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8화 (18/103)
  • 중학생 이바람 - [2]

    박성철은 익숙한 사무실 풍경을 보며 한숨 쉬었다. 결국 여기에 돌아오다니?

    박성철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엔 뭔 일 해? 요즘도 막 조폭한테 쳐들어가서 고문하고 돈 뜯고 그러나?”

    이도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날 이후론 그런 적 없어.”

    “그거 다행이네. 그래서 업무는 딱히 변한 거 없고?”

    “우리 업무? 뭐, 비슷해. 정해진 날마다 입금된 거 확인한 다음 장부에 기록하고. 돈 입금 안 되면 바로 전화해서 쪼아대고.”

    “달라진 거 없네. 그럼 월급도 똑같고?”

    “그건 엄청 올랐어.”

    “어, 진짜? 얼마나?”

    “두 배.”

    박성철은 한동안 눈을 껌벅이다가 물었다.

    “업무 내용 변한 거 없다면서 왜?”

    “우리 업무만 똑같지 이 사무소 일은 확 변했으니까.”

    “변해? 어떻게?”

    이도혁은 볼을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고······ 보면 안다.”

    *******

    복귀한 지 겨우 이틀이 지났지만, 박성철은 두 달 전과 비교해서 무엇이 변했는지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근무하던 그 사무소가 정말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많은 것이 변해있었던 것이다.

    우선, 사장 딸이 무공을 배우겠다고 툭하면 찾아왔다. 중학생 이바람은 매일 한 시간 정도 무공 교습을 받고는 히히거리면서 떠났다.

    그리고 더 중요한 변화로는, 사무소에 선물이 쌓이고 있었다.

    이런 허름한 사무소에 어울리지 않을 만치 값지고 호화로운 선물들이 여러 곳에서 오고 있었다. 그중에서 롤렉스 시계가 가장 저렴한 선물임을 눈치챈 박성철은 절로 두려워진 나머지, 그 선물들을 감히 건드려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장······ 예전 같으면 오늘치 수금은 잘 되었는지, 회계는 잘 되었는지 점검했을 이풍은 이제 그런 일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수천만 원에 관련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풍은 관련 업무를 두 직원에게 전담시키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사장 본인은 무얼 하는가?

    잘은 몰라도 이풍이 매우 즐거워 보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사무소에 종일 지루한 얼굴로 앉아있었을 그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던 것이다.

    이풍은 지금도 싱글벙글 웃으면서 웬 서양인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저리 신나는 걸까. 박성철은 이 극적인 변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서양인 남자가 떠난 뒤, 박성철은 호기심에 물어보았다.

    “대체 뭔 대화를 하신 거예요? 양키가 여기까지 돈 빌리러 온 건 아닐 거고.”

    이풍은 자랑스럽게도 대답했다.

    “스카우트!”

    “스카우트요?”

    “그래. 절세고수 무적무적자를 초빙하러 비행기 타고 왔다.”

    스카우트라니? 이도혁이 설명했다.

    “지난 두 달 동안 열 명 넘게 왔어. 미국, 명국, 일본, 호주, 베트남······.”

    “여러 나라에서 한 명 꼬시러 왔다고?”

    “어.”

    “무림인이 축구선수나 야구선수도 아니고, 그게 뭔······.”

    박성철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 본 장면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덕분에 이 사무소의 무림 고수가 거의 초능력자에 가까운 괴물이란 건 이제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알고 찾아와서 데려가려 한다니, 그건 좀 비현실적인 일 아닌가. 고수 한 명의 존재가 그리 중요한 일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이도혁이 물었다.

    “이번엔 얼마 준대요?”

    “반년 계약금으로 사백억 준댄다. 성과급으론 훨씬 더 챙길 수 있을 거라 하고.”

    박성철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뭔가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언급된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와, 그게 무슨······, 사백억이면 이번에야말로 떠나는 겁니까?”

    “못 가. 저기 동유럽까지 날아가서 경쟁조직 구성원 싹 다 담가달라는 게 조건이더라. 그런데 무적비비탄이 살인은 절대 안 하던 분이잖냐?”

    “그렇죠. 그 제자도?”

    “당연하지. 졸개들이야 대충 눕힌 다음 시베리아 탄광 같은 데 보내버리면 안 죽여도 처리가 될 거긴 한데, 두목급들까지 그럴 순······”

    너무나도 현실적이지 않은 대화여서 박성철은 자세히 캐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지독한 비현실감을 느끼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이풍은 씩 하고 웃더니 말했다.

    “너도 무공 제대로 익혀봐라. 고수가 될 것까진 없고, 그냥 어느 수준까지 익혀내서 재능만 입증해도 돼. 그러면 유망주랍시고 여러 문파에서 러브콜 날아온다? 바로 인생 펴는 거야.”

    무림인들 사이에서 몸값을 책정한다더니, 국내외에서 대규모 시장이 형성된 모양이다.

    메이저 스포츠처럼 대기업이 후원하는 것은 아닐 텐데 대체 무슨 수로 수백억대의 돈이 오갈 수 있는 것일까. 정확히는 몰라도 온갖 금지된 것들, 피와 마약과 그만큼 불법적인 것들이 그 돈과 교환되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갑자기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 보니 이 개월 전 깡패를 두들긴 것보다도 훨씬 위험한 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다시 때려치우고 뛰쳐나가야 하는 것일까.

    갈등하면서 박성철은 그날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또 다른 손님이 사무소에 찾아왔다.

    손님을 맞이하고자 나선 박성철은 당황했는데, 이번에도 서양인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이것만 해도 꽤나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번 손님은 중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금발 소녀이기까지 했다. 이건 또 무슨?

    “헬로?”

    박성철의 말에 소녀가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한국말 잘하시네. 여긴 뭣 하러 왔어요?

    “스카우트하러 왔는데요.”

    이 금발 여자애도 무림인인가. 박성철은 반쯤 질린 기분으로 사장을 불러왔다.

    놀랍게도 이풍은 이 조그만 소녀를 상대로도 성의껏 대응했다.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지금까지 찾아온 사람은 많은데 아직 일 승낙은 거의 안 했죠. 자, 그럼 들어가서 자세한 얘기 나누죠······”

    이풍이 뒤돌아서서 손짓했지만 금발 소녀는 씩 웃고만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 자리에 계속 서있자 이풍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랑 얘기 안 나눌 겁니까?”

    “응. 직접 만나 뵙고 스카우트하고 싶어서요.”

    “제가 매니저 같은 건데?”

    “그래두.”

    이풍은 당황하며 설명했다.

    “아가씨, 미안해요. 일단 계약금이랑 계약 목적 먼저 말씀해주시면 내가 검토하고서 전달할 거야. 그 다음에야 만나는 거 가능해요. 직접 만나겠다고 침술원 쳐들어가는 건 절대 안 되고요. 설마 그 양반이 직접 때리진 않겠지만 막 째려보고 살기 풍기고 그럴걸요?”

    금발 소녀는 대화로 설득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가방을 통째로 내밀더니 말했다.

    “이건 인사비예요.”

    가방의 지퍼를 살짝 열어본 이풍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물었다.

    “아가씨, 어디서 왔소?”

    “이만큼 드려도 안 돼요?”

    “어디서 왔냐니까······?”

    “에이, 까다롭네.”

    다음 순간, 이도혁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소녀가 웃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주름이 지더니, 그 주름과 피부가 물결쳤다.

    그리고 새로이 그녀의 얼굴을 뒤덮은 화사한 외모, 한 번 보고서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을 이도혁은 기억하고 있었다.

    두 달 전 그 장례식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 모인 무림인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사진이 걸려있던 소녀, 무림의 공적······.

    이풍은 이를 악물더니, 이도혁과 박성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녀가 말했다.

    “내보내도 돼요.”

    그리고 이풍이 외쳤다.

    “너희 나가.”

    이도혁은 주저했고, 박성철은 뭐가 뭔지 몰라도 위험한 일이 벌어졌음은 짐작하고 긴장했다.

    이풍이 다시 고함질렀다.

    “빨리 나가!”

    *******

    “안녕, 선생님? 이번에 절세고수 된 거 축하해요. 만나 봬서 정말 반갑고요!”

    허풍개는 자칭 마교의 수괴를 보며 신음했다.

    마교라니. 무협 소설에서나 보던 그것을 한국에서 접하게 될 줄이야.

    마교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림 결사 아닌가.

    한때 무림의 공적으로 취급받았던 마교는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주도했다. 그 애국적인 공적에 힘입어 명나라 무림의 맹주가 되더니, 현대에 이르러서는 명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만약 이곳이 명국이라면 그들은 별로 위험하지 않았다. 명국에서 백련교는 많은 신도들을 거느린 거대 종교다. 그곳에서 백련교도들은 고아원을 운영하거나 자선활동을 하는 등 메이저한 종교가 할 법한 일들을 했다.

    하지만 명국을 벗어난 다른 땅에서, 마교는 그 어떤 조직보다 위험한 결사였다.

    마교도들은 잔인하면서 강력했고, 무엇보다 국가권력이 나서더라도 쉽게 뿌리뽑히지 않았다.

    원나라 시절부터 금교(禁敎)로 지정되었지만 기어이 살아남은 비밀결사 아닌가. 그 옛날부터 전수된 백련교의 노하우는 지금까지 전해지며 발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편전쟁 시절 영국에 잠입한 마교는 지금도 공공연히 영국인들에게 아편을 팔아치우고, 사람을 납치하거나 살해하고 있었다. 수십 차례 군경이 토벌에 나섰음에도 그들은 아직도 영국 땅에서 멀쩡히 활동하며 오랜 보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교가 일단 그 땅에 자리 잡으면 결코 몰아낼 수 없음을 증명했다. 때문에 일단 마교가 자국에 진입하려 시도하면, 그 나라의 경찰과 지하 조직들은 모두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는 마교가 자기네 땅에 자리 잡기 전 쫓아내려 애썼다.

    그 거대하고 위험한 조직의 수괴라면, 당연히 끔찍하게 위험한 인사일 것이었다.

    그러나 허풍개가 당장 보기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화사한 외모야 위장이라 치고, 그 내면조차도 썩 위험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라나 레반도프스카가 말했다.

    “라나예요. 이건 제 애검인 목혼(木魂)이고요. 목혼아, 인사해!”

    그녀는 자기가 든 나무 지팡이(아마도 소드 스틱일 것이었다)를 기울이더니 히죽 웃었다.

    무해하다 못해 모자라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를 노려보다 말고, 허풍개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저 소녀의 몸에 깃든 기(氣)를 보았다······.

    그녀의 기는 별로 많아보이지 않았다.

    진정한 고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라느니, 그 기가 숨겨지는 법이라느니 하는 얘긴 꽤나 들어봤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허풍개가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정말 체내에 흐르는 기를 숨길 방법이 있다면 뭐하러 깡패 노릇이나 할 것인가. 우월한 신체능력과 반사신경을 이용해 스포츠에 진출해서는 트로피를 싹쓸이하고 챔피언 자리를 지키며 떼돈을 벌면 될이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게 하는, 기공(氣功)을 통한 도핑을 금지하는 스포츠계의 규정을 이 소녀는 쉽게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딱 평범한 소녀가 가지고 있을 법한 기가 그녀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허풍개는 의심했다. 무림맹 천치들이 뭘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아이는 그냥 외모를 내세운 얼굴마담은 아닌가.

    쓸데없이 나무 지팡이를 기울이길 반복하던 라나가 말했다.

    “목혼이도 반갑대요. 얘가 낯 가리는 앤데, 신기하네?”

    장난질을 오래 받아주고 싶지는 않았다.

    허풍개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천마시라고?”

    “그래요, 제가 천마예요.”

    라나가 웃으며 물었다.

    “천마가 뭔지 아나요?”

    허풍개는 뚱하게 대답했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아닙니까. 명교도들의 우두머리로 나오던가요.”

    “맞아요. 천마의 뜻은 아나요?”

    “불교에서 말하는 마귀지요.”

    “아니에요. 천마는 당연히······”

    라나가 웃으면서 뜸을 들였고, 허풍개는 슬슬 짜증마저 느끼며 물었다.

    “당연히?”

    라나가 말했다.

    “당연히, 천재 마법사의 줄임말이죠!”

    뒤에서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무림맹에 연락할 준비를 하던 이풍이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이런 건 천마가 아니야.

    허풍개는 평소 무협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저 끔찍한 선언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가 정말 마교도가 맞기나 한지, 과연 고수이기나 한지 의심스러워하던 중이었다.

    “그럼, 마법 보여줄까요?”

    라나는 그리 묻더니,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이상한 단어를 발음했다.

    “화이아 보ー루!”

    이도혁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허풍개가 이제야말로 짜증내려던 그때였다.

    여기 모인 그들의 눈동자에 불꽃이 깃들었다.

    화구(火球)가 피어올랐다.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키고 피어난 화구는 방을 순식간에 덥힐 만치 거대하고 뜨거웠다.

    소녀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화구의 정체를 허풍개는 알아보았다.

    삼매진화의 불꽃이다. 절세고수의 증거 중 하나였다.

    그 조화를 실제로 본 것은 두 번째였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충격적이었다. 비현실적이어도 너무 비현실적이었던 것이다.

    손가락 끝에서 스파크를 튀길 수 있게 된 허풍개가 보기에도 그러했다.

    허풍개의 스파크는 나름대로 현실적인 규모였다. 건전지에 무언가를 마찰시키면 만들어낼 수 있을 법한 에너지였다.

    그러나 지금 소녀의 손가락 끝에서, 아예 보이지도 않던 그녀의 기는 대량의 연료를 연소시켜야만 얻을 수 있을 막대한 에너지가 되어 모두의 앞에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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