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반로환동전-10화 (10/103)
  • 의원 허풍개 - [1]

    1852년, 무적의 영국군은 중원을 가로질렀다.

    그들은 단 두 번의 회전에서 십사만 명군(明軍)을 궤멸시킨 다음 수도로 전진했다. 그 무엇도 세계최강 군대의 행군을 막을 수 없었다.

    명 황제는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그 결정을 위대한 항전 의지라 칭송할 수도, 현실을 무시한 채 자존심만 챙기려는 무책임한 도주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군이 보기에는 후자였다. 황제와 관리들이 떠나버린 명의 도시들은 거주민들과 함께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각 도시에 쉽게도 입성할 수 있었다. 저항이 거셌던 몇몇 도시에는 본보기로 포격해야 했지만, 대부분의 도시를 무혈로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령한 도시의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관(官)이 떠나버린 도시에서, 무림은 침입자들을 향한 끝없는 성전을 시작했다.

    반영구명(反英救明)의 기치를 건 마교도들은 툭하면 골목에서 튀어나와 불운한 병사들을 습격했다.

    폭탄을 끌어안고 소대를 향해 돌격하는 마교도들은 총알 한두 방으로는 쉽게 제압되지 않았다. 치사량에 가까운 아편을 복용하고서 돌격했기 때문이다.

    길가의 거지들은 병사들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원이었고, 도시의 객잔에 모여 놀음하던 승려며 도사에 산적까지 모조리 도시에 주둔한 군대의 적이었다. 소위 협객이라 불리는 무림인들이 그들이었다.

    그 어중이떠중이 협객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격파할 수도, 전술적으로 유의미한 피해를 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을 질리게 할 수는 있었다.

    무림인들은 끊임없이 기회를 엿보다가 주둔지를 습격할 수 있었다. 보급물자를 불태우거나 배식에 독을 섞을 수도 있었고, 몰래 건물에 숨어들어 폭탄을 설치할 수도 있었으며, 영국군이 힘써 마련한 현지 협력자들을 암살해버릴 수도 있었다.

    심지어 수십 년 내내 그럴 수 있었다.

    영국군이 배치해둔 호위 병력에도 불구하고 어중이떠중이 협객들의 습격이 성공해버리는 일은 수백 차례 반복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초병과 지휘관들을 호되게 징벌했지만, 그것만으로 습격은 막히지 않았다.

    비로소 영국군은 그 모든 습격 성공의 원인을 군 기강의 해이가 아니라 습격범들의 능력에서 찾기 시작했다.

    영국군이 본격적으로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질리지도 않고 자신들을 괴롭혀온 협객들에게는 단순히 의협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협객들에게는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온 일들을 가능케 하는 초인적인 부분이 실제로 있었다.

    자기 키의 몇 배나 되는 담장을 뛰어넘는 근력이라든가, 지치지 않고 수십 킬로미터를 전력으로 달려 기어코 기병이 포함된 소대의 추격을 뿌리치는 체력이라든가. 병사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누르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그 직전에 몸을 던지는 반사신경이라든가.

    아주 드문 경우나마 발사된 총알을 칼로 쳐내버리기까지 하는, 명백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능력들이 드러났다.

    무림인들 스스로는 그것을 무공이라 불렀다.

    영국인들이야 인간에게 주어진 이상의 일을 해내니 사특하단 의미에서 마법이라 불렀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신체능력 향상이 그저 무술을 단련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단순한 신체 능력의 연장을 넘어서 정말로 마법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조화를 부리는 무림인도 몇몇 있었다.

    칼에서 매화 향기를 분출하거나, 그저 자세를 잡는 것만으로 주변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조화들 말이다.

    심지어 손에서 불을 피우는 무림인도 목격되었는데, 아무리 봐도 이런 조화들은 무술은커녕 신체 능력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다.

    모든 무림인이 그런 초자연적인 마법들을 부리지는 않았다.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소수의 인원만이, 그들 사이에서 절세의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숭상되었으며 (······)

    마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식이 정면으로 부정된 그 시기, 신문 기사를 읽고서 동양의 신비에 심취한 몇몇 재력가들은 ‘동양 마법’을 배우러 중국에 건너오기까지 했다.

    그들이 무공 스승에게 바친 예물들은 협객들의 활동에 유의미한 도움이 되었다.

    (······)

    도망친 황제가 여전히 모든 협상을 거부하는 가운데, 중원 정복은 끊임없이 재원을 집어삼키는 수렁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홍콩을 제외한 모든 도시에서 세 열강의 군대가 철수한 것은 (······)

    *******

    “세상에, 이건 진짜 절세고수 아니요? 구체적인 절세고수 기준이······ 아무리 봐도 무술이 아니라 마법인 걸 해내는 거 맞지?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이라든가 제왕검형(帝王劍形)이라든가 삼매진화(三昧眞火)라든가 뭐 그런 거 말이요.”

    이풍의 말에 허풍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중에 삼매진화가 손에서 불 꺼내는 거였지 아마? 전기 꺼내는 것도 거기 밀리는 것 같진 않은데······.”

    허풍개의 검지 끝에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그 초자연적인 조화에서 이풍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 나 이제 절세고수다. 그래봤자 4등이겠지만.”

    스파크가 튈 때마다 이풍의 눈동자도 데굴데굴 굴렀다. 이풍은 한참이나 허풍개의 뇌법을 감상하다가 말했다.

    “끝내주네······. 그런데 왜 그리 덤덤해요?”

    “흥분할 거 있나.”

    “아니, 절세고수가 됐는데?”

    “늦어도 너무 늦게 했잖아. 그 산적 놈은 쉰에 해낸 일이고, 박 회장은 마흔에 해낸 일이고. 월녀는 아예 서른도 되기 전에 해낸 일인데 난 뭐냐.”

    “환갑 넘어서라도 해낸 게 어디요? 그것만으로도 늙은 무림인들 다 부러워서 발작하겠구만.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욕먹어!”

    이풍이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러댔지만, 허풍개는 반응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허풍개가 잔치라도 열어 이 경사를 기념하는 일도 없었다. 시간 낭비였기 때문이다.

    허풍개는 정확히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시작했다. 끝내주게 맛없는 죽을 한 번에 먹어 없애고, 아침 기를 빨아들였다.

    간단한 태극권 수련까지 마치고는 침술원을 열었다.

    출소한 지 이틀이 지난 뒤에야 침술원에는 제대로 된 손님이 찾아왔다.

    “여기가 이선희? 그 영감님이 하시던 곳 맞죠? 지금은 웬 젊은 분이 하네······.”

    찾아온 중년 남성은 젊은 의원을 보고 실망한 눈치였다.

    그러나 수 시간 뒤, 중년 남성은 만면의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매인 줄 알았더니, 씨발······.”

    치료가 끝난 중년 남자는 정말로 만족한 모양이었다. 그는 이 솜씨 좋은 젊은 의원을 동네에 소문내주겠노라고 약속하고서야 떠나갔다.

    그가 실제로 약속을 지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유명했던 침술원이 다시 열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일까.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원래 이 침술원은 동네에 명성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이 무림고수 무적비비탄의 영업장이란 것은 비밀이었지만, 의원으로서도 허풍개는 그럭저럭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의원으로서의 능력은 당시에 비해 녹슬기는커녕 더욱 나아진 상태였다. 최근의 성취 덕이었다. 손에서 번개를 방출하는 예의 조화 말이다.

    거기에는 단순한 현상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고로 번개는 신성한 것 아닌가. 도가에서 번개란 천형(天刑)의 집행이기 때문에, 단순한 기상현상을 넘어 구마(驅魔)와 치병(治病)의 힘이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실제 번개에 그런 힘은 없다. 그렇다면 도사가 도가적으로 불러낸 번개에는 그런 힘이 있을까.

    시험해보니 있었다. 환자의 환부에 침을 꽂으면서 살짝 뇌법을 흘려 넣으면 그 주변으로 약간의 전류가 흐른다. 그러면 단순히 전기 자극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정말 신통한 무언가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막혀있던 기의 흐름이 돌아오는 게 보였다.

    그런 식으로 침을 몇 번 꽂고 나면, 환자는 그저 침이 몇 번 꽂혔을 뿐인데 몸이 가뿐해졌다며 놀라면서 떠나갔다.

    그렇듯 치유를 거듭하는 것도 다 수행이었다. 도사이자 의원으로서의 수행일 뿐만 아니라, 무림인으로서의 수행이기도 했다.

    치유하는 법을 잘 알게 되는 것은 곧 파괴하는 법을 잘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치를 머지않아 시험할 수 있었다.

    *******

    불과 며칠 만에 침술원에는 놀랄 만큼 환자가 늘었다.

    줄까지 선 환자를 보며 이도혁은 감탄을 표했다.

    “진짜 대단하네요. 무공에만 고수인 게 아니라 의술도?”

    이풍이 조수 노릇하라고 보낸 놈이었다. 그 칭송은 들은 체 만 체하면서 허풍개가 말했다.

    “형씨는 왜 반말을 하다가 존댓말을 하다가 합니까.”

    “아니, 저번에 보기보다 나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그냥 반말해요. 나이 더 어려 보이는 놈이 존댓말 들으면 수상해 보여서 안 좋아.”

    환자들이 사라진 것은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영업종료 시간이다.

    침술원 문을 닫으려던 그때, 뒤늦은 손님이 들어왔다.

    심술궂어 보이는 남자 하나와 젊은 여자 하나.

    남자는 잘 보이도록 문신까지 하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폭력조직에 몸담은 사람인 것 같았는데, 말투부터가 그랬다.

    “여기가 그렇게 잘 한다매. 그럼 비뇨기과에서 하는 치료? 뭐 그런 것도 할 수 있어?”

    누가 깡패 새끼 아니랄까 봐 대뜸 반말이다. 이도혁이 눈을 부라렸지만 허풍개는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대충은요. 왜, 거시기에 뭐 걸렸나?”

    비뇨기과 의원 노릇도 예전부터 해왔다.

    역 근처에는 유흥업소들이 모인 동네가 있기 마련인데, 동인천역 근처에도 그런 곳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성병에 걸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는 제대로 된 병원에 가서 성병이요, 말하기는 부끄러운지 전문적이지도 않은 이 침술원에 찾아오곤 했다. 덕분에 관련 치료도 나름 능숙한 편이었다.

    아무튼 된다는 대답이 맘에 들었나보다. 남자가 히죽 웃더니 말했다.

    “나 말고 이 기지배나 봐줘.”

    “저 아가씨를?”

    “그래. 저년 보■가 씨발 아주······”

    반말을 들을 때도 담담하던 허풍개가 정색했다.

    “여자는 안 돼. 병원 데려가요.”

    남자가 인상을 구겼다.

    “병원 못 보내니까 이런 데 온 거 아냐, 새꺄. 왜, 성희롱 신고할까봐 그래? 이년 빤스 내가 직접 내려줘?”

    “여자는 안 된다고. 나가요.”

    “아, 씨. 남녀차별하나, 이 돌팔이 새끼가?”

    “나가요.”

    “뒤질라고 진짜.”

    그 순간, 야구방망이를 챙기기 위해 잠시 뒤돌았던 이도혁은 기겁했다.

    등 뒤에서 건달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게 아닌가.

    뒤돌아보니 일이 이미 끝나있었다. 허풍개는 눈 깜빡할 사이에 건달을 제압하고는 고문하는 중이었다.

    침 여러 개를 꺼내서는 건달의 허벅지에 꽂아댔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근육 수축이 특히 아프다는데, 그럼 근육에 직접 전기를 흘리면 더 고통스러워하나?”

    침이 워낙에 가늘고 날카로워서 찔린들 별로 아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건달은 침 하나가 꽂힐 때마다 테이저건이라도 맞은 듯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코와 입에서 묽은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허풍개는 침을 몇 번 더 꽂고서 또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네.”

    비명은 한동안 이어졌고, 지켜보던 이도혁의 눈동자가 떨렸다.

    남자가 아무리 고통스러워 하더라도 고문하는 허풍개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침을 꽂을 때와 마찬가지 태도로, 제 할 일을 한다는 양 담담할 뿐이었다.

    대범하다 못해 무감정하기까지 한 그 태도를 보며 이도혁은 생각했다.

    무적비비탄의 제자라더니 너무 잔인한 것 아닌가? 그 대협께서 웬 사이코패스를 거두셨나?

    협객으로 이름 높은 무적비비탄의 제자가 보일 법한 행동 같지가 않았다. 남자가 계속 비명질렀고, 이도혁은 귀를 막았다.

    1