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6화 (16/103)
  • 무림맹 위원 고진철 - [3]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고진철이 말했다.

    “그 사건의 후폭풍은 끔찍했습니다. 모든 지상파에서 며칠 내내 관련 사건을 방송했어요. 건국 이후 무림에 대한 여론이 그 정도로 최악이던 때가 또 있었습니까?”

    허풍개는 당시 분위기를 기억했다. 한국 무림이 끝장나는 줄 알았지 아마.

    방송국에 쳐들어간 그때, 허풍개는 그곳에 남아있던 국민적 인기의 연예인까지 공격했다. 정치 사회 채널은 물론 연예계 채널까지 달라붙어 무림인들의 무도함을 물어뜯게 된 이유였다.

    그 당시 무림 깡패들을 미화한다는 이유로 불태워진 무협 소설이 대체 몇천 권이던가?

    “청정 운동을 벌인다면서 정치권이 움직이고, 배후 조직을 찾는다면서 경찰들이 들쑤시고······ 우리가 후원하는 의원들도 이번만큼은 경찰의 단속을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광역수사대가 제일 먼저 덮친 것은 서울의 거대한 조직들이었다. 서울의 무림인들이 하나둘씩 기소되는 가운데, 수도 밖 무림인들은 다음은 자기 차례이리라 짐작하고 겁에 질렸지만 그들의 차례는 오지 않았다.

    모든 무림을 재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았던 사회적 분위기는, 불타올랐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식어버렸다.

    예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고 알려진 연예인이 병원에서 멀쩡히 치킨을 섭취하다 그 모습이 기자에게 걸린 탓이었다.

    그렇다면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겠다, 생각보다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분위기가 새로이 생겨났다.

    자신들이 맺고 있던 무림 방파와의 연계가 정치적으로 공격받을까 봐 초조해하던 정치인들은 빠르게도 사건을 무마했다.

    결국 그 사건으로 몰락한 것은 서울의 무림 방파들뿐이었다. 수도에 있기에 가장 크고 부유했던, 또한 사람들의 눈에 가장 잘 띄었던 무림 방파들. 당장 내보일 성과가 필요했던 검사들은 방송국 습격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들을 이런저런 죄목으로 기소했다.

    고진철이 두목이었던 관악파 또한 서울의 대표적인 문파 중 하나였다. 관악파에서는 고수 넷이 온갖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수감 되었다.

    고수가 귀해진 이 시대에 그것은 문파가 반쯤 몰락했음을 의미했다.

    원래부터 무적비비탄과 사이가 좋지 않던 고진철이 그를 아예 원수로 여기게 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뻔뻔스럽게도 그 제자가 얼굴을 비췄습니다. 무적비비탄의 정식제자라더군요. 그 정식제자란 놈은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무림인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고진철이 계속 말했다.

    “감히, 뻔뻔스럽게, 그 일을 저지르고서도 다시 무림에서 활동할 생각일까요? 당시 희생된 서울의 동지들을 대표하여, 저는 절대 무적비비탄과 그 패거리의 활동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고진철은 잠시 뜸 들여 분위기를 환기시키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무적비비탄을 무림공적으로 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 제자를 위원회 본부까지 압송할 것을 주장하고요.”

    허풍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건으로 피해를 본 서울 무림인들이 배상을 요구할 것을 걱정했었다. 그래서 신분을 세탁한 것이었는데. 아예 무림공적을 삼으려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빠르게 주변 상황을 파악했다. 상황은 얼마나 끔찍한가?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덤벼들 것인가?

    새로이 절세고수가 되었건 아니건, 그 몸값을 다 합치면 항공모함 반 척을 살 수 있는 무림인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는 없다.

    하물며 여기는 이풍까지 함께 왔지 않은가. 지금까지도 내버려 둔 이풍을 굳이 지금 해칠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참에 아예 포박하고는 인질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무적비비탄이 출소할 때까지······.

    “저 양반 갑자기 왜 저래?”

    그러나 잘 보니 상황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여기 모인 무림인들은 그저 수군거릴 뿐 뭔가 행동에 나설 기색은 없었다. 무림공적이고 뭐고, 미리 합의해둔 내용이 아닌 모양이다.

    하기야 고진철이 무적비비탄의 제자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분 전 아닌가. 그 짧은 시간 동안 뜻이 맞는 위원들을 포섭해서 어찌어찌 사전공작을 마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저 얘기를 꺼내는 게 정말로 이 자리에서 또 하나의 무림공적을 지정하기 위해서는 아니야. 그저 여기 모인 무림인들에게 무림맹 위원인 자기가 무적비비탄과 그 제자에게 원한이 있으니 결코 친한 척하지 말라 경고하기 위한······.’

    예상하건대 정말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어 모두에게 공격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이대로면 무림인으로서의 활동에 지장이 생길 것 아닌가. 무림에서의 활동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영약을 구입해야 할 허풍개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사태였다.

    이 상황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고진철의 발언에 모두가 찬동하는 분위기는 아니란 것이었다.

    무적비비탄은 적이 많은 무림인이었지만 존경받는 무림의 전설이기도 했다. 그 전설을 공적으로 삼자는 갑작스러운 발표에 많은 무림인들이 거부감과 난처함을 보이고 있었다.

    과연 이 상황에 반기를 드는 아군이 나타났다.

    오은림이 앞으로 나서서 발언했다.

    “잠깐만요, 위원님? 지금 여긴 총기 사건 대응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나요? 왜 전혀 상관없는 안건을 꺼내시는 거죠?”

    고진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건의 대응은 방금 정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발언을 허락한 기억이 없습니다. 오은림 양.”

    “아까는 발언권 없이도 사람들이 막 끼어들고 그랬지 않나요?”

    “방금은 발표였으니까 질문을 자유롭게 받은 거죠. 하지만 지금부턴 큰일을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자격 없이 발언하지 마세요.”

    고진철은 슬슬 닥치라는 표정이었지만, 오은림은 그래주지 않았다.

    “전 지금 장례를 치르다 온 상주로서 발언하는 겁니다. 제 부친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이 자리에서, 그분의 죽음과 전혀 상관없는 옛이야기를 꺼내 드는 것은 고인에 대한 모욕입니다.”

    정말이지 훌륭한 지원이 아닐 수 없었다. 젊은 그녀가 늙은 위원에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이 상황을 고깝게 볼 만도 하건만, 그녀를 노려보거나 제지하려는 무림인은 별로 없었다. 불쾌감을 표시하는 무림인도 딱히 없었다.

    그것을 눈치챈 고진철은 이 상황을 불쾌해했다. 그 언성이 높아졌다.

    “난 국밥 먹다 총 맞은 무명소졸이나 애도하러 온 게 아닙니다. 난 무림의 공적을 응징하러 여기 왔어요. 이건 그 연장이고!”

    충격적인 발언에 오은림의 몸이 굳었다. 그 몸이 분노로 떨리기 시작했다.

    오은림은 떨리는 입술을 열어 뭔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분노 어린 생각은 당장 말이 되어 흘러나오지 못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곳곳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저 새끼 저거 노망 난 거 아이가!” “고진철 저 종간나 새끼, 불쌍하다고 위원 자리 앉혀놨더니 눈에 뵈는 게 없다!”

    고진철의 관악파는 한때 무림맹 위원을 도맡아 할 만치 거대한 문파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문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고진철이 위원 자리는 받아내었으나 그뿐이었다.

    오가장과 친분이 깊은 인천의 무림인들은 이 상황에 참지 않고 오은림을 편들었다. 심지어 인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무림인들까지 고함질렀다.

    어지간해서는 침묵을 지켰을 법한 거물까지 입을 열었다. 하기야 고인 모독을 참기는 어려운 법이다.

    “고진철 씨, 같은 고씨 망신 그만 시키고 내려오소!”

    허풍개는 그리 발언한 남자를 보았다. 몸값이 천억이나 되기로 유명한 배 나온 중년, 그 별호가 국뽕대협(國峰大俠)이던가? 이번 일을 기억해두고 나중에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그래서는 안 되었다. 비굴하고 나약해 보일 테니까.

    앞으로의 활동을 고려할 때, 지금 허풍개가 해야 할 행동은 따로 있었다.

    고진철의 말실수로 사람들이 분노하는 지금이 바로 행동할 기회였다.

    “소가주님.”

    오은림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허풍개는 분노와 서러움이 뒤섞인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허풍개가 말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저놈을 손본다면 말입니다. 그걸 장례 중에 난동을 일으키는 셈이니 고인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미 고인을 모독한 저 씹새끼를 응징하는 것으로 여기시겠습니까.”

    오은림은 울음을 참으려는 듯 조금 뜸 들이더니 겨우 말했다.

    “후자로 생각하지요. 저부터가 당장 그러고 싶으니까.”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주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더는 거리낄 것 없었다.

    허풍개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자신을 소개했다.

    “제가 무적비비탄의 제자입니다.”

    이 상황의 주인공이 등장하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존경하는 위원님. 그리고 무림 동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허풍개는 그들 앞에서 평탄한, 그러나 모두에게 들릴 만큼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번거로우시게도 무림공적을 삼기 위해 표를 던지고 말고 할 것 없습니다.”

    고진철은 방금 말실수가 일으킨 사태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너 이 새끼, 안 닥치나!”

    허풍개는 그 사자후를 무시하고 말했다.

    “더 전통적인 방식을 제안합니다. 고진철 위원. 내 스승에게 불만이 있습니까.”

    “있으면 어쩔 거냐, 새끼야!”

    “그렇다면 손수 응징하십시오. 기회를 줄 테니.”

    허풍개가 주머니에서 흰 면장갑을 꺼냈다. 그것을 뭉쳐서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튕기듯이 내던졌다.

    흰 면장갑은 단상 위 고진철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어, 저거······”

    눈썰미가 좋은 무림인들은 그 면장갑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1980년대 기준 1250원짜리 고급 면장갑일 뿐이지만 한국에서만은 그 어떤 무림 기보보다 유명한 장갑이었다. 무적비비탄이 공장에서 수십 박스를 사다가 창고에 넣어두고 쓰기로 유명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면장갑의 용도는 크게 세 가지였다. BB탄에 지문이 묻지 않게 하거나. BB탄을 튕길 때 가해지는 마찰을 줄임으로써 위력 또한 크게 줄이거나. 혹은 상대방에게 던져서 서양식으로 결투를 제안하거나.

    지금 이 경우에는 두 가지 용도가 동시에 쓰였다.

    “무림인답게, 단련해온 무공을 보이십시오. 도전을 받아주겠습니다.”

    지금 허풍개는 비무(比武)를 제안하고 있었다.

    비무에 나서기 위해, 허풍개는 여벌로 챙겨온 장갑을 손에 착용했다. 무적비비탄은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는 싸움에서 언제나 이 장갑을 착용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유명해진 뒤로는, 당장의 싸움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장갑을 착용하곤 했다.

    과연 고진철도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 주름진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가운데, 허풍개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미리 넣어둔 BB탄은 넉넉했다.

    비무에 나설 준비가 끝났다.

    *******

    무적비비탄의 탄지신공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공 중 하나다.

    작은 돌이나 바둑알 따위를 날리는 탄지공은 예로부터 많은 무림인들이 기습용으로 익혀온 무공이지만, 무적비비탄이 사용하는 탄지공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만의 기술이다.

    무적비비탄이 보이는 도탄과 위력을 보며 무림인들은 경악하여 떠들어대곤 했다. 저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것이냐. 저것도 충분히 마법 같은데 그냥 절세고수로 쳐야 하는 게 아니냐.

    그렇듯 워낙에 유명한 무공이라 약점도 파악된 지 오래였다.

    무적비비탄이 BB탄으로 펼치는 탄지신공은 그 말도 안 되는 도탄과 빗나감 없이 경혈을 노리는 정확도가 무서울 뿐, 어쨌건 플라스틱 BB탄을 튕길 뿐인 무공이다.

    0.1g짜리 플라스틱에 맞아봤자 뭐 그리 아프겠는가? 그러니 미리 단단히 껴입거나 주요부위에 명중하는 일만 피한다면 그렇게 무서운 위력이 아니다.

    또한 무적비비탄이 장갑을 착용할 상태에서 날리는 BB탄의 탄속은 172km/h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야구에서 강속구의 속도보다 좀 더 빠른 수준으로, 일반인들도 연습을 반복한다면 힘겹게나마 쳐낼 수 있는 속도다.

    반사신경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무림인들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쳐낼 수 있는 속도이기도 하다.

    고수일수록 반사신경이 뛰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진철은 고수였다.

    그는 평소 무적비비탄과 싸울 상황을 대비해 평소에도 작은 물체를 칼로 쳐내는 연습을 해왔다. 진짜 무적비비탄과 싸울 때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싸움을 이어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그 제자와 맞붙는 것임에야?

    허풍개는 저 앞에 서 있는 고진철을 보았다.

    아까는 길길이 날뛰던 것이 거짓말인 듯, 지금 그 표정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아까야 젊은 허풍개의 건방진 자세에 욱했지만, 이 상황이 자신에게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듯했다.

    대충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면 방금 망신당해 깎여나간 체면도 돌아오리라.

    그렇듯 고진철이 어찌나 자신감이 넘치는지, 원래 무림인들의 비무는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법이지만 이번만큼은 모두가 지켜보도록 하자고 고진철이 요구했다.

    허풍개가 동의했으므로, 무림인들은 외곽에 서서 둘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고진철이 말했다.

    “심판 같은 거 필요한가?”

    “아뇨.”

    말이 짧았다. 고진철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불쾌감은 금세 사라졌다.

    고진철은 호흡을 골라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그것만으로도 고수의 풍모가 엿보였다.

    고진철이 말했다.

    “그럼, 선수(先手)는 양보할 테니 어서.”

    허풍개는 사양하지 않았다. BB탄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 비겁한 기습처럼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그것을 비무의 상대방과 여기 있는 모두에게 내보인 다음, 손가락을 튕겼다.

    BB탄이 허공을 날았다.

    172km/h로 비행하는 조그만 플라스틱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고진철은 과연 고수였다. 칼을 휘둘러 그것을 쉽게도 튕겨냈다. 탁.

    튕겨 나간 BB탄은 바닥에 맞았다. 탁.

    그리고 또 다시 튕겨서는 허공을 날았다. 다시, 방금 자신을 거절한 고진철을 향해서.

    이미 쳐냈던 BB탄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걸 본 순간, 고진철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이 말도 안 되는 도탄이야 익숙하다. 무적비비탄의 탄지공 아닌가. 스승의 기예를 제자가 똑같이 재현하는 건 놀랍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튕겨낸 BB탄이 자신에게 똑바로 날아오다니? 그것은 자신이 어느 위치로, 어느 각도로 칼을 휘두를지 미리 알아야 가능한 일 아닌가.

    그러니까 방금 자신의 동작은 고스란히 읽힌 셈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고진철은 경악 속에서 얼굴을 노리던 BB탄을 또 한 번 튕겨냈다.

    그리고 허풍개는 또 하나의 BB탄을 날렸다.

    공기 갈라지는 소리가 작은데도 스산했다.

    고진철은 대각선으로 돌격하고자 땅을 박찼다. 그로써 전진과 회피를 동시에 이루어내려고 했는데, 그 의도는 한 발짝 내딛자마자 포기해야 했다.

    방금 튕겨낸 BB탄이 또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발 디딘 그곳으로.

    고진철은 황급히 물러나며 또다시 칼을 휘둘러 방어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허풍개는 전진을 시작했다. 허둥거리는 고진철을 향해서.

    이때 거리를 좁히기 위해 허풍개는 땅을 박차지 않았다. 뛰거나 빠른 걸음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어서 접근하면서 손가락으로는 플라스틱 BB탄 한 알씩을 튕겼다.

    고진철은 용케도 그 모든 것을 막거나 피해냈지만 감히 반격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기어이 허풍개가 그 앞에 다가왔다.

    고진철은 이를 악물더니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기로 했다. BB탄 몇 개가 몸에 맞더라도 상대를 먼저 쓰러뜨리면 이기는 것이다.

    “개자식이!”

    그 칼끝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뻗어왔다. 신속하기 그지없는 백사출동(白蛇出洞).

    그것을 허풍개는 왼손의 검지와 중지로 검신을 잡아서는 옆으로 치워버리더니 훤히 드러난 그 상반신을 오른손 검지로 찔렀다.

    멀리서 보던 무림인들은 고진철이 경혈을 찔렸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의아했는데, 고작 점혈을 당했다고 보기에는 고진철의 반응이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고진철이 무릎 꿇더니, 전기충격기에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마구 떨었다. 그 얼굴에서는 콧물과 침이 마구 흘러내렸다.

    비무가 끝났다.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오은림은 분노한 와중에도 아연함을 느꼈다.

    켜두었던 스톱워치를 보았다. 비무 시작으로부터 21초가 지나있었다.

    한편 무림인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고진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추한 패배자가 되어버린 고진철은, 그 수양에도 불구하고 이 굴욕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외쳤다.

    “반칙이야!”

    웬 무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요, 뭔 반칙?”

    “방금 가슴이 찌릿했어. 전기충격 당했단 말이다!”

    “전기충격기를 썼다고요? 그런 거 안 보이는데요. 그냥 손가락으로 찌르기만 한 거 같았는데.”

    “작은 장치! 작은 장치를 썼겠지! 눈에 잘 안 보이는!”

    고진철의 주장에 따라 무림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허풍개는 고진철과 오은림을 번갈아 보았다.

    우선 고진철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고진철, 저 병신 같은 늙은이.

    그리고 오은림을 보면서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주최한 장례식을 더 망치게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방금 ‘전기’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이풍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더랬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바라던 상황이 전개되리란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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