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1화 (11/103)
  • 의원 허풍개 - [2]

    그러다 이도혁은 문득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를 데리고 왔다.

    남자가 고문받는 지금 그녀가 과연 태연할까?

    슬쩍 보니 당연히도 여자는 몸을 떨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폭력 사태에 당연히도 공포스러울 것이었다. 경찰에 신고하려는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그러지 못하게 막아야······.

    “저기요?”

    이도혁이 다가간 순간, 여자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더니 문을 열고 뛰쳐나가 도망쳐버렸다.

    이도혁은 쫓아가서 잡으려다 멈춰섰다.

    허풍개가 말했다.

    “문 닫아요. 비명 새잖아.”

    “여자가 도망쳤어!”

    다음 순간 이도혁은 또다시 놀랐다. 허풍개가 도망친 여자를 쫓아서 뛰어나간 것이다.

    왜? 따라가서 신고 못하게 고문이라도 하려고?

    따라가려는 이도혁에게 허풍개가 말했다.

    “사람 못 들어오게 문 잠그고 있어요.”

    이도혁은 감히 거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순순히 문을 닫고 잠갔다. 얌전히 그 자리에 기다리면서, 앞서 뛰쳐나간 여자가 당할 꼴을 생각하며 몸서리 쳤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벌어질 일을 끔찍하게 생각하면서도 감히 말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진절머리쳤다.

    *******

    여자를 잡으러 뛰쳐나간 허풍개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십오 분 후였다.

    혼자 돌아온 허풍개에게 이도혁이 물었다.

    “그 아가씨는? 죽인 건 아니지?”

    허풍개는 이도혁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미쳤어요.”

    “아, 그럼······”

    “우리 상가주택 3층 알죠.”

    “알지. 텅 빈······”

    “지금 거기 있어요.”

    거기엔 왜 보낸 거냐. 신고 못하게 억류하는 거냐? 집 주소랑 친구 전화번호까지 싹 다 털어놓게 한 다음에야 풀어주려고?

    자세히 물을 용기는 없었다.

    이도혁이 입을 다문 가운데, 미리 침을 놔둔 남자의 마취가 풀리고 있었다.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남자는 방금 겪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은 눈치였다.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야, 이 씨발 새꺄! 너 어디 사는 새끼야! 내가 그 꼴 당하고 가만 있을 거 같애!”

    허풍개가 물었다.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

    남자는 조금 뜸 들이더니, 이렇게 외쳤다.

    “신고할 거야, 새끼야!”

    이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이도혁이 당황했지만 허풍개는 무덤덤했다.

    “해.”

    놀랍게도 허풍개는 정말 남자가 경찰에 신고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남자는 씩씩대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도혁 혼자 기겁해서 침술원을 빠져나갔다. 이풍에게 달려가서는 비명지르듯 소리질렀다.

    “사장님!”

    그리고 이도혁이 이풍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침술원에는 정말로 경찰이 와있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허풍개는 태평한 가운데 남자 혼자 씩씩대고 있었지만.

    “그래요, 선생님. 폭행당했단 말씀이죠.”

    경찰의 물음에 남자가 대답했다.

    “막 찌르면서 고문도 했고!”

    “무슨 고문? 뭔가 상해 흔적 같은 건 안 보이는데요.”

    “여기 피 나는 거 안 보여?”

    남자가 억울하다는 듯이 허벅지를 걷어올렸지만 거기에 난 구멍은 작았다. 그야 가느다란 침으로 찔렀으니 상처도 클 수가 없다.

    경찰들이 어이없어 하는 가운데 허풍개가 말했다.

    “침놓은 겁니다. 아프다고, 침 잘못 꽂은 게 분명하니 배상금 달라는 거 안 주니까 이러네요.”

    남자가 외쳤다.

    “아니, 씨발 저 새끼가 내 팔도 꺾고······”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선생님, 휴대폰으로 영상 찍은 거라도 있어요?”

    “얻어터지는 중에 뭔 폰을 꺼내!”

    “그럼 저희도 뭘 어떻게 못 해드려요. 여기 CCTV도 없으니까 따로 확인도 못 하는데 뭘 어째.”

    “아니, 그럼 그냥 갈 거야? 시민이 폭행당하고 고문까지 당했는데?”

    경찰은 남자의 문신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더니 말했다.

    “납득 안 되시면 민원 넣든가요.”

    상황을 지켜보던 이풍이 이도혁을 보며 웃었다.

    “폭행죄로 잡아넣기 생각보다 힘들어. 증거 없으면 경찰이 지들 맘대로 화해시키고 끝이야, 끝.”

    그리고 남자가 외쳤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여기 불법영업 아냐?”

    “예? 그건 또 뭔 소리······.”

    “아니 씨발, 이런 구석진 데 침술원이 왜 있어? 이거 척 보기도 불법이잖아. 아냐? 경찰이 직접 왔으면서 단속 안 해?”

    경찰들이 허풍개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그 순간 이풍의 표정이 굳자 이도혁 또한 긴장했다. 그러나 이 또한 필요없는 걱정인 듯했다.

    정작 허풍개는 태연하게 서랍에서 무슨 문서들을 꺼내 내미는 게 아닌가.

    “여기요.”

    문서를 받아든 경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구사 면허랑 물리치료사 면허······ 사업자 신고는 하셨고요?”

    “예.”

    남자는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인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이풍이 허풍개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면허들 언제 갱신했어요? 아니, 신분을 세탁했으니까 면허도 아예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 거 아냐?”

    “박 회장이 해줬어.”

    “와, 방송국 한 번 털어줬다고 그렇게까지 챙겨줘?”

    경찰들이 떠나간 것은 그로부터 삼 분 후였다.

    이 자리에 남겨진 남자는 모두를 노려보았다.

    “얼굴 봐뒀다, 새끼들아.”

    남자는 뭔가 협박 비슷한 걸 했지만 그뿐이었다. 혼자서 세 명을 상대로 대들 용기는 없는지 씩씩거리면서 떠나갔다.

    그것을 보며 이도혁은 안심했다. 이제 이 소동은 끝이구나.

    그러나 아니었다.

    허풍개가 이풍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고, 이풍은 웃었다.

    이풍이 말했다.

    “도혁아?”

    “예?”

    “애들 모아놔라. 야근이다.”

    *******

    박성철은 원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운동을 해왔는데, 하필이면 대학에서 복싱하다가 손목이 맛이 가버렸다. 의사가 말하길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겠지만 완치는 어려울 것이라 했다. 복서로서는 끝장난 셈이다.

    먹고 살려면 어쩌겠는가? 앞서 졸업한 선배를 따라서 용역을 뛰고 하다 보니 어느새 웬 대부업자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대부업자의 이름은 이풍이다.

    그 밑에서 일 년 넘게 일했지만 아직 그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이곳이 불법 대부업체인 건 분명한데, 직원 세 명은 돈 내놓으라 독촉하러 어디 쳐들어 가본 적이 없었다. 불법 대부업체 직원이 할 법한 험한 일은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여기 직원 셋이 하는 일은 이풍이 알려준 번호에 전화를 걸어서 납부를 독촉하는 일뿐이었다.

    그 정도 일은 사장 혼자서 다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은데 굳이 직원을 부려 월급을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직원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려 드는 이유는 전혀 모르겠고.

    다만 확실한 것은, 이풍이 보기보다 훨씬 거물이란 사실이었다.

    이풍은 불법 대부업자인 주제에 단속을 당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불법 대부업이란 게 원래 툭하면 신고를 당해서 경찰들이 들이닥치는 법이다.

    유흥업과 달리 대부업은 단속에 걸린다고 잡혀가는 일은 없다. 다만 벌금을 내야 하는데, 어지간해선 벌어들이는 수익이 벌금보다 크기 때문에 그냥 내고서 계속 영업할 뿐이다.

    그러나 이풍은 그 벌금조차 내지 않았다. 또한 이풍은 어디 조직에도 속한 것 같지 않았지만, 그 어떤 폭력조직도 이곳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대부업을 하는 다른 동네 건달들이 이곳을 내버려 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반인이 운영하는 경쟁업체라면 경찰에 툭하면 신고해서 엿 먹일 법도 하지 않은가. 아니면 진상을 잔뜩 보내 영업을 방해하거나.

    하지만 그런 일조차 겪은 일이 없었다.

    오히려 동네의 몇몇 중년 깡패들은 이풍을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대체 어째서?

    신기해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이풍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래 봬도 무적비비탄이랑 형, 동생 하던 놈이야. 다들 설설 기는 거지.”

    그놈의 무적비비탄이 뭐 하는 작자인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옛날에 이름 날린 무림인이라고도 들었지만 그 역시 별 감흥이 없었다.

    무림이면 거의 딴 세상 아닌가. 무림인은 태어나서 본 적도 없다.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지 못했다. 사장인 이풍 또한 무림인이라지만 막상 대단한 모습은 보여준 적이 없고 말이다.

    며칠 전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나타났을 때, 네 명이 한꺼번에 제압당한 것은 꽤 놀랐다. 무림인이 과연 세긴 세구나.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나타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풍은 저녁 시간에 부하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 자리에는 무적비비탄의 제자도 있었다.

    “장갑 오랜만에 끼나? 손에 잘 맞아?”

    이풍의 말에 허풍개가 대답했다.

    “예.”

    허풍개는 웬 흰색 장갑을 받아들고 착용했다. 그 장갑을 이풍은 매우 자랑스러운 듯이 소개했다.

    “잘 봐라. 저게 바로 무적비비탄 대협께서도 쓰시던 장갑이다. 그 직속제자가 물려받은 거지.”

    “혹시 그게 말로만 듣던 천잠사(天蠶絲)로 만든 겁니까?”

    이도혁이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이풍이 비웃었다.

    “뭔 개소리야? 그냥 면장갑인데. 지문 안 묻히려고 끼는 거야.”

    이풍이 다시 허풍개에게 시선을 돌렸다.

    “BB탄은 플라스틱 말고 금속으로 줄까? 아님 그냥 자갈 주워 던질래?”

    “자갈로 하죠.”

    뭔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어리둥절하는 가운데, 이풍이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을 알려주마. 저기 저 주택 보이지?”

    이풍이 가리킨 것은 웬 단독주택이었다.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건물이었다.

    “저기 사는 새끼가 오늘 여기 무적비비탄의 제자께 시비를 걸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박성철은 관심이 없는 걸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뭘 어째야 하는데요?”

    “잡아먹어야지, 홀랑.”

    이풍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길 습격할 거다.”

    이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저길 쳐들어간다고요?”

    “그렇다니까.”

    “여기 동인천 아닌데요. 여기 부자 동네예요.”

    “새끼, 깡패 주제에 좋은 데 사네. 그래서?”

    “그 새끼 아까도 좀 처맞으니까 경찰 부르던데요? 쳐들어가면 다 같이 빵들어가는 거 아닌가······”

    이풍은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뭐예요?”

    “이 동네 CCTV 배치도.”

    그 말에 모두가 눈을 껌벅였다.

    “그걸 어떻게 구했대?”

    “경감 중에 아는 애 있는데 걔가 뽑아줬어.”

    박성철은 불안하게 말했다.

    “그래서······ CCTV 피해서 저기까지 쳐들어가자는 거예요?”

    다행히 그런 말은 아니었다.

    “뭔 수로 그러냐? CCTV가 정확히 어디서 어디까지 찍는지 눈으로 어떻게 알고 피해가.”

    “그럼?”

    “다 없애야지.”

    “없애는 동안 들킬 텐데요?”

    “안 들켜.”

    허풍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갑을 낀 손으로, 주변에 떨어져 있던 조그만 자갈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더니, 튕겼다.

    탁, 탁, 탁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린 콰직, 하는 소리.

    뭔가 깨지는 소리······.

    뭔가 부서진 것 같았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너무 먼 거리에서 들린 소리여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허풍개는 작은 돌을 한 번 더 던졌다. 손가락의 힘만으로 튕겨서, 탁.

    허풍개는 자갈에 미리 기(氣)를 담아두었다.

    벽과 건물 등은 그 무형의 기를 가리지 못했다. 허풍개는 눈을 감고, 기의 움직임을 추적했다.

    그리하여 벽에서 벽을 부딪쳐 도탄을 거듭하는 물체를 볼 수 있었다.

    작은 돌은 담장과 건물 벽에 여러 번 튕겨 날아가더니, 기어이 건너편 담장 귀퉁이에 달려있던 무언가에 명중했다.

    그것을 확인한 허풍개가 눈을 떴다. 배치도의 두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랑 여기 체크.”

    이풍이 빙긋 웃더니 박성철에게 지시했다.

    “여기랑 여기, CCTV 잘 부서졌는지 보고 와.”

    박성철은 시키는 대로 골목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까 배치도에 표시되어 있었던 CCTV의 렌즈가 파괴된 것을 목격했다.

    박성철은 한 번 눈을 비볐다. 이곳 CCTV와 방금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있던 위치를 비교해보았다.

    저 거리에서, 이렇게 많은 건물과 벽들이 가리고 있는데 이걸 부쉈다고?

    조금도, 아주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돌아와서 보고했다.

    “부숴졌어요······.”

    얼빠진 목소리. 그리고 얼빠진 얼굴로 박성철은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하는 짓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허풍개는 돌을 튕겼고, 이풍은 그때마다 배치도의 CCTV를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렇게 한 무림인은 거리의 감시체계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었다. 장갑 하나와 주변에 떨어진 돌멩이 몇 개만 가지고 벌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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