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객 김지용 - [1]
확실히, 허풍개는 돈을 잘 버는 편이 아니었다.
물론 일반인들의 기준에 놀라운 거금을 벌어들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수입은 무림인들의 기준에는 부족한 편이다.
그것이 어떤 무림인보다도 거금을 만져야 마땅한 절세고수의 수입이라면 부족하다 못해 초라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백억짜리 의뢰가 들어오는 일은 꽤 있지만 정말 그런 일을 맡아서 수행한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안 된다. 약물 유통에 관련된 일도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가리다 보면 사파 무림인으로서의 일은 상당히 줄어드는 데다 그 보수도 내려가는 까닭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약 살 돈도 충분하지 않았다. 정말 귀하고 비싼 영약들은 입에 넣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 사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영약만 잔뜩 먹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된다고 믿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귀한 영약을 먹을수록 최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빌 게이츠와 사우디 국왕은 지금쯤 세계 최고의 경지여야 할 것 아닌가. 심지어 빌 게이츠는 수십 년 전부터 은퇴하고는 무공 수련에 매진한다던데, 그가 절세고수가 되었다는 말 따윈 들어본 적이 없다. 그걸 보면 영약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는 매우 부족한 요소였던 모양이다.
고작 단약 한 알 먹었다고 이토록 월등한 성취를 보이다니?
이번에 복용한 것만큼 좋은 약을 이전에도 한 번 먹어보긴 했다.
방송국을 습격했을 때, 그 대가로 한국 최고서열의 기업인이 누구나 탐내는 영약을주었더랬다. 생각해보면 그 약을 복용한 뒤에 이루어낸 성취도 상당했던가?
영약, 그놈의 영약.
원래도 영약 선물 받기를 그리도 좋아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머릿속이 영약에 대한 것으로 꽉 차버렸다.
그 탓에 명상이 방해될 지경이라, 허풍개는 애써 머릿속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약팔이의 수법이야. 히로뽕을 사줄 고객을 늘리고자 할 때, 상대방은 겁나서라도 선뜻 돈 주고 사기는 꺼려질 테니 미리 공짜 샘플을 주는 거지. 약이 좋은 줄 알게 해서, 나중에는 제값 주고 계속 사도록 만들기 위한 작업······’
그러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미몽(迷夢)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사라지질 않던 고민은 갈수록 커져만 갈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더 근본적인 마음속 불안감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방식대로 과연 신선에 오르는 게 가능한 것인가. 지금까지의 방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나. 그렇다면 지난 백 년의 상당 시간은 허송세월인 셈 아닌가.
지금 새삼 생겨난 불안감은 아니었다. 지난 백 년 동안 수련하며 애써 마음속 깊숙이 덮어두었던 불안감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뿐이다. 이 불안감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천마가 수행자의 고행을 방해하러 왔으니 심마(心魔)가 생기지 않고 배길 것인가.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허풍개는 수련에 몰두했다.
앞서 결심했듯 수면시간을 한 시간 줄이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수련하기 위해 애썼다.
*******
나흘 뒤에도 허풍개는 수행자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도사로서 수련한 뒤 침술원에서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중에서 수행과 관련되지 않은 시간이라곤 딱 한 시간, 이풍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할애하는 시간뿐이었다.
“놀아줘!”
성심껏 무공 교습을 마치고 나니, 이바람이 졸라댔다.
“놀아줘!”
허풍개는 숫제 땡깡을 부리는 이바람을 무시하고 내려가려다 그만두었다. 손녀나 다름없는 아이를 그따위로 대할 수야 없다.
허풍개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물었다.
“정말 저랑 놀고 싶어서가 아니라, 제가 무공 교습 끝나자마자 바로 꺼지려는 거 같으니 심통 난 거 아닙니까.”
“아닌데? 정말 오빠랑 놀고 싶어서 이러는데?”
뒤늦게나마 이풍이 끼어들어 딸을 말렸다.
“야 인마, 깽판 치지 말고 집에 가. 너 여기 계속 있으면 용돈 안 준다?”
삼 분 뒤에야 이바람은 떠났고, 이풍은 맘에서 우러나오는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풍은 요새 제 형님이 가뜩이나 많던 수련 시간을 억지로 더 늘렸단 걸 알고 있었다. 이런 부류의 시간 낭비를 매우 싫어한다는 사실도.
“진짜, 진짜 미안해요.”
“됐어.”
허풍개가 손을 저었지만 이풍은 계속 미안한 투로 말했다.
“형님? 시간 좀 아끼려면······ 도혁이까지 가르치는 건 그만두셔도 돼요. 제가 왜 직원 애들한테 무공 가르쳤는지 알아요?”
“바람이한테 무공 가르치고 싶은데, 누구한테 뭐 가르치는 법을 잘 모르니까 미리 연습해본 거 아니냐.”
“딱 보면 아시네? 맞아요. 이젠 절세고수님한테서 직접 배우기까지 하니까 더는 누구 가르치는 법 연습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형님이 걔네 가르칠 필요도······.”
허풍개는 한숨 쉬었다.
“제자로 받아놓고 그러면 못 쓴다.”
“아니, 형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부모 자식 관계와 같은 거야. 싸질러놓고 방치하는 게 패륜이듯 제자로 삼아놓고 돌보지 않는 것도 패륜이다.”
“요즘엔 제자들이 교사 패던데요? 저만 해도 담탱이 줘팼다가 퇴학당했고.”
“이 미친 새끼가.”
허풍개는 이풍을 째려보더니 이제야말로 자신의 침술원에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게 되었는데, 사무소에 손님이 찾아온 탓이었다.
허풍개를 찾는 손님이었다.
사무소에 들어온 남자는 서른 살로 보였다. 그러나 자신보다 어려보이는 허풍개를 상대로 깊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고는 말했다.
“무적무적자 대협 되십니까?”
허풍개는 나이가 많은 것처럼 취급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퉁명스레 대답했다.
“제가 대협이라 불릴 연배로 보입니까.”
이풍이 이상한 눈으로 백이십 살 늙은이를 바라보았지만 허풍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몸에서는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남자가 말했다.
“예, 그럼, 소협? 아니, 선생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대로면 죽게 생겼습니다.”
“뭔 소립니까.”
“무림맹에서, 무림맹에서 절 죽이려 합니다.”
허풍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림맹에서?”
“예, 절 처리하러 히트맨을 보낼 겁니다. 그러니 제발······.”
*******
사내의 이름은 김지용이다. 무림맹과 얽힌 걸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무림인이다.
무공을 익히긴 익혔지만 높은 수준에 이르진 못했다. 물론 이런 하수도 다 무림인으로서 먹고 살 방법이 있다. 가문 혹은 소속된 문파의 잡일을 맡아서 하거나 그도 안 되면 무림맹의 일을 맡아서 하면 된다.
김지용은 무림맹에서 일했다.
“자객이었습니다. 무림맹의 지시를 받아 무림공적을 처리하는······”
“히트맨이었다고?”
김지용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예, 그렇지요. 이제 히트맨에게 처리당하게 된 히트맨입니다.”
이풍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어요. 김지용이. 무림맹 최고의 살수(殺手). 거의 서른 명 가까이 처리했으면서 그중에 한 번도 증거를 안 남겼기로 유명한 무림맹의 히트맨, 맞소?”
“예. 맞습니다.”
이 대화를 들으며 허풍개는 속으로 탄식했다.
도덕존경계(道德尊經戒)에는 도사들이 살인이나 죽음에 관해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계율이 있다. 살인을 실행에 옮기는 건 물론 입에 담지도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허풍개는 평소에도 누굴 죽이겠노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죽음, 그 단어 자체를 몸서리치게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도 죽음에 관련된 말을 듣는 것 또한 끔찍하게 싫어했다. 누군가가 뒤진다고 협박이라도 하면 발작하듯 분노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살인, 죽음 따위 말을 수십 번은 듣게 생겼다. 이 얼마나 수행에 해로운 일인가.
이 시점에서 김지용은 허풍개에게 밉보인 셈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용은 계속 말했다.
“예, 스물아홉 명인가 처리했는데도 한 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처리한 다음 완벽하게 사고사 아니면 자살로 위장했어요. 제가 무림맹 최고였죠.”
그리고 저번 임무에서 또 한 명의 무림공적을 처리했다. 상위방파에 상납을 삼 개월치나 밀려놓고는 살해위협을 받자 경찰에 보호를 요청한 폭력배였다.
무림맹 위원들은 투표 끝에 이 흉신악살을 무림공적으로 결정했다. 김지용은 쉽게도 놈의 은신처에 침투하여 놈을 죽였다.
그러나 때가 좋지 않았다. 요새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총기 사건과 마약 사건 탓에 경찰 조직은 반쯤 미쳐있었다.
이 와중에 생겨난 살인 사건을 곱게 넘어가 주려 하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무림 조직에 상납하던 놈이 죽은 것이겠다, 경찰들은 곧바로 무림맹 본부에 쳐들어와서는 살인범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겨우 사람 하나 죽었다고 신성한 관무불가침을 무시하는 이 처사에 무림맹의 위원들은 분노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모름지기 범죄단체는 경찰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는 법이다. 경찰들이 열심히 일하노라고 국민들에게 증명할 수 있도록 협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평소라면 대충 충성심 높은 조직원 하나를 검찰에 출두시켜서는 이놈이 범인입네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면 경찰은 범인을 얻은 셈이요, 관의 체면은 지켜지고 무림의 평화는 지켜질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더없이 불행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증거가 남아버린 탓이다.
“그동안 증거 남긴 적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예.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제 잘못도 아니었어요. 그놈의 모기 때문에······”
“모기?”
그렇다. 모기.
김지용이 임무를 하는 동안 모기 한 마리가 김지용을 물었다.
김지용이 사건현장을 완벽하게 처리하고서 나간 뒤, 김지용을 물었던 모기는 쌩쌩하게 돌아가던 선풍기 뒤쪽에 빨려 들어가서는 팬에 갈려 죽어버렸다.
결국 선풍기 팬에는 모기의 시체와 놈이 빨아들인 혈액이 남아버렸다. 김지용의 DNA가 현장에 남은 것이다.
이 경우에는 아무 놈이나 자백시켜서 범인으로 둔갑시킬 수 없다. 살인을 저지른 본인을 내놓든가, 아니면 우리와 관련 없는 일이라고 뻔뻔하게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에 그리 뻗대었다간 경찰이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었다. 후자는 선택할 수가 없었다.
진짜 범인을 내놓아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래서 지금 경찰에 잡혀가기 싫어서 여기 온 거요? 우리가 그런 건 안 도와줘.”
이풍의 질문에 김지용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살인죄로 잡혀가야 한다면 그리 할 거예요.”
“그럼 왜?”
“무림맹은 절 살려서 경찰에 내놓을 맘이 없습니다. 전 서른 명 가까이 처리했는데, 전부 무림맹의 지시였습니다. 그 사실을 제가 불었다간 무림맹은 아주 골치가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서······.”
김지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은 절 죽일 생각입니다. 죽인 다음에는 경찰에 이렇게 말하겠죠. 범인으로 의심되는 놈을 알긴 아는데, 그놈이 지내는 곳을 안다. 알려줄 테니 한번 가봐라······ 알려준 장소에 가보면 제 시체가 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증거 하나 없이 완벽하게 자살한 시체겠죠.”
“자수하고 경찰에 보호를 받는 건?”
“경찰의 보호는 믿을 수 없어요. 제가 처리한 한 명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무림공적만 치운 게 아니라 무림맹이 돈 받고서 살인청부를 지시한 것도 다 처리했는데, 그게 까발려지면 곤란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 대화를 들으며 허풍개는 연신 탄식했다.
끔찍한 놈. 더러운 놈. 사람이나 죽여대는 역겨운 새끼.
“그래서 살려달라면, 뭘 어쩌라는 거요? 무림맹에서 히트맨을 보내면 물리쳐달라고?”
“아뇨, 무림맹과 중재에 나서주십시오. 무적비비탄 대협의 제자요 절세고수인 분의 중재를 무시할 순 없을 겁니다.”
이풍은 조금 생각해보더니 물었다.
“그래서, 중재료는 얼마나 줄 거요?”
“4억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거 받곤 못 해줘. 우리 입장엔 무림맹한테 빚을 지는 일 아닙니까? 더 내봐요.”
결국 5억 6천만 원까지 받기로 한 가운데, 이풍은 무림맹에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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