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3화 (13/103)
  • 의원 허풍개 - [4]

    이풍의 설명은 이러했다.

    어젯밤 손봐준 남자는 보도방 주인이었다. 조건만남을 알선하거나 업소에 여자를 공급하는 포주라는 뜻이다.

    그 남자와 같이 있던 여자는 태국에서 왔는데, 그 남자의 보도방에서 일했다.

    그렇듯 한국에 와서 성매매를 하려는 외국인들은 보통 3개월짜리 관광비자로 와서는 비자기한이 끝나면 돌아간다.

    비자기한이 끝나도 계속 남아서 일하는 경우도 있다. 그 경우에는 당연히 불법체류다. 가뜩이나 약자였던 입장이 더욱 취약해진다.

    보도방 주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만큼 악질이었다. 비자기한을 넘겨 법의 보호를 받기 어려워진 여자를 놔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여권을 압수하고, 가지고 있던 현금을 훔치더니, 생활비와 월세가 필요해진 그녀에게 온갖 빚을 지우면서 착취했다.

    그녀는 이제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길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성병까지 걸리자 남자는 여자를 치료해주는 척만 하려고 했다. 착취 중인 불법체류자 여성을 제대로 된 병원에 데려가기는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를 대충 침술원에 데리고 왔다가 허풍개한테 제압당하고 고문을 당했다.

    여자는 자신을 옭아매던 포주가 무력해진 걸 보고는 도망치기로 했다.

    그녀를 쫓아 허풍개가 뛰쳐나갔다. 허풍개는 감이 좋았다. 그녀가 급히 택시를 잡아 떠나려는 걸 보고는 그녀가 악질 포주에서 벗어나려는 여자임을 쉽게도 파악했다.

    허풍개는 돕겠다고 나섰으며, 어젯밤 그들은 그 보도방 주인을 족치러 출격한 것이다.

    “그럼 이제 그 아가씨는 어떻게 됩니까?”

    이도혁의 물음에 이풍이 대답했다.

    “적당한 병원 보내서 성병 치료하고, 그 보도방 새끼가 빼앗은 돈이랑 여권 돌려준 다음 태국에 돌려보낼 거야. 그 새끼가 아가씨 약점 잡으려고 태국에 있는 친구들 전화번호까지 따놨더라? 나중에라도 건드리면 제대로 조질 거라고 해뒀다.”

    사후처리까지 해준다니? 이도혁은 놀랐다.

    “제대로 책임지는군요?”

    이풍이 웃었다. 잇몸이 다 드러나도록 활짝.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가 얼마나 전통 있는 협객인데? 모르냐? 우리, 일제시대 허풍개 의사로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

    사실, 이도혁이 느끼기로서는 여자를 도왔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순수하게 좋은 일을 한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를 돕는 것보다는 매달 칠십만 원짜리 부적을 강매하려는 게 주목적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웠으니까.

    여자는 상가주택의 3층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도혁은 여자의 상태를 보러 계단을 올랐다.

    이윽고 3층에 오른 이도혁은, 여자를 만나고서야 자신이 어젯밤 좋은 일을 했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도혁을 알아본 여자는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요.”

    이도혁의 손을 잡고 계속 그리 중얼거렸다. 고마워.

    이도혁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은 채,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 그 일로 돈을 벌었으면 뭔 상관인가. 도움받은 사람이 고마워하면 그만이다.

    지금 느끼건대, 어젯밤 자신은 협객의 일, 그러니까 협행(俠行)을 한 것이 맞았다. 무적비비탄처럼 말이다.

    “어때, 만나보고 왔어?”

    “예.”

    “표정이 밝네. 뿌듯한가봐?”

    이풍이 추가로 설명하길, 이번 일로 월마다 상납까지 받게 되었지만 금전적인 이득은 크지 않다고 했다. 여자를 위해 쓴 돈이 더 들었다고.

    그게 사실일까 아닐까. 아무튼 여자를 제대로 도운 것은 사실이었다. 당장 이도혁이 느끼기에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이 벅차는 감동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다. 누구와 공유하는 게 좋을까?

    말 없고 차가운 사숙과 공유하는 게 좋겠다. 어제 벌인 일을 혼자서 거의 다 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 젊은 고수 말이다.

    무적비비탄의 제자답게 협행을 한 그에게 이번 일이 얼마나 보람찼는지 말해주리라. 그러면 그도 뿌듯해하고 좋을 테지.

    이도혁은 허풍개를 찾아가 말했다.

    “그 아가씨, 한국말도 못 하면서 고맙단 말만 반복하더라고? 나도 말주변이 좋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힘내라고 어깨 두드려주니까 막 울더라.”

    “그랬습니까.”

    “사숙님도 나중에 올라가서 응원 한마디 하지 그래?”

    그러기 싫은 것 같았다. 허풍개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응원할 게 뭐 있나.”

    “그동안 힘겨웠지만 어떻게든 해결됐으니 이제부터 잘 이겨내면 될 거라고 응원해준다든가······”

    “굳이?”

    놀랍게도, 허풍개는 자신이 구해낸 여자를 위로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이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도혁은 당황했다.

    “그 꼴을 당했는데 안 불쌍해?”

    “뭐가 불쌍합니까? 벌 만큼 벌었으면서 더 벌겠다고 불법체류까지 하다가 그 꼴을 당한 건데. 욕심부리다 욕봤을 뿐 아닌가. 그냥 치료나 해주고 집에 보내면 끝인 얘깁니다.”

    “아니, 어젯밤에 사숙께서 돕자고 말해서 도운 거라던데?”

    “예.”

    “안 불쌍하면서 왜 도왔어요?”

    “안 불쌍하다고 도와주지 않을 건 또 뭡니까.”

    이도혁은 또다시 당황했다.

    “어······ 불쌍해서 도와주는 게 아닌가?”

    “소방수가 불난 집 주인이 착한 사람이면 구해주고 나쁜 사람이면 버립니까. 집에 불났으면 일단 구하는 거지.”

    이건 또 이상한 비유였다. 소방수와 달리 협객 노릇은 직업이 아니지 않은가. 자발적으로 도와주고 싶어서 돕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불쌍하다고 느껴야 돕는 것이 정상 아닌가.

    무슨 사무적인 기준이 있어서 돕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젯밤도 내면에서 솟아난 의협심으로 도운 게 아니라 도울 만한 일이니까 뚝딱 해치웠단 셈 아닌가.

    이도혁이 중얼거렸다.

    “사숙님, 잘은 몰라도 사조님과는 다른가 보네······.”

    “사조님?”

    “허풍개 의사(義士)님. 무적비비탄 대협의 스승님 말이야. 그분만 봐도 납치된 청년 하나 구하겠다고 마약상 소굴로 뛰어들 만큼 열정적인 분이셨잖아?”

    그 말을 듣고 허풍개는 생각했다. 내가 청년 하나 구하겠다고 마약상 소굴로 뛰어들었다고?

    대충이나마 기억이 났다.

    구해놓고 보니 길거리에서 약 팔던 놈이었지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니 더 자세한 기억이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의 일이었다.

    허풍개는 의원 겸 해결사를 자처하며 떠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웬 아줌마가 찾아와서는 긴급히 도와달라고 했다. 아들이 집에 들이닥친 깡패 새끼들한테 잡혀갔다는 것이다.

    당시 허풍개는 고수라 부르기 어려운 실력이었다. 혼자서 폭력조직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거절하려 했지만 아줌마가 하도 울며불며 달라붙길래 힘든 싸움을 각오했다. 기어이 깡패 소굴로 쳐들어가서는 죽을 힘을 다해 그 아들을 구해냈다.

    그러나 힘써 구해놓고 보니 구한 보람이 전혀 없었다. 말했다시피 잡혀있던 그놈은 길가에서 마약을 팔던 놈이었고, 아무 이유 없이 잡혀간 게 아니라 조직의 구역에서 약을 팔며 물을 흐리다가 잡혀갔을 뿐이었다.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나은 놈이었던 셈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얼마나 허탈했던가.

    구출된 그놈의 어미가 아들의 직업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했다. 아무튼 그 어미는 자세한 사실을 말하지는 않은 채 납치된 아들이 무적비비탄에게 구출되었단 것만 자랑하고 다녔으므로, 그 일은 미담으로 퍼졌다.

    그날 허풍개가 깨달은 것은, 도사로서 공덕을 쌓기 위해 협객 노릇을 하는 이상 그 일에 감정을 싣지 않는 게 좋다는 사실이었다.

    도사로서 선행을 할 것이라면, 그냥 하면 되었다. 보람씩이나 느끼면서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낭독한 지 반 세기쯤 지나버린 늙은 의사처럼, 의료행위에 아무런 의욕을 느끼지 못하면서 진료를 보더라도 뭔 상관인가. 아무튼 치료만 잘 해내면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든 치료비를 받는 의사에게든 좋은 일이다.

    *******

    밤이 되었고, 허풍개는 자신의 방에서 공과격을 펼쳤다.

    이번 일로 공과격에 기록할 수 있는 점수를 계산해보았다.

    고약한 기둥서방에게서 아녀자를 도왔으니 25점.

    하룻밤 뛴 것치고는 괜찮았다. 저번에 감점된 점수를 만회하고도 남지 않는가. 신선으로의 길을 한 발짝 더 나아간 셈이다.

    허풍개가 살짝 웃는 가운데, 사무실에서 이풍은 활짝 웃고 있었다.

    “계속 일할 거라고?”

    이풍의 물음에 이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그 말에 이풍은 정말 기뻐하고 있었다. 하기야 허드렛일해 줄 사람조차 구하기 어려운 직종이다. 말 잘 듣는 호구가 떠나가길 바라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여기서 일하면서 무공도 배우고, 무림에서 돌아가는 일도 배우고 하면서 협객 되고 그러는 거지, 응!”

    이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신은 협객이 될 것이다. 치명상을 입어가며 증조부를 구출해주었다는 허풍개 의사처럼. 어린이날, 컨테이너에 갇혀있던 어린 자신을 구해준 무적비비탄처럼.

    어린 날의 그 영웅처럼 될 수 있다면 사람 머리통을 야구방망이로 후려칠 수도 있었고 깡패 노릇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영웅의 맘이 따뜻하지 않은 제자와 어울리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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