 애인이랑 그 짓을 했다가 걸렸으니 살려달란 놈이나.”
“무적비비탄 대협께선······”
“다 도와줬어요.”
“왜?”
“그거라도 안 도와주면 딱히 협객 노릇할 기회가 없으니까. 이런 건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소문날 일도 아니라서 들어본 적도 없겠지만.”
이번 일도 협객으로서 도울 만한 일이기는 했다.
김지용이 살인마 잭보다 여섯 배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놈이라든가, 그가 어떻게 죽은들 인과응보이리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어쨌건 조직에 충성하다 토사구팽당하여 죽게 된 억울한 스토리 아닌가.
아무튼 목숨 하나 살리는 일인 것이다. 공과격에는 공(功) 100점이나 기록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돕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사람을 억지로라도 돕는 일이 과연 이로운 일인가 의심이 들기까지 했지만, 그래서 더욱 도와야 했다.
누군가를 돕는 일에 별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된 지는 이미 오래 아닌가. 이 와중에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한 번 도움을 거부하게 된다면 계속 거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지난 백 년의 수행을 부정하는 셈이므로,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좋든 싫든 해오던 협객 노릇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회의감을 덮기 위해서는······.
이풍이 방에 들어왔다. 그는 분명 아까 제 형님의 결정이 못마땅한 듯 보였지만 이미 결정한 일에 이래라저래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울해보이는 형님의 기운을 북돋고 싶은 모양이다. 일부러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놈한텐 무림맹이랑 척지는 일이니, 뭐니 했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무림맹 그놈들이 지금 감히 무적비비탄의 제자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내 보기엔 우리가 이번에 그놈들 일 방해해도 그냥 항의만 하고 끝날 거 같아. 어쩌면 떡값 돌릴 필요도 없을지도······.”
“그래도 한 번 충돌할 준비는 해야 할 것 같군요. 실 준비돼있습니까?”
“실? 있지 물론. 가져와?”
“예.”
이풍이 예의 실을 가져왔다. 줄줄 감긴 채 은빛으로 빛나는 줄.
“어, 그거 무적비비탄 대협께서 사용하시던······”
“그래.”
이도혁은 무적비비탄이 사술(蠶術)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팬으로서 눈을 빛냈다.
“천잠사!”
“옥션에서 산 낚싯줄인데? 싸고 튼튼하고 구하기도 쉬우니까 이게 좋아.”
이풍은 씩 하고 웃으면서 줄을 허풍개에게 내밀었다.
허풍개는 오랜만에 만져보는 줄을 손에 감고는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풍이 물었다.
“그런데 이거 받아서 뭘 어쩌려고? 굳이 실 쓸 필요가 있나?”
“있어요. 제 번개, 강해진 거 봤잖습니까.”
“어, 그렇지. 그런데 왜?”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봤는데, 생각나는 게 몇몇 있더군요. 무림맹에서 보낼 누군가와 싸우기 전에 미리 연습해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허풍개가 실이 묶인 양손을 양옆으로 뻗었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 순간, 이도혁은 너무 놀라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줄에 시퍼런 번개가 타고 흐르는 것이 눈에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말도 안 되는 재주다. 심지어 무적비비탄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제자가 스승을 능가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모양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거의 기계적으로 따를 뿐인, 거의 사이코패스로 보이는 작자라지만 어쨌건.
허풍개가 중얼거렸다.
“전류가 잘 안 통하네. 물이라도 좀 묻혀야하나.”
이후로도 허풍개는 이런저런 일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이도혁은 이 무적비비탄의 제자답지 않은 제자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은 기꺼이 감탄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지어 이풍마저도 경이를 담아 바라보는 가운데, 허풍개는 이런저런 일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그 잠시간의 수련을 마치고 사무소를 나선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 뒤였다. 이풍은 차에 올라타며 중얼거렸다.
“연습한 거 보니 멋지던데, 그래도 역시 싸울 준비할 필요는 없을 거 같거든? 왜, 무림맹 입장엔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잖아. 뭔 예산을 낼 수 있어서 고수를 내보내겠어.”
“대비는 해야죠.”
“만에 하나 전투원들을 보내봤자 그냥 몸값 오억 내외 고만고만한 애들만 잔뜩 보낼 거 같은데? 그러니 긴장 풀고······”
*******
그날 방송국에 있던 사람들은 무적비비탄과 싸웠노라 표현할 수 없었다.
그들이 접한 무적비비탄은 의인화된 폭풍에 지나지 않았다. 20층 건물 안에 밀어닥친 폭풍.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폭풍을 상대로 싸웠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그 자리에 운 나쁘게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육 년 전, 그날 방송국의 방비는 딱히 허술하지 않았다.
방송국은 언제나 누군가의 불만을 사기 마련이고, 잠재적인 습격자들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숫자로 밀고 들어오려는 아이돌 팬들은 그나마 해가 없는 축에 속한다. 방송에서 사이비로 나온 종교단체에서 광신도들이 쳐들어오는 일이며, 어떤 연예인에 불만을 품었는지 식칼을 품고 잠입하려는 사이코들은 얼마나 많은가.
경비원들에게 목숨의 위협까지 느끼게 하는 그들은 어쨌건 막아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날의 습격자를 상대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날 그 누구도 거대한 방송국 건물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오 초 이상 저항하지도 못했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애매한 속도로 날아온 무언가에 옆에 있던 사람이 고꾸라지는 장면을 보노라면, 그리고 사람을 쓰러뜨린 그것이 고작 1g짜리 플라스틱이었음을 깨닫고 나면 모든 저항의 의지는 사라진다.
결국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벌벌 떨며,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덜 고통스럽기만을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방송국에 있던 경비와 직원들뿐만 아니라 뒤늦게 출동한 무림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의 전설, 무적비비탄의 습격 뉴스를 듣고 기겁한 무림맹은 긴급히 서울의 문파들에 연락하여 그 행패를 막도록 했다.
각 곳의 문파에서 모인 수십 명의 무림인들은 방송국에 진입했다.
경비들은 모두 쓰러진 지 오래, 곳곳에 시체처럼 널브러진 사람들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수십 명의 무림인은 방송국 복도를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뭔가를 던지거나 쏘아봤자 여기에는 도저히 닿게 할 수 없을 어딘가에서 1g짜리 플라스틱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무림인들의 반사신경은 확실히 스포츠 선수들의 그것보다 뛰어나다. 극한으로 끌어올린 신체 능력에 내공이란 도핑이 더해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십의 무림인들은 날아오는 BB탄들을 쳐내기도 했고 잡아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일 분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분명히 쳐냈는데도 기어이 반대편 벽에 튕겨 뒤통수를 향해 날아오는, 도저히 방어할 수 없는 부위인 아킬레스건과 목 뒤 따위를 노리고 날아오는 불가해한 플라스틱들. 어딘지도 모를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날아오는 그것들을 상대로는 무림인 특유의 놀라운 반사신경도 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에도 몸값이 칠백억에 근접한다고 알려졌던 서울 제이(第二)의 고수, 강남제일검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동안 단련해온 내공이며 무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나마 놀라운 반사신경 덕에 계속해서 날아오는 BB탄들을 쳐내고 또 쳐내며 전진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끝내 반격 비슷한 것을 해보지는 못했다.
그저 무적비비탄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 당시 칠백 억짜리 고수가 이루어낸 유일한 성과였다.
강남제일검이 끝내 다다른 그곳에서 무적비비탄은 한가로이 걷고 있었다.
강남제일검이 칼을 겨눈 그 순간에도 무적비비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여전히 도망치는 직원이며 연예인들을 고꾸라뜨리는 데만 전념할 뿐이었다.
그리고 강남제일검이 칼을 겨누고 돌격한 그 순간에 눈길 한 번 주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때 무적비비탄은 장갑을 벗었고, 금속으로 추정되는 2g짜리 BB탄 한 알을 던졌을 뿐이다.
그리고 필사의 돌격을 벌인 강남제일검은, 칠백억짜리 몸값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향해 날아온 그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것은 아마 지쳐있던 탓이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일 수도 있었다. 설마 손가락의 힘으로 총알 만한 속도를 낼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런데도 결국 보지 못했다. 당연히 막아내거나 뭘 해보지도 못했다.
강남제일검이 칼을 휘두르려고 마음먹었을 때 모든 것은 끝나버렸다.
이미 날아온 그것은 몸에 닿아있었고 시야는 암전했다. 그리고 수 시간 지나, 사건이 종료된 지 수 시간 흘러 눈을 떴을 때 비로소 강남제일검은 자신이 쓰러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몸 담고 있던 문파마저 그 사건의 영향으로 망해버린 뒤, 강남제일검은 의외로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허무감을 느꼈다.
지독한 허무. 그 정도의 무력함을 겪고 나면 씻을 수 없는 탈력감이 밀어닥치는 모양이다. 이후로는 취미를 즐기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즐겁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즐거움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무기력함을 준 대상을 상대로 이겨내면 된다.
그날 이후 강남제일검은 수련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밥 먹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빼면 수련을 했다. BB탄을 강하게 쏘아내는 기계를 주문해서는 베어내고 또 베어내길 반복했다. 기계의 힘으로 쏘아내는 빠른 속도를 눈에 익혔다. 단순히 쳐내는 게 아니라 베어내는 것을 연습했다.
그로부터 육 년이 흘렀다.
“형님?”
부하의 말에 강남제일검은 명상을 그만두고 눈을 떴다.
“무적비비탄 제자 아시지요. 이번에 나와서 고진철이 묵사발 만든 놈이요.”
“그래.”
“그놈 절세고수라니까, 절세고수인지 아닌지 판정이 애매했던 스승보다 고수일 수 있다는 것도 아시죠.”
“그래.”
“혹시 그놈아랑 떠볼 맘 있느냐는데요. 그런데 이건 무림맹 차원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냥 위원들이 시키는 일이니까 돈은 많이 못 준대요. 그러니까 싫으면 거절해도 된답니다.”
뭔 일로 그래야 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칼 가져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