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7화 (17/103)

중학생 이바람 - [1]

장례식으로부터 두 달이 지난 오늘, 이도혁은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존경하는 무적비비탄의 제자에게서 탄지공을 교습받았다. 두 달 전부터 꾸준히 그래왔다.

놀라운 행운이지만 끔찍하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도혁은 무적비비탄의 제자를 보았다.

자신과 동년배로 보이지만 실은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청년. 그가 무적비비탄의 제자요 생각 이상의 고수라는 것도 알았지만, 무적비비탄을 능가하는 고수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풍이 말했다.

“이야, 너 진짜 이 사무소에 잘 들어왔다. 무림맹이 인증한 절세고수한테 무공을 공짜로 배워? 이거 재벌가 자녀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인 거 알지?”

그렇다, 절세고수다. 한국에 셋밖에 없던 경지의 고수.

그날의 비무가 끝난 뒤, 그 손끝에서 일어난 스파크를 보고서 모여있던 무림인들은 좋든 싫든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 와중에 무림공적과 그 표결에 관련된 이야기는 흐지부지 사라졌다. 다름 아닌 절세고수의 탄생 아닌가. 그것은 전국 무림이 기념해야 할 경사였다.

무림의 전설로 통하는 무적비비탄도 절세고수로 쳐주긴 했지만 그 경지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적은 없지 않은가. 그 사실만으로도 이도혁은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새로운 절세고수가 그 앞에서 절세의 무공을 보여주고 있었다.

BB탄이 허공을 날아가더니 갑자기 뚝 하고 떨어져 아래의 표적에 명중했다. 일부러 속도를 줄여 눈에 보이는 속도로 날렸다. 덕분에 그 과정을 똑똑히 보고서 기겁할 수 있었다.

허풍개가 설명했다.

“원리 자체는 대단할 것 없어요. 야구만 해도 투심이니 포심이니 너클볼이니 구종이 다양하지 않습니까. 회전만으로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그걸 BB탄으로 구현한다고 상상하며 연습하세요.”

이도혁이 중얼거렸다.

“저번에 본 건 야구를 넘어서 거의 유도탄이던데? 쳐내도 돌아오고 그걸 쳐내도 다시 돌아오고······”

“그건 상대방이 어디로 피하거나 어떤 각도로 쳐낼지 예상해서 가능했던 겁니다. 진짜배기 고수를 상대론 못 그래요.”

남의 동작을 완벽하게 예상했다는 것부터가 황당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손가락 끝에서 전기도 뿜는데 미래 예지를 못할 건 또 뭔가.

“그 틀딱도 고수 아니었나? 고진철인가 하는······.”

“별로 대단한 고수가 아니었죠. 요즘에야 고수가 귀해져서 그 정도 수준이어도 대충 고수라 치는 거지. 일제강점기였으면 잘 쳐봤자 하수만 벗어난 수준으로 쳤을 겁니다. 그 인간을 가지고 논 건 썩 잘난 일이 아니었고.”

“글쎄, 난 아무리 봐도 그때 본 걸 흉내낼 엄두도 안 나는데······.”

“일단 노력해보고 나서 말해요. 애초에 제 스승도 별로 천재가 아니었지만 노력해서 익혀냈습니다.”

남들은 하고 싶어도 따라하지 못하는데 그걸 해내는 게 천재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도혁은 그리 반박하고 싶었지만 배우는 입장에 말대꾸하긴 뭐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무공 교습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도혁은 동경하는 무림 영웅의 기술을 배운다는 기쁨보다는 무기력함이 늘어나는 걸 느꼈다.

괜히 절세의 무공이 아니었다.

허풍개가 시범을 보이고자 간단하게 보이는 동작마저도 이도혁은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언젠가 비슷하게나마 해낼 수 있으리란 기대조차 할 수가 없어서, 이 모든 것이 자신과 상대의 시간을 쓸모없이 소모하는 헛짓거리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자신의 시간이야 물론 낭비해도 되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시간, 그것도 절세고수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건 너무 죄스러운 일 아닌가. 요새는 아예 죄책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두 달이나 배워왔지만 이도혁은 왜 저 절세고수가 자신을 무료로 가르쳐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풍의 제자라서? 하지만 그게 뭐 그리 신경 써줄 만한 위치란 말인가······.

그때 이풍이 말을 걸어왔다. 이풍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었던 이도혁은 기겁했다.

“어, 잠깐만. 너희 좀 쉬다 하자. 저기, 절세고수님?”

허풍개는 이풍을 째려보며 대답했다.

“왜요.”

“무공 교습 받는 사람 하나 더 늘면 민폐인가?”

“아뇨. 왜, 배우고 싶단 사람 더 있습니까.”

“응. 다름이 아니라······.”

이풍이 뒤돌아서서 손짓했다.

다음 순간, 이 자리에 나타난 누군가를 보고서 허풍개는 눈을 크게 떴다.

중학생쯤 돼보이는 소녀가 밝게 웃었다.

“안녕!”

*******

“사장님 딸이라고요?”

이도혁의 물음에 이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딩인데 벌써 이쁘지 않냐? 마누라 닮아서 아주······ 우리 절세고수님도 쟤 알지? 내가 평소에 이런저런 얘기 해줬으니까······.”

“예, 뭐.”

물론 잘 알았다. 이풍의 외동딸 이바람. 저 소녀가 네 살일 적에는 부부가 여행을 떠났을 때 며칠이나마 대신 돌봐주기도 했지 않은가.

심지어 여덟 살일 때는 기가 잘 통하도록 임맥(任脈)을 손수 뚫어주기까지 했다. 무림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허풍개는 저 소녀의 대부라고 할 수 있었다.

이풍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인사해!”

허풍개는 떨떠름하게, 그러나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바람 양. 만나봬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바람이 웃었다. 도적처럼 생겨먹은 아비와 전혀 닮지 않은 딸이었지만 그 웃는 모습만은 놀라울 만치 비슷했다.

“와, 나 사람 이름 뒤에 ‘양’ 붙이는 거 처음 들었어! 남자 이름 뒤에는 군 붙여서 불러요? 그건 좀 씹덕 같은데······”

“아뇨.”

“왜 존댓말 써요? 아빠가 사장님이라서 그래?”

벌써 친한 척 달라붙는 것이 허풍개로서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늙은이의 모습일 때는 자길 대하는 걸 상당히 어려워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이풍이 끼어들었다.

“아냐. 이 친구가 니 아빠 천 명은 줘팰 수 있는 고수야. 아빠도 이 친구한테 못 깝치니까 거들먹거리지 마라, 응?”

이바람이 눈을 반짝였다.

“어, 그럼 오빠가 무적비비탄 할아버지 제자예요? 오빠가 무적무적자 맞아?”

무적무적자(無敵無籍者). 새로운 절세고수에게 붙은 별호였다.

무적의 경지를 지녔으면서 특정한 단체에 소속돼있지 않다(無籍)는 이유로 그런 별호가 붙었는데, 결국에는 ‘무적’을 두 번 붙인 말장난식 별호였다. 지나치게 근사하고 웅장한 별호를 붙였다간 서로 부를 때 창피하단 이유로 요새는 다 그리 짓는다던가?

“부친께서 저에 대해 얘기했습니까?”

허풍개가 물었고 이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와서 무공 배우라던데? 그리고 왜 자꾸 존댓말 해요? 반말 써!”

“음, 그래. 그래서 무공을 배우고 싶다면, 태극권 배우려고?”

“아니? 태극권은 아빠한테서 배우니까 됐고, 그거 가르쳐줘. 탄 어쩌고······”

“탄지공?”

“어, 그거!”

이건 또 당황스러운 요구였다. 탄지공을 왜?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정말 뭔가 가르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몇 가지 시범을 보여줬더니, 이바람은 이런 식으로 탄성을 토해냈다.

“와 씨, 뉴턴이 이거 보면 지옥에서 울부짖겠다······.”

그렇듯 무공을 배우겠다고 온 그녀의 태도는 심히 장난스러웠지만, 어쨌건 허풍개의 무공에 흥미가 있어보이기는 했다.

이 또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녀의 태도가 불쾌하다거나 가르칠 상대가 늘어 귀찮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어릴 때 똥기저귀를 갈아준, 손녀 같은 아이와 어울리는 일이 썩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허풍개가 당황한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녀의 아비 말이다.

“그럼, 잘 놀았어요! 오빠들 열심히 일해!”

이바람이 떠나간 뒤, 허풍개는 이풍에게 말했다.

“저 좀 봅시다.”

이풍은 억지로 웃으면서 허풍개를 따라갔다.

둘이서 다른 방에 들어섰다. 허풍개는 문이 잘 잠겨있다는 걸 확인한 뒤 물었다.

“왜 데리고 왔니.”

이풍이 대답했다.

“그거야 뭐, 절세고수님한테서 무공 배우라구······”

“그걸 굳이 깡패 소굴에서 배워야 하나?”

“척 보기에 깡패 같은 박성철이도 때려치고 나갔겠다, 비쥬얼적으로 나아졌지 않아요?”

“미쳤냐.”

“아니, 왜······”

이풍의 얼굴은 태연해 보였지만 허풍개는 그가 태연한 척하고 있음을 알았다.

허풍개가 물었다.

“이풍 너, 그 애한테 무공 가르치니?”

“예, 몸 건강해지라구요. 태극권이 그 뭐냐, 도가에서 말하는 도인(導引)? 그거잖아요. 단순히 수련하기만 해도 수양이 되고 몸이 건강해지는······.”

“영약도 몸 건강해지라고 먹인 거고?”

“그렇죠.”

“영약 수억 원를 단순히 건강하라고 먹였어?”

그 말에 이풍은 기겁했다. 이 괴물 같은 늙은이, 대충 기(氣)만 보고서도 돈 얼마나 썼는지 다 아는구나.

“예.”

“너 딸아이 위해서 돈 벌어야 한다더니, 그거 다 영약 사먹이려고 그랬구나. 그런데 영약을 주느니보단 그 돈을 직접 주는 게 더 나을 건데.”

“돈이야 나중에 따로 물려주면 되고, 일단은 건강이 우선 아니요?”

“그래서 탄지공은 왜 배우란 거냐. 그건 도교랑은 쥐뿔도 상관없어서 익혀도 건강에 도움 안 되는 거 알지 않나?”

“호신용으로······”

“익히는 데만 수십 년 걸릴 걸 호신용으로 가르치라고?”

“운 좋게 재능 있어서 배우면 좋잖아요?”

허풍개가 눈매를 좁혔다.

“지랄 말고 똑바로 말해. 너 이 씹새끼, 딸을 무림인으로 키우려는 거냐?”

이풍은 대답하지 않았다. 허풍개는 그것을 무언의 긍정으로 해석했다.

“미쳤나?”

“미쳤긴요.”

허풍개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애비가 깡패라고 새끼도 깡패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요?”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네 딸이라고 네 소유물이니?”

“아, 씨. 그게 아니라······.”

“네가 싸질렀으니까 네 가축이고 노예야? 왜 걔 진로를 네가 멋대로 정하니? 심지어 의사나 판검사도 아니고 무림 깡패를 시키겠다? 네가 그러고도 애비냐?”

허풍개는 평소에 평정을 유지하고자 일부러 고저 없는 말투를 사용하곤 했다. 그러는 것도 다 도가적 수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목소리의 고저가 확실한 지금은 마음의 평정이 깨졌음을, 수련조차 중단할 만큼 분노했음을 의미했다.

이 분노를 어떻게 달래야하는가? 이풍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풍이 조금 뜸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진정해요, 아버지.”

허풍개가 눈을 흘겼다.

“누가 니 애비냐?”

“일곱 살 애새끼 주워서 쭉 키워줬음 그게 아빠지 뭡니까. 솔직히 아버지라 불리면 늙어 보인다고 형님이라 부르라는 게 이상한 거 아니요?”

“스물다섯까지 반말하던 새끼가 이제 와서 뭔······.”

감정에 호소하는 수작이 먹힌 듯했다. 허풍개의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진 걸 눈치챈 이풍은 서둘러 말했다.

“아무튼 왜 그리 화났는진 이해합니다. 제가 고수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딸이라도 고수로 키우려고 그런다, 뭐 이런 생각 하시는 거죠?”

“아니냐?”

“절대 아닙니다.”

“그럼 왜 무림 깡패를 시키려는 건데, 새끼야.”

“일부러 시키려는 거 아닙니다. 난 강요한 적 없어요. 사실 무림인 되라는 말 한마디도 안 했어. 그냥 학교에서 인기 짱 되라고 무공만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러면서 무림 얘기는 딸한테 왜 해주는데?”

“그런 얘기 해준 적 없······”

“탄지공 가르쳐줄 때 들어보니까 이미 무림맹 대회가 열렸다느니, 절세고수 무적무적자가 탄생했다느니 걔가 다 알고 있드만.”

이풍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요, 조금 흥미 가지게 유도하긴 했죠.”

“이 씹새끼가.”

“하지만 그게 답니다. 대학 가고 싶다면 사교육 잔뜩 시켜줄 거고 사업하고 싶다면 대출받아서라도 지원해줄 거요. 애가 뭘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다 허락해줄 거라고.”

“그러다 아비 영향으로 무림 데뷔하겠다면 안 말릴 거고?”

“말릴 건 또 뭡니까?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야죠.”

“지랄. 애새끼가 깡패 되겠다는데 안 말리면 부모로서의 책임 회피지.”

“아니, 깡패가 되면 안 될 건 또 뭡니까?”

허풍개의 살기 어린 표정을 본 이풍은 서둘러 부연했다.

“알아요, 뭐 말하고 싶은지 알아. 딸이라도 제대로 된 일 하면서 살게 하라는 거겠죠. 아버지가 저만 해도 좋은 대학 보내서 좋은 직장 다니게 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결국 대학 못 가고 깡패짓 하는 꼴통 새끼가 딸도 꼴통 만들려는 거 같으니 영 미친놈 같은 거죠?”

“잘 아네. 알면서 왜 그랬냐?”

이풍이 웃었다.

“난 깡패 돼서 만족해요.”

“뭐?”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구! 한 달에 천만 원 넘게 버는 것도 좋고 가끔 좆같은 새끼들 걸리면 조져주고 삥뜯는 것도 너무 좋아요.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새끼가, 그게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딸도 시키려 그러냐?”

이풍이 한숨 쉬었다.

“아버지는······”

“형님이라 불러.”

“예, 다시 말하지만 형님이 말하고 싶은 건 설명 안 해도 다 알아요. 양지가 최고다 이거지. 하지만 양지 일이라고 즐겁고 행복합니까? 절대 아니죠. 생각해봐요. 무림인들끼리 싸우다 죽는 일이 많습니까, 간호사 된 젊은 애들이 태움 당해서 자살하는 일이 많습니까? 아니면 9급 공무원 붙었더니 혹사 당하다 관두고 우울증 걸리는 일은 또 어때요?”

“몰라, 마.”

“후자가 훨씬 많습니다. 그거 보면 무림인 노릇이 참 안전한 일이에요. 무림인끼리 서로 친목 다지기 바쁘니까 서로 죽이면서 싸우는 일도 없고.”

“요즘엔 총 맞는 놈들도 있던데?”

“뭐, 그것도 결국 해결되지 않겠어요? 경찰들이 병신도 아니고, 웬 외국계 조직에서 그런다는데 기겁해서라도 알아서 때려잡겠지 뭐.”

그때 문밖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기, 오랜만입니다. 퇴직금까지 받아서 나가놓고 이런 말씀드리긴 정말 죄송한데······ 사장님? 직원 더 구하셨나요? 혹시 못 구하셨으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이풍이 웃었다.

“와, 박성철 저 새끼 돌아왔네?”

두 달 전 그만두고 나간 전 직원, 박성철이었다. 그가 퇴직금을 건네받으며 말하길, 폭력적인 일을 경험하고는 질겁한 나머지 이제 떳떳한 일을 하며 살고 싶어졌다던가?

“왜 돌아왔대냐?”

“사회생활 해보더니 여기가 천국이었다고 깨달았나 보죠 뭐.”

그리 말하며 이풍은 다시금 웃었다.

“봐요, 양지 생활이라고 만만한 거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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