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위원 고진철 - [1]
허풍개가 출소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모든 일이 나쁘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환자들이 계속해서 침술원에 찾아왔고, 허풍개는 그들을 싼값에 치료하며 공덕을 쌓았다. 수련에는 큰 진전이 없었지만 주화입마 따위도 없었다. 무적비비탄이 수감된 이후 은근슬쩍 상납을 중단했던 몇몇 조직들은 다시 손봐주자 상납을 재개했다.
허풍개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풍이 보기에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풍은 장부를 뒤적이다 말고 갑자기 중얼거렸다.
“오은림 개씨발년.”
갑자기 웬 욕인가? 허풍개는 이풍을 노려보았다.
이풍이 계속 투덜거렸다.
“그 가시나는 본가에 돌아가서 말을 한 거야, 안 한 거야?”
“갑자기 뭔 소리냐.”
“왜, 지금쯤이면 무림인 모두가 무적비비탄 제자의 등장을 알고 있어야 정상 아니요? 그 무적비비탄 제자가 짝퉁인지 진퉁인지 궁금해서라도 전화 수십 통이 와있어야 정상 아냐? 그런데 연락이 하나도 없잖아. 이게 말이 돼?”
오가장 소가주 오은림이 찾아왔을 때, 이풍은 그녀에게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출현했노라고 본가에 전해달라 은근히 부탁했다. 그로써 소문이 퍼져 다른 무림인들이 찾아오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인들이 찾아오면, 무적비비탄의 제자는 그들에게 실력을 보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로써 무적비비탄은 무림에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오은림이 돌아간 이후로도 무적비비탄의 제자를 찾은 무림인은 없었다. 단 한 명도.
이쯤 되면 오은림이 본가에 돌아간 뒤, 무적비비탄의 제자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이풍으로서는 배신감마저 느껴지는 일이었다.
허풍개가 말했다.
“그러려면 자기가 나한테 패배한 것도 알려야 하잖아. 그게 수치스러웠나 보지.”
이풍은 버럭 성냈다.
“아니 씨발, 초딩도 아니고 그걸 왜 숨겨!”
“숨기고 싶으면 숨기는 거지.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떠벌리길 바라나.”
“아니, 내가 부탁했잖아! 서럽네 정말.”
허풍개는 오은림에게서 영약까지 받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는 허풍개와 달리, 이풍은 정말 그녀가 원망스러운 듯했다.
이풍은 한참을 씩씩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님, 그냥 이렇게 누워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아예 친분 있던 무림 문파에 전화라도 걸어볼까요?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왔으니 얼굴 보러 오라고 말이요.”
“그러려면 돈 든다.”
“돈이요? 왜요?”
“사람 불러놓고 자기소개하는 건 누가 봐도 일종의 청탁 아니냐. 다른 놈들에게 자기 존재를 퍼뜨려달라는 요청이지. 맨입으로 그럴 순 없으니 사례비를 줘야하는데, 당장 그럴 돈은 없어.”
“아니, 씨. 그래도······ 당장 돈을 제대로 못 벌고 있는데······. 답답해서 미치겠소, 정말.”
이풍이 답답함을 호소하는 가운데, 허풍개는 멀뚱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풍이 너, 급전 필요하냐?”
“예? 뭔 소리요?”
“너무 조급해하는 게 이상해서 그런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총 맞고 온 놈들한테 협박해서 돈 뜯어내자고 위험한 소리나 지껄였지? 옛날 같으면 안 그랬을 건데.”
“그랬죠. 그런데······.”
“급하게 돈 필요한 거면 말해라. 당장 현금은 없어도 어딘가에서 빌려올 순 있다. 그거라도 좀 주마.”
이풍은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아니, 급하게 필요한 건 아니구, 그냥 돈 좀 빨리 더 벌고 싶어서 그럽니다.”
“지금 벌이론 부족하냐?”
“부족하죠. 애들 월급 주고 형님 몫 빼고 그러면 내 몫은 천이백 좀 넘는단 말이요.”
“배부른 소리 하네. 한 달에 천이백만 원이 부족하면 평범한 직장인들은 밥도 못 벌어먹는 거냐.”
“에이, 그래도 그렇지. 좆만한 유흥업소 운영하는 깡패 새끼도 한 달에 천만 원은 챙겨요. 저번에 보니까 보도방 차린 고딩 새끼도 월 팔백씩 벌드만.”
“됐고. 돈 빨리 더 벌어야 할 이유가 있어?”
이풍은 한숨 쉬며 말했다.
“있긴 있어요. 우리 애기가 내년이면 고등학교 들어가거든.”
우리 애기?
허풍개는 이풍에게 딸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바람이가 벌써 그렇게 컸나?”
“응, 형님 빵 들어가기 전에 걔가 초3인가 그랬잖소? 곧 고딩 될 거니까 그 전에 돈 좀 벌어두려고 그래.”
“하기야 입시 준비해야 하니까 학원비가 들겠구나. 그거 돈 많이 들지.”
“어, 음, 암요.”
“너도 그때 순순히 공부하고 대학 들어갔음 얼마나 좋냐. 결국엔 머리 좋은 놈이 깡패짓이나 하고 자빠졌고.”
“아, 형님. 왜 갑자기 구박을 하고 그래······.”
“내가 너 과외비로만 일억사천 쓴 거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서 그런다.”
“그리 많이 썼어요?”
“그래. 그런데도 모셔온 과외선생은 두들겨 패서 합의금 물게 만들지 않나. 학교 선생도 패서 기어이 퇴학당하질 않나. 콱 병신 만들어버리고 싶은 걸 어찌어찌 참은 거 생각하면 내가 그때 마음 수행이 꽤 깊었나 보다.”
“고삐리가 철이 없을 수도 있죠, 뭐.”
“그래서, 모아둔 돈으론 부족하냐?”
“부족해요.”
“한 달에 천만 원 넘게 버는 놈이 저축해둔 게 없어?”
“없어요.”
“미친놈. 고삐리 때나 애 아빠 된 지금이나 아주······”
“아무튼 돈 없는 걸 어째요? 딸내미 위해서라도 빨리 더 벌고 싶어 미치겠어.”
허풍개는 혀를 차더니, 조금 뜸 들인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 조만간 무림맹에 얼굴 좀 비춰보자. 거기서 아예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납셨다고 밝혀보고.”
이풍이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요?”
“그래.”
“무림맹 가기 싫어했으면서?”
“싫어도 가야지 뭘. 이대로 늘어지는 것도 안 좋고.”
이풍이 활짝 웃었다.
“아이고, 정말······ 고마워요, 형님!”
허풍개는 살짝 웃었다. 그러면서 그놈의 무림맹에 찾아갈 경우 생길 일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신음했다.
무림맹에는 무적비비탄을 반기지 않을 자들이 상당히 있었다. 괜히 신분을 세탁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제자를 자처하는 몸이지만, 그래도 귀찮은 일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허풍개가 직접 무림맹에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그 비슷한 기회가 머지않아 생겼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한 장의 초청장이 날아왔다.
오가장에서 온 것이었다.
오가장의 초청장을 읽어내린 이풍은 눈만 껌벅이더니 문득 중얼거렸다.
“어쩐지 내 부탁 씹고 있더라니, 그럴 만했구만······.”
그러고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던 이도혁에게 말했다.
“도혁아. 너 집에 검은 양복이랑 검은 구두 있냐?”
“예? 아뇨.”
“카드 줄 테니까 한 벌 맞춰와라.”
이도혁이 물었다.
“장례식장에라도 가야 합니까?”
“어. 저번에 온 그 무림인 아가씨 기억하지? 오가장 소가주 말이야.”
“예, 이뻤죠?”
“그 아가씨 아부지가 돌아가셨다. 이번에 장례식 치를 거래.”
“저희도 거기 가야 합니까?”
“가야지. 같은 인천 무림인으로서 얼굴 안 비칠 수가 있나? 그리고 아가씨한텐 안된 일이지만······ 사실 이건 우리한텐 좋은 기회라 생각해.”
“좋은 기회요?”
이풍이 설명했다.
“이번 장례식엔 인천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무림인들이 모일 거니까. 일종의 무림 대회인 셈이지.”
*******
오가장의 오진영은 어릴 적부터 무공을 배우고 영약도 십억 원어치나 복용했지만 무공에 아무런 성취가 없는 남자였다. 어찌나 성취가 없는지, 그가 동네 태권도 사범과 싸워 져버린들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오진영은 타고 난 한량 기질이 있어 가문에서 일을 맡기려 해도 마다하는 반백수였다. 그에게 눈여겨볼 점이라곤 딸이 무공에 재능이 있어 소가주가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언젠가 가주의 아버지가 되리란 점을 제외하면 오진영에게는 정말이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당연히도 무림인으로서의 몸값은 측정이 불가능한 똥값이었다. 그야말로 애써 죽일 가치조차 없는 남자였던 셈이다.
그런 오진영이 죽었다. 국밥집에 있다가 총 맞아서 죽었다.
무림인들로서는 경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차라리 고수가 총을 맞아 죽었다면 이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이렇게 총이 많아졌다는 것은 물론 기겁할 만한 일이지만, 어쨌건 고수의 몸값을 생각하면 총이라도 쏴서 죽일 만하지 않은가. 그것은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일이다.
하지만 몸값조차 없는 무림인, 오진영마저 총을 쏴서 죽였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고수가 죽은 것보다 더욱 심각한 일이었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 이러는지 몰라도, 죽일 만한 가치가 있는 고수건 아니건 싹 다 쏴 죽이고 싶어하는 셈이니까.
게다가 한국에서 총격 사건이 어디 흔한가. 심지어 뒷골목이나 저택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멀쩡히 영업하는 국밥집에서 죽었다.
공개된 장소에서의 총격 사건이다. 쉽게 숨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경찰과 국밥집 아줌마에게 따로 돈을 주어 입 다물게 한 덕에 아홉 시 뉴스에 나오는 건 막았지만, 경찰들이 활개 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이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찰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관(官)의 개입, 당연히도 무림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일이었다.
이 정도 사태에 무림맹(武林盟)이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오진영 살해 사건은 곧 무림 전체의 일이요, 무림맹이 나서서 추후 대처방안을 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오진영의 장례식장은 무림맹의 임시 회장이라고 봐도 되었다.
오가장은 돈 많은 가문답게 으리으리한 장례식장을 빌렸는데, 그 앞에 세워진 차량들의 가격 또한 장례식장 건물 가격 못지 않았다.
이도혁으로서는 절로 주눅이 들었다.
이도혁은 이풍의 국산 SUV를 대신 운전하여 여기 왔다. 이 정도면 상당히 좋은 차량이지만 여기 모인 차들과 비교하니 이런 똥차가 따로 없었다.
그놈의 벤츠며 리무진이 뭐 이리 많은지.
그 벤츠와 리무진의 주인들 또한 별 볼 일 없는 인사들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전국의 무림인들이 식장에 모여있었다.
“이야, 저 노인네 개방 장로인가 그랬을 거다. 그 옆에 있는 빡빡이 아가씬 아미파에 유학 갔다 온 아가씨네? 저 아가씨 추정 몸값이 이백 억 넘어서 신진고수 신기록이라고 난리 났지 아마.”
이풍의 말에 이도혁이 기겁했다.
“이백억이요?”
“그 옆에 배 나온 아재는 몸값 천억 넘는 양반일걸? 이야, 당장 모인 무림인들 몸값 다 합치면 항공모함 반 척은 사겠다.”
“거기에 무적비비탄의 제자까지 합치면요? 우리 사숙님, 절세고수라니까 엄청 비쌀 것 같은데요.”
이풍이 웃었다.
“그럼 한 척 사고도 남지?”
그들의 대화를 듣던 허풍개가 눈을 흘겼다.
“조용히들 안 합니까.”
평소 허풍개를 어려워하는 이도혁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이풍도 여기가 장례식장임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침묵했고.
여기 모인 무림인들 너머에는 상주가 앉아있었다.
오은림, 얼마 전 만났던 그녀였다. 그때와는 달리 화장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상객들을 맞이했다.
그녀 앞에서 허풍개가 머리를 조아렸다.
“부친의 일은 실로 유감입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그리 말하는 허풍개의 얼굴은 놀라울 만치 슬퍼 보였다. 정말이지 저보다 제대로 애도의 뜻을 밝힐 표정은 없을 것이었다.
옆에서 보던 이도혁은 걱정스레 소곤거렸다.
“사숙님, 표정 관리 되게 잘하네요? 생판 남 장례식에 와서 정말 우울한 표정이네······.”
그리고 이풍이 말했다.
“아니, 저 양반은 진심으로 우울할걸?”
“예? 왜요?”
“저 양반 누구 죽는 걸 정말 싫어해. 친구가 됐건 생판 남이 됐건 간에. 아, 말 나온 김에 주의 하나 하자.”
“주의요? 어떤?”
“친구끼리 이런 말 자주 하지? 죽는다. 뒤진다, 뭐 이런 거.”
“예, 뭐.”
“저 친구 앞에선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절대 하지 마라. 발작해.”
이도혁은 어떻게 발작하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니 이미 본 것 같았다.
그 보도방 주인놈, 뒤진다고 말하자마자 끔찍하게 응징당했던가? 그때는 그냥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패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런대요?”
“글쎄, 말에는 힘이 있어서 죽인단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운수가 나빠지기 때문에 바로 응징하는 거라던가? 난 도사도 아니니까 정확힌 잘 모르겠고······ 아무튼 저 친구는 죽음이란 단어에도 미친놈처럼 민감하거든? 너도 조심해라.”
한편 부친을 잃은 상주 앞에서, 허풍개는 정말로 우울감에 잠겨있었다.
그는 정말로 이 상황에 몰입하고 있었다. 같은 일을 겪어본 바 있었다.
어미와 아비와 새끼의 죽음. 그리고 스승의 죽음.
차례차례, 그러나 갑작스럽게 닥쳐온 그것들은 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전혀 잊히지 않았다. 그 일련의 죽음은 뇌에 새겨지고, 몸에 스며들어서 지금도 죽음이란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게 했다.
오은림도 마주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네요. 선생님이 그 둘을 넘겨주신 덕분에 어떻게든 할 일도 생겼고요······.”
그녀로서는 고인과 인연이 없는 이 상객의 진실한 애도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허풍개의 태도에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진실성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오은림의 감사 인사에도 진실성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상주와 상객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은림이 말했다.
“저기, 스승보다 강하다고 하셨나요?”
“예.”
“그거 빈말이었나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있어요. 만약 스승님처럼 다른 문파의 의뢰를 받으실 예정이라면, 감히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