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위원 고진철 - [2]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무림인들이 식장에 발을 디뎠다.
이풍은 찾아온 무림인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다가 허풍개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님, 무림맹에서도 사람들 왔어요.”
“그러네.”
“가서 자기소개 안 해요?”
“자기소개? 그걸 왜?”
“얼굴 팔아야죠. 자연스럽게 무적비비탄의 제자를 알려야 할 거 아닙니까.”
허풍개는 조용히 성냈다.
“여기서 무림 데뷔하자고?”
“예, 뭐······.”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다.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떴다 하면 장례고 뭐고 그 자리에서 슈퍼스타가 탄생하겠구나. 사람들이 상주는 내버려 두고 다 나만 쳐다보겠어. 주목 잘 받게 상복 찢어버리고 하와이 셔츠나 입고 올 걸 그랬지 뭐냐.”
“아, 비꼬지 마요.”
“하여간 철없는 새끼.”
허풍개가 더 욕하기 전에 이풍은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투덜거리며 구석에 서 있던 와중이었다.
이풍을 알아본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풍, 자네는 여기 뭔 낯짝으로 왔는가?”
이풍도 말을 건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씹새끼도 여기 왔나?
고진철. 오 년 전까지는 서울의 관악파(冠岳派) 문주였던 인물이었다. 이풍에게는 ‘씹새끼’로 통하는 늙은이이기도 했다.
“못 올 게 뭐요? 불만이라도 있나?”
이풍의 말에 고진철이 코를 막는 시늉을 했다.
“불만, 있지 물론. 좀 씻고 오지 그랬나?”
“나 지금 땀내 나요?”
“똥내가 나네. 쟁쟁한 고수들 사이에 똥쟁이 하나가 끼어있으니 똥내가 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지 않은가.”
이풍은 겨드랑이 냄새를 맡다 말고 한숨 쉬었다.
‘똥쟁이’란 무림인들 사이의 모욕 중 하나다. 비싼 영약을 똥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의미인데, 수련 과정 중 재능을 보이지 못해 낙오된 무인 아니면 하수를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다.
“하여간 나이 헛으로 처먹은 영감탱이. 장례식에서도 시비네.”
“무림 선배한테 말버릇이 그게 뭔가. 자네 형님이 그따위로 가르치던가?”
“선배는 지랄. 내 형님의 무림 배분을 생각하면 그 제자인 난 당신 조부쯤 돼요.”
“자네는 정식제자도 아니지 않는가? 자네가 정말 무적비비탄의 정식제자였으면 여기 성히 못 있었네.”
“정식제자였으면 뭐 어쩌려고, 사지를 분지르기라도 하려고?”
고진철이 말했다.
“그보다 더한 일이라고 못 했을까?”
이풍은 팔짱을 끼며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자기가 고인의 가족쯤 되는 것처럼 애도 중인 허풍개가 보였다.
무적비비탄 저 양반, 귀도 좋아서 다 듣고 있을 텐데 못 들은 척이다.
왜 그러는지는 알 만하다. 장례식에서 실랑이하며 애도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리라.
“아, 그래. 나 정식제자 아니니까 내버려 두쇼. 응? 설마 똥쟁이한테 손대서 똥 묻고 싶진 않지?”
이풍은 고진철을 뿌리치고서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리고 고진철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레 허풍개에게 접근했다.
“저기, 조심하셔야겠소.”
“왜.”
“고진철도 여기 왔어요. 저 양반 오 년 전에 무림맹 위원 감투 달았고 말이요.”
그때였다. 고진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친군 누군가?”
이풍은 속으로 기겁했다. 관심 끈 줄 알았더니 몰래 엿듣고 있었을 줄이야?
“아, 꺼지라고. 틀딱 새끼야.”
이풍이 욕까지 쓰며 시선을 끌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진철의 관심은 이미 이풍과 대화를 나누던 허풍개에게 가 있었다.
고진철이 허풍개에게 말했다.
“자네는 뭔데 이 똥쟁이랑 밀담을 나누나? 뭐 하는 친구야?”
허풍개는 정말로 이 자리에서 소란을 일으키기 싫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도 말했다.
“별로 깊은 사이는 아닙니다.”
“깊은 사이 맞는 거 같은데? 내가 분명 이풍 저 새끼가 존댓말 쓰는 거 들었어. 뭐 하는 친구지?”
“나중에 밝히겠습니다.”
“똑바로 말해. 이풍 저 새끼랑 무슨 관계야? 이풍 저 새끼랑 붙어먹던······ 무적비비탄 그 작자와는 무슨 관계고?”
“저는······.”
“당장 바른대로 고해. 어른이 묻잖나?”
거짓말로 상황을 넘기기는 힘들어보였다. 허풍개는 최대한 공손하게 들리도록, 조심스럽게 신분을 밝혔다.
“그분의 제자입니다.”
고진철이 눈을 부릅떴다.
“무적비비탄에게 이풍 말고 또 제자가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얼마 전까지 산에서 도 닦다가 나왔지요. 여기선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비밀로? 왜?”
“제 스승께서 꽤 유명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고인을 애도하는 자리에 잡음이 생길까 봐 걱정됩니다.”
“아, 고인을 신경쓰시겠다? 그거 별로 좋은 핑계 같진 않군.”
“제 스승께 무슨 유감이 있으십니까?”
“있지 물론.”
허풍개도 눈앞의 노인네가 예전의 자신, 그러니까 무적비비탄을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최대한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자인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이 자리가 파한 다음에 제가 찾아 뵙고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든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한 그 노력은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고진철이 윽박질렀다.
“어디서 수작질이냐? 나한테 걸렸으니 넌 절대 못 빠져나가. 이소찬? 이리 와.”
고진철의 손짓에 젊은 무림인 하나가 빠르게 달려와 그 앞에 섰다.
고진철은 허풍개를 가리키며 지시했다.
“이 자식 감시해. 이 새끼 튀면 너 나한테 죽는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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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체의 정식 명칭은 전국 무림 위원회였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냥 무림맹이라고 불렸다. 아니면 한국 무림맹이라 불리거나.
이 무림맹은 명(明)의 무림맹과는 이름만 같을 뿐, 분명히 다른 성질의 단체였다.
명의 무림맹은 소림이니 화산이니 하는 고상한 명문정파들의 회동 아닌가. 그러나 한국 무림맹은 사파(邪派)의 연합이었다. 일종의 범죄 연합체인 셈이다.
이 전국 범죄단체가 세워진 동기는 간단했으니, 바로 무림의 존속을 위함이었다.
국가권력의 힘이 막강한 선진국에서, 정부가 직접 나섰을 때 이겨낼 수 있는 범죄조직은 별로 없다. 대규모 갱단이든 마피아든 간에 군경이 제대로 나서면 배겨내기 어려운 것이다.
국제적으로 유서 깊은 범죄조직들도 국가권력을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거대한 폭력조직들은 현대에 이르러 국가의 단속 하에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한국의 무림인들 또한 국가의 제대로 된 탄압을 걱정할 만했다.
어떻게 해야 국가의 탄압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국가와 국민의 관심을 끌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면 된다.
저 위세 높던 마피아를 보라. 정부를 겁주겠답시고 반항적인 검사를 대놓고 살해했다가 오히려 전국민을 분노시켰다. 그 사건은 전국적인 반마피아 운동을 야기했다.
또한 반마피아 법안을 철회시키기 위해 교회 두 곳을 폭파한 시도는 오히려 그 법안에 대한 전국적 지지를 더욱 키웠을 뿐이다. 마피아는 일련의 사건 이후로 세력이 쪼그라들었다.
무림맹은 그와 같은 국제 범죄 조직들의 몰락에서 교훈을 얻었다.
사람들이 겁먹을 만한 행동을 벌이면, 정부는 놀라서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국민을 겁먹게 한 범죄조직들을 적극적으로 없애려 든다. 그러니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결론 하에 무림맹은 불필요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모든 행위를 금했다.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고는 그 시체가 발견되게 한다든가. 경찰, 법관, 언론인, 정치인을 살해한다든가 하는 자극적인 행동들 말이다.
만약 어느 무림인이 그와 같은 금지된 행동을 벌일 경우, 무림맹은 그자를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지정하고는 히트맨을 보내어 응징했다.
무림공적을 지정할 권한은 가장 강력한 일곱 문파의 수장이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무림맹의 위원이었는데, 고진철 또한 그중 하나였다.
장례식장에는 강당과 연설의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고진철은 그 단상에 올라 여기 모인 무림인들 앞에서 말했다.
“모두 아시다시피, 무림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상할 만치 늘어난 마약 거래를 보십시오. 숨기려는 노력도 없이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바람에 이미 여러 차례 검거됐지요.
그리고 이번 총격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심각합니다.
지금 경찰은 무림 세력의 일원이 살해당한 것이니 당연히 범인은 그 살해로 이득을 볼 다른 무림 세력이리라 지레짐작하고 있어요. 수사하겠답시고 여러 방파를 들쑤시고 있습니다.
수사 결과가 어찌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저는 벌써 두려워집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우리에게 좋은 방향은 결코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마약과 총기······, 둘 다 아홉 시 뉴스를 장식하기 충분한 이슈입니다. 국회와 청와대가 요동치게 할 이슈지요. 어떻게든 이 사태를 막아내지 못하면, 결국 여기 계신 무림 동도 절반은 교도소에 갇히고야 말 겁니다.”
연설을 듣던 누군가가 외쳤다.
“맹에서 이미 조사를 했다지요. 그래서 대체 어느 새끼들이 그러는 것 같습니까? 혹시 박 회장 짓 아니에요?”
고진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 회장, 그 무림 혐오자라면 물론 그럴 만하지요. 소싯적엔 자기가 직접 무림인들을 칼로 찌르고 패고 다니던 양반 아닙니까? 하지만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흉수는 그쪽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마교입니다. 마교의 발호예요.”
그게 대체 뭔 개소리냐. 무협 소설 너무 본 거 아니냐?
사람들이 웅성대는 가운데 고진철이 말했다.
“이해합니다. 마교라? 황당하겠지요. 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마약과 총기의 이슈를 견디다 못한 정부에서 기어이 한국 무림을 쓸어버린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음지에서 한국을 수호하던 우리의 빈자리를, 외국의 간악한 범죄조직들이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마교가 그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고진철이 리모컨을 눌렀다.
강당의 거대한 스크린에 한 소녀의 사진이 떠올랐다.
마치 인형처럼 생긴 금발 소녀의 사진이었다. 사진만 보면 서양인 모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는데, 나이보다 더 늙어보이곤 하는 백인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놀라울 만치 앳돼 보였다. 게다가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아무런 위험성이 없어 보였다.
그 소녀에 대해 고진철이 말했다.
“라나 레반도프스카.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백련교 폴란드 지부의 향주(香主)입니다. 마교의 체계를 잘 모르시는 분이 계실 테니 알려드리자면 마교의 한 지부를 책임지는 두 두목 중 하나란 뜻입니다.
삼 년 전에 폴란드 마피아와의 항쟁에서 승리하고는 그 조직과 사업을 모조리 흡수한 바 있죠. 외모만 보면 믿을 수 없겠지만, 마교 지부와는 별개로 자기만의 무기밀매 조직과 마약밀매 조직을 지닌 거물입니다. 알다시피 폴란드 마피아는 EU가 공동대응에 나섰음에도 박멸되지 않았던······”
스크린의 사진이 바뀌었다.
후드티를 쓴 예의 소녀 사진. 인천항을 배경으로 찍혀 있었다.
“이 거물이 얼마 전에 한국에서 목격되었습니다. 한국에 오기로 예전부터 작정했는지 한국어도 익혀놨더군요. 이 여자가 한국말을 쓰는 영상이 유투브에 올라와 있습니다. 여기 주소를 올려놓을 테니 다들 한번 보시고······.”
고진철은 계속해서 설명했다. 이미 붙잡힌 마약상과 총기 소지 건달들 또한 이 소녀를 보았노라고 털어놓았다.
분명히 이 여자가 마교의 한국 정복을 이끄는 수괴이며, 어려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이일 리도 없으니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이후로도 소녀의 사진을 내걸고 하기엔 지나치게 충격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그녀가 절세고수로 추정된다든가. 설령 그녀가 맥도날드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있더라도 함부로 덤빌 생각은 하지 말고 먼저 무림맹에 알려야 한다든가.
고진철이 선언했다.
“······전국 무림 위원회는 이 여자를 무림공적으로 지정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음을 여기 모인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여자를 포박하거나 살해하십시오. 무림의 운명이 걸린 일입니다. 위원회는 포상할 것입니다.”
발표가 끝난 줄 알았는지 한 차례 박수가 이어졌다.
그러나 고진철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또 한 명의 무림공적을 지정하고 싶군요.”
고진철이 이를 악물더니, 명백히 감정이 깃든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 년 전의 불미스러운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친애하는 절세고수께서 방송국의 말단직원부터 사장에 연예인들까지 공격한 사건이죠.”
허풍개의 몸이 굳었다. 고진철이 계속 말했다.
“무림인 방송국 습격 사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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